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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5화)
“물론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지만 저희 힘으로써는 감히 남궁무성이 제시한 방법에 토를 달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제의를 받아들였지만 애초에 맹검철가는 무가(武家)의 이름을 빌리고 있을 뿐, 상가(商家)나 마찬가지여서 비무를 할 무인이 모자랐지요. 물론 유명한 무인들을 돈으로 매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상대가 당가라는 말을 듣고는 저희 제안을 거절하더군요.”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서렸다.
“설상가상으로 당가에서는 이번 기회로 아예 저희 가문을 눌러 버리려고 하는 것인지 저희 가문과 계약한 낭인무사들을 위협해 억지로 계약을 파기시켰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가는 곳마다 횡포를 부려 대외적으로는 사천을 돌아다닐 수도 없게 되었어요. 그렇기에 호위무사 한 명과 제가 비밀리에 온 것이지요. 두목님이 몰래 숨어서 오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에요. 만약 제가 무인들을 대동하고 두목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대막으로 떠난다는 것을 당가가 알았다면 저희는 대막에 들어서기도 전에 변을 당했을 테니까요.”
“방금 전에 죽은 놈이 호위무사였어?”
“저희 가문에 남은 이십여 명의 무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 이제는 열아홉 명이 되겠군요.”
철연화의 목소리에 담긴 질책에 혈무악이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탄식했다.
“아아.”
찌푸린 미간 그대로 혈무악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론은, 당간지 뭔지 하는 놈들하고 싸움을 하려는데 싸울 놈이 없으니 대신 싸워 달라?”
비록 표현은 거칠었으나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철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맹검철가의 대표로 부탁드립니다.”
“대표?”
혈무악이 되물었다.
“네 위치가 무엇이기에 맹검철가의 대표를 자처하는 거냐.”
멈칫한 철연화가 답했다.
“현재 맹검철가의 가주이신 노호검(怒虎劍) 철적심(鐵積甚)이 제 아버지십니다. 더불어 제 아버지는 려화 고모님의 오라버니이기도 하고요.”
“계집 너는?”
“맹화 철연화, 그게 바로 접니다.”
“삼웅사화(三雄四花)!”
흑서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삼웅사화?”
고개를 갸웃한 혈무악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흑서, 그게 뭐냐?”
혈무악의 물음에 흑서가 철연화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일곱 명의 후기지수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혈무악이 의외라는 신음을 흘리며 철연화를 바라봤다. 이내 철연화를 주시하던 혈무악이 미간을 찌푸리며 흑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데 너는 어떻게 그걸 알았냐?”
“예?”
“삼웅사화인지 뭔지 너는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나도 모르는데.”
혈무악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흑서다. 혈무악이 아는 것은 흑서도 알았다. 하지만 흑서가 알고 있는 것을 혈무악이 알지는 못했다.
찔끔한 흑서가 수염을 비비 꼬며 혈무악의 시선을 피했다.
“이야기나 마저 듣죠.”
“끄응.”
앓는 소리를 낸 혈무악이 계속하라는 듯 턱짓했다.
“가문의 어르신들은 당가의 감시 때문에 세가 밖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몰래 나와 두목님께 온 것이지요.”
“으음.”
고개를 끄덕인 혈무악이 신음을 흘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알고 있겠지?”
“예. 두목님의 아버님이신 혈 어르신이 세가에 들러 말해 주셨습니다.”
“뭣!”
대수롭지 않게 듣던 혈무악이 벌떡 몸을 세웠다.
혈무악뿐만이 아니었다. 철연화의 말을 들은 모두가 술렁였다.
“혈 어르신이라면……?”
“두목님의 아버님이시자 려화 이모님의 반려자이신 혈무백(孑武伯) 어르신이지요.”
철연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탄식이 터졌다.
“언제, 언제 찾아왔었지?”
“이 년 전이었습니다.”
“망할 양반!”
꽝!
거칠게 태사의를 내리친 혈무악이 눈을 번뜩였다.
“그 양반, 어떤 계집하고 같이 있었지?”
“계집이라뇨. 혈 어르신은 혼자…….”
“잘 생각해 보란 말이다!”
꽝!
연이어 태사의를 내리친 혈무악이 철연화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부르르.
그 기세가 광폭해 철연화는 물론 나머지 조장들 또한 몸을 사렸다. 기세를 갈무리한 흑서가 앞으로 나섰다.
“두목, 밖에 있는 애들 다 놀라겠습니다.”
“어험, 험.”
자신의 행동이 지나침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한 혈무악이 철연화의 시선을 피했다.
“뿌드득. 그 양반이 거기 갔었단 말이지…….”
이를 간 혈무악이 고개를 돌려 창백한 얼굴의 철연화를 바라봤다.
“내가 실수를 했군. 사과하지.”
“아니에요.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혈 어르신은 혼자서 세가를 방문하셨어요.”
혈무악이 다시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혈무악이 턱을 괴더니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모두의 시선이 혈무악을 향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는 혈갈뿐이었다.
“그리고…….”
“음?”
생각에 빠져 있던 혈무악이 철연화의 말에 눈을 떴다.
철연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두목님이 반드시 저를 따라가야 할 이유가 있어요.”
“뭐?”
철연화의 말에 혈무악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저 계집을 반드시 따라가야 할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게 뭐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말씀드리기가 조금 곤란한 이야기예요.”
말을 마친 철연화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둘만 있게 해 달라는 뜻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허튼짓 하면 죽여 버리겠다.”
슬쩍 기세를 세운 혈무악이 조장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나가서 대기해라.”
분위기가 분위기임을 느낀 것인지 모두가 군소리 없이 동굴 밖으로 나갔다. 조장들의 뒷모습을 좇던 혈무악의 눈이 멀뚱한 얼굴의 흑서를 향했다. 혈무악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너는 왜 안 나가?”
“에이, 쟤들이랑 저랑 같아요?”
“왜, 쟤들 배는 칼 들어가고 네 배는 칼도 안 들어간대?”
스윽.
태사의에 기대 둔 도를 반쯤 들어 올린 혈무악이 눈을 부라리자 천연덕스러운 얼굴의 흑서가 찔끔하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모르는 말 나오면 어떻게 하려구요. 제가 있어야지 설명을…….”
“네 입만 뚫린 입이냐? 얘 입은 입도 아니야?”
“그, 그래도…….”
“배에도 입 구멍 하나 뚫어 줄까?”
혈무악의 몸에서 짜증 섞인 살기가 물씬 풍겼다.
“꺼져. 빨리 안 꺼져?”
“에이, 더러워서 간다, 더러워서 가. 나중에 부르기만 해 봐라.”
“안 부를 테니까 빨리 꺼져!”
버럭 소리를 지른 혈무악이 씩씩거리는 숨을 골랐다.
이내 흑서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혈무악이 찌푸린 미간을 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 봐라, 내가 너를 반드시 따라가야 하는 이유.”
철연화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매화표국이라고 아시나요?”
“안다.”
흑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봉’이라 불리는 곳으로, 값비싼 표물들만 운반하는 표국이자 그 규모가 대막을 지나는 표국들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큰 곳이며 운반하는 표물들 또한 하나같이 값비싼 것들이었다. 흑서가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요 이 년간 거의 모든 표물들을 광풍사에게 약탈당하는 곳이기도 했다.
“빼앗겨도, 빼앗겨도 또 오는 병신들이지.”
조롱 섞인 혈무악의 말에 철연화의 얼굴이 굳었다.
“매화표국은 섬서성(陝西省) 화산파(華山派)의 속가제자(俗家弟子)인 낙화장(落花掌) 유영혁 대협이 운영하는 곳으로 화산파에 기부하는 자금이 다른 곳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여서 화산파에서도 제자들을 보내 주는 곳입니다.”
“화산파?”
혈무악의 반응을 보니 화산파에 관해서도 모르는 듯했다.
“예.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좀 전에 말한 당가와 같은 힘을 가진 단체가 세 곳이 모여야 동수를 이룰 수 있는 곳이에요.”
“음.”
혈무악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약탈당하는 매화표국의 사정을 보다 못한 화산파에서 매화검수(梅花劍手)에 속한 절정의 검수(劍手)이자 오호(五虎) 중의 일 인 철담검호(鐵膽劍虎) 유운 대협을 표행에 동참시켰어요.”
철연화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혈무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철담검호라면…….”
“두목님의 도에 목숨을 잃은 무인이지요.”
혈무악의 얼굴이 굳었다.
“이에 분노한 화산파는 매화검수들을 산에서 내려 보냈습니다. 대막의 마적단 토벌이라는 명목 하에요.”
“매화검수가 뭐 하는 것들인데 감히…….”
“화산파에서 인정하는 검수들로 개개인 모두가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경지를 이룬 이들이지요.”
검기상인의 경지라면 무기 위에 기를 유형화할 수 있는 절정 초입의 단계였다.
혈무악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매화검수 칠십여 명과 매화표국에서 엄선한 무인 이백여 명이 대막의 마적단을 토벌하기 위해 뭉친 것이죠.”
“그게 내가 너를 따라가야 하는 이유와 무슨 상관이지?”
혈무악의 물음에 철연화가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가 바로 이곳, 광풍사입니다.”
“…….”
“두목님은 모르겠지만 광풍사는 중원에서는 제법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중원 밖의 강맹한 네 개의 세력들을 세외사세(世外四勢)라고 불러요. 광풍사는 그중 한곳이지요. 물론 가장 하위이긴 하지만요. 그들은 가장 먼저 광풍사를 토벌함으로써 나머지 마적들의 사기를 꺾으려는 것이지요.”
광풍사가 가장 밑바닥이라는 것이 신경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매화검수인지 뭔지 하는 잡놈들하고 매화표국의 그 병신들하고 힘을 모아서 우리를 작업하러 오고 있다?”
“예.”
고개를 끄덕인 철연화가 말을 이었다.
“제가 천룡표국의 틈에 끼어 대막으로 나설 때 그들을 보았으니 아마 사흘 후면 이곳에 도착할 거예요.”
“…….”
혈무악이 말이 없자 탄력을 받은 철연화가 말을 이었다.
“광풍사가 그들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전무해요. 두목님이 죽기 싫으시면 저를 따라가야 해요.”
“…….”
혈무악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의 두 눈이 철연화를 향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철연화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두, 두목님?”
“……큭.”
혈무악의 입술을 비집고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크큭, 크하하하하!”
“두, 두목님?”
“하하하하하!”
푸스스스.
혈무악의 웃음에 동굴이 우르릉 비명을 지르며 돌가루를 흘렸다.
“하하하하하하!”
스윽.
앙천광소와 함께 태사의에서 몸을 세운 혈무악이 당황하는 철연화를 향해 다가갔다.
“두, 두목…… 윽.”
콱.
손을 뻗어 철연화의 목을 움켜쥔 혈무악이 눈을 빛냈다.
“죽기 싫으면 너를 따라가라고? 크크크. 계집, 나를 웃겨 죽이려는 시도였다면 아주 좋았다.”
짙은 광소를 꼬리로 남긴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좋아. 대답을 해 주마!”
철연화의 목을 움켜쥔 손을 놓은 혈무악이 태사의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철연화의 얼굴에 반색이 돌았다.
“콜록, 콜록. 그, 그럼……!”
“단!”
단박에 철연화의 말을 자른 혈무악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흠칫.
그 두 눈에 담긴 살기가 너무나 사악하고 흉포해 철연화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크크크.”
혈무악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나흘 후에 말이야! 크하하하하!”
혈무악의 두 눈에 섬뜩한 살기가 일렁였다.
第二章 대막의 부처
대막에 존재하는 마적이란 마적들이 한곳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로 광풍사의 거처인 광풍처였다.
규모만으로는 대막 제일인 폭풍대(暴風隊)를 비롯해 전대 광풍사의 두목이었던 광풍마도 혈무백과 동등한 실력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절정고수 혈살마옹(血殺魔翁)이 이끄는 혈살단(血殺團), 전원이 뛰어난 궁사(弓士)로 구성되어 있는 통천대(通天隊), 혈랑(血狼)들과 함께 대막을 질주하며 그 흉폭함을 자랑하는 혈랑대(血狼隊)까지.
그 밖에도 대략 삼천에 가까운 마적들이 광풍처를 향해 모여들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