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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6화)
“대막의 모든 마적들은 이틀 안에 광풍처로 모여라!”
이 간단한 한마디 때문이었다.
혈무악의 이 말 한마디에 대막의 마적단들이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혈무악, 아니 광풍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그만큼 거대했다. 대막에 존재하는 중소 부족들마저도 광풍사에게 일정 공물을 바친다. 쉽게 말해 뇌물인 셈이다.
대막에서 광풍사가 차지하는 무게는 그 이상인 것이다.
“…….”
속속들이 광풍처로 모여드는 마적들을 바라보는 철연화의 두 눈이 세차게 떨렸다. 그 옆에는 만족스러운 얼굴의 혈무악이 도를 쓰다듬으며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으음.”
철연화가 느껴지는 심정을 거짓 없이 중얼거렸다.
“대단하군요.”
이틀, 말 그대로 겨우 이틀이었다.
그 이틀 동안 광풍처로 모여드는 마적단의 수는 이틀이라는 말을 무색게 할 정도였다. 멍하니 마적의 행렬을 바라보던 철연화가 아미를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이 많은 인원으로 그들을 압박할 셈인가요?”
“그들?”
“매화검수와 매화표국의 무인들이요.”
철연화의 말에 혈무악이 짐짓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철연화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림잡아 삼천의 인원이다. 그에 반해 매화검수와 매화표국의 무인들은 많아 봐야 삼백 명 남짓이다. 근 열 배 이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비겁하군요…….”
무심코 속마음을 중얼거린 철연화가 흠칫 놀라며 혈무악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혈무악 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비겁? 큭. 계집,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잠시 주저한 철연화가 말을 이었다.
“그야 당연히 마적…….”
철연화의 말을 자른 혈무악의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우리는 마적이다. 비겁함과 난폭함의 대명사인 마적이란 말이다. 하하하! 마적이 마적다워야 마적이지. 그쪽에 삼백 놈이 온다고 우리도 삼백 놈으로 맞서란 말이냐? 그거야말로 미친 짓이지. 우리는 놈들을 철저히 짓밟을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른 혈무악이 씨익 웃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비겁하고 난폭한 마적이니까 말이야. 하하하.”
“두, 두목님!”
호탕한 웃음소리를 꼬리로 남기며 등을 돌린 혈무악의 뒤를 따라 철연화가 움직였다.
철연화를 꼬리에 단 혈무악이 도착한 곳은 바로 자신의 거처였다. 지금은 각 마적단들의 두목들이 쉬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는 장소였다.
스윽.
혈무악이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쉬고 있던 무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막주(漠主)를 뵙니다.”
막주, 말 그대로 사막의 주인이란 광오한 호칭이었다. 혈무악을 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가장 상석, 태사의에 앉은 혈무악이 손을 저었다.
“모두 앉아라.”
동굴 안에 있는 무인들은 본래 광풍사의 네 조장들을 제외하고 총 일곱 명이 더 있었는데 그중 가장 상석에 앉은 이가 혈살단을 이끄는 혈살마옹이었다.
과거 광풍마도 혈무백과 동등한 실력을 가졌다는 소문이 돌았던 그는 한 자루 겸(鎌)을 사용하는데 혈무악을 손자처럼 여기는 자이기도 했다.
“헐헐. 오랜만이구나.”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을 한 핏빛 장포의 노인, 혈살마옹이 살갑게 웃었다.
혈무악 또한 마주 웃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헐헐.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느냐? 혈갈, 저놈이 암습을 하지는 않고?”
한쪽 자리에 앉아 있던 혈갈이 얼굴을 붉혔다.
“어, 어르신.”
“이놈, 어르신이라니. 내가 네놈이 몽정한 속곳을 빨아 준 것이 엊그제 같거늘 어르신이 무엇이냐. 사부님이라고 부르지 못할까!”
“애들 듣는 데서 창피하게……!”
혈갈의 말에 혈살마옹이 기도 안 찬다는 듯이 콧방귀를 내뿜었다.
“예끼 놈, 내 눈에는 네놈이 애다, 이놈아!”
“에잇.”
혈갈이 얼굴을 붉히며 애꿎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 모습이 평소의 혈갈 같지 않고 우스워 혈무악이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혈살마옹의 말대로 혈갈은 혈살마옹의 밑에서 무공을 배운 경우로, 비록 그의 주 병기인 겸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혈살마옹이 혈갈의 무공의 기초를 잡아 주고 그 길을 만들어 주었으니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하하하. 그만 하시지요, 어르신. 저래 봬도 광풍사의 조장입니다.”
한참을 웃던 혈무악이 혈살마옹을 말렸다.
“에잉, 네놈이 오늘 무악이 때문에 산 줄 알거라. 쯔쯧.”
혈갈을 타박하던 혈살마옹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혈갈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혈무악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군.”
혈무악의 시선이 네 조장을 제외한 다른 자들을 향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이가 혈살마옹이고 그 다음 자리에 앉아 있는,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측한 검흔(劍痕)을 가진 싸늘한 인상의 중년인이 규모만으로는 대막 제일인 폭풍대의 대주 혈풍검(血風劍) 우공산이었다.
그 옆에 자리 잡은 작달막한 쌍둥이 사내들이 통천대를 이끄는 오현, 오칠 형제로 통칭 쌍혈마궁(雙血魔弓)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반대편에는 거대한 늑대 한 마리를 쓰다듬는 털북숭이 중년인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자가 바로 혈랑대를 이끄는 광혈랑(狂血狼) 석중이었다.
그 옆에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외팔이 중년인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철갑혈마대(鐵鉀血馬隊)를 이끄는 일섬창(一閃槍) 위지공으로, 외팔이라는 장애를 극복한 창의 고수였다.
그들 모두가 대막에서 쟁쟁한 위명을 떨치는 마적패의 두목들이었다.
“일단 내 부름에 모여 줘서 모두 고맙다.”
“막주의 명은 절대적입니다.”
혈무악의 말을 위지공이 받아쳤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위지공의 말에 동의했다.
강자존인 대막에서 강자의 말이란 곧 법이었다.
“그런데 무악아…….”
굳은 분위기 속에서 혈살마옹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한 인영을 가리켰다.
“저기 저 처자는 뉘인고?”
바로 동굴의 입구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철연화였다.
혹여 흑서가 헛소리를 지껄일까, 혈무악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대해 커다란 정보를 제공한 계집입니다.”
“호오?”
모두의 시선이 철연화를 향했다. 철연화가 당황하자 혈무악이 백랑을 향해 말했다.
“계집을 네 처소에 두고 와라.”
“예.”
스윽.
고개를 끄덕인 백랑이 철연화와 함께 사라졌다.
“감옥이 아니라 처소에 데려다 놓으라고?”
혈살마옹이 실눈을 뜨며 혈무악을 흘겼다.
마치 깨트린 화병을 숨긴 손자를 추궁하는 할아버지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흠칫한 혈무악이 재빨리 안색을 수습했다.
“본래 여자가 귀하지 않습니까? 감옥에 넣으면 다른 놈들이 수작을 부릴까 염려되어 그런 것입니다.”
“흐음. 그래?”
혈살마옹의 시선을 피한 혈무악이 미간을 찌푸렸다.
“예.”
‘늙은이가 눈치는 빨라서는!’
내심 투덜거린 혈무악이 험험 헛기침을 하고는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모두 정보통이 있으니 소집한 이유를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혈무악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귀머거리가 아니고 장님이 아니다. 각자 성(城)이나 마을에 정보통 정도는 심어 둔다. 그들 또한 심상치 않은 무리가 대막에 들어왔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매화검수라는 버러지들이, 매화표국 놈들이 우리의 씨를 말리기 위해 대막에 왔다. 그리고 처음 목표가 바로 이 곳, 광풍처다.”
“어허.”
“놈들이 감히!”
모두의 눈에서 퍼런 안광이 쏟아졌다.
이글거리는 살기가 동굴을 메웠다.
대막의 마적들에게 광풍처란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런 곳에 외인이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 자체가 죽어 마땅한 대죄였다.
“모두 진정부터 하고 내 말 마저 들어라.”
모두를 진정시킨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놈들의 대가리는 삼백! 그중 반 이상이 모두 기운을 유형화할 수 있는 놈들이다.”
“으음.”
모두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기운을 유형화할 수 있는 경지라면 검기상인의 경지라는 소리였다. 녹록지 않은 상대들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상대가 반 이상이라면 최소 백오십 명이라는 소리였다.
“우리가 이길 확률은 십 분지 삼을 넘지 못한다.”
“……!”
모두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광풍사의 조장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놀라 막 입을 열려는 순간, 혈무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 대가리가 그쪽 대가리에 맞춰 삼백 개라는 가정 하에 말이야. 흐흐흐.”
“흘흘흘.”
“크크크.”
“껄껄껄.”
혈무악의 음침한 웃음 뒤로 두목들의 음침한 웃음이 이어졌다. 혈무악의 말속에 담긴 뜻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놈들은 마적들을 토벌하러 오는 거다. 비겁하고 난폭한 마적들을 말이야.”
숨을 고른 혈무악이 살기가 번뜩이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마적답게 놈들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냐? 비겁하고 난폭한 마적답게 말이야, 흐흐흐.”
혈무악의 웃음에 살기가 실렸다.
* * *
대막의 더위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리고 도사 또한 사람이다.
“저놈의 태양…….”
멋들어진 도복을 갖춰 입은 젊은 도사가 상소리를 흘렸다.
그의 주변에서 움직이는 몇 명의 도사들이 젊은 도사를 향해 눈을 흘겼지만 특별히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심정 또한 젊은 도사와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낙타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칠십 명의 매화검수들 모두의 심정 또한 같았다. 만약 그들의 검이 태양에 닿을 수만 있다면 태양은 난도질되어도 백 번은 되어 버렸을 것이다.
매화표국의 무인들 또한 매화검수들과 다르지 않았다.
매화표국에서는 표국의 삼대무력단체 중 두 곳인 철웅대(鐵熊隊)와 비응대(飛鷹隊)를 출전시켰다. 철담검호가 이끌던, 삼대무력단체 중 한 곳이었던 검호대(劍虎隊)가 광풍사에 의해 사라졌으니 매화표국 전력의 십 분지 팔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주인 유영혁이 직접 오지는 않았지만 대신 유영혁의 동생인 폭풍장(暴風掌) 유영철이 형을 대신해 이번 토벌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매화검수들의 우두머리와 함께였다.
근 삼백에 가까운 이 무리의 선두에 선 인영은 세 명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도복을 입은 중년의 도사, 마찬가지로 땀에 흠뻑 젖은 황색 무복을 입은 중년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흉한 몰골의 꼽추 사내였다.
중년의 도사는 매화검수들의 우두머리로 천리화향검(千里花香劍)이라는 멋들어진 별호를 가진 자로 도명(道名)은 청현, 한 번 검을 휘두르면 매화향이 천 리 밖까지 흐른다는 검의 고수다.
그의 곁에서 헐떡거리는 중년인은 낙화장 유영혁의 동생인 폭풍장 유영철이었고 꼽추 사내는 황금 한 돈에 혹해 이 무리의 안내를 맡은 자였다.
“헉헉, 아직 멀었는가?”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훔친 유영철이 숨을 몰아쉬며 꼽추 사내를 재촉했다.
“조금 더 가야 합니다요.”
유영철의 물음에 꼽추, 우용택이 굽실거리며 답했다.
도사라는 자존심 때문에 내색을 하지 않는 것뿐이지 청현의 상황 또한 유영철과 다르지 않았다. 힐끔 둘을 쳐다본 우용택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내 저 새끼들 저럴 줄 알았지. 쯔쯧.’
자신은 대막으로 떠나기 직전, 무리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대막의 태양은 무서우니 거추장스러운 도복과 무복은 벗어던지고 제대로 옷을 갖춰 입으라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탈수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돈줄이 뒈져 버리면 자신만 손해가 아닌가.
하지만 자신의 그런 호의는 아랑곳하지 않고는 도사의 자존심이니, 무인의 긍지니 뭐니 지껄이며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결과가 바로 저 꼴이다. 그래도 무공을 익힌 이들이라 그런지 탈수로 쓰러지지는 않는 게 다행이었다. 저 둘에게나 자신에게나.
“대체 얼마나 남은 건가. 벌써 사흘째네. 사흘이면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나.”
꼴에 도사라고 청현이 짐짓 위엄 서린 목소리로 물었지만 우용택의 입장에서는 청현이나 유영철이나 그 꼴이 그 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