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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25화)


“내가 처리한다니까! 너희는 나서지 말고……!”
“지금이 자존심 챙길 때냐, 미련한 놈아!”
버럭 성을 낸 혈갈이 마주 달려오는 사냥꾼들을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꺼져라, 새끼들아!”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혈갈의 양손이 빛을 내뿜었다.
우르릉.
혈갈의 양손에서 터진 빛무리가 파도가 되어 사냥꾼들을 덮쳤다.
쿠―왕.
“으아악!”
“크악!”
선두에 있던 몇몇 무인이 붉은 빛무리에 얻어맞아 자지러지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푸하하하! 혈랑파혼(血浪破魂)이라는 수법이다.”
한바탕 대소를 터트린 혈갈이 잔뜩 신난 얼굴을 한 채 마구잡이로 양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실같이 검붉은 선들이 따라 움직이며 걸리는 족족 모든 것을 파괴했다.
“살살해라, 살살.”
혀를 찬 흑서가 철연화를 향해 말했다.
“소저와 소협은 뒤에 계시지요. 저희 두목이니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누가 도와 달랬냐!”
“아 씨. 거 조용히 좀 있어요, 좀.”
“뭐? 야, 너 이리 와. 이리 오라고!”
“말 안 해도 가니까 좀 조용히 좀 있으라니까요.”
흑서가 거칠게 수염을 꼬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저 성질은 갇혀도 죽지를 않아요.”
칭―
기형장검을 뽑아 든 흑서가 철연화와 무명을 보며 말했다.
“혹시 이쪽으로 도망치는 것들이 있다면 죽이지 말고 제압해 주시기 바랍니다.”
둘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흑서가 한쪽의 적돈과 백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는 가서 혈갈을 도와라.”
“쩝쩝. 에이, 귀찮은데.”
육포를 질겅이며 투덜거린 적돈이 단창을 고쳐 잡고 사냥꾼들을 향해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린 흑서가 멀뚱히 서 있는 백랑을 향해 물었다.
“너는 안 가고 뭐 하냐?”
“네 명령은 듣지 않는다.”
“……뭐?”
너무나도 백랑다운 그 대답에 잠시 멍하니 풀려 있던 흑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런 거 따질 때냐!”
“……칫.”
짜증 섞인 혈갈의 고함에 백랑이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흘겨봤다.
“네 명령 때문이 아니라 두목 때문에 가는 거다.”
“알았으니까 빨리 가기나 해!”
“소리 지르지 마라.”
“어휴. 말을 말아야지, 말을.”
“그럼 말하지 마라.”
끝까지 흑서의 속을 뒤집어 놓은 백랑이 은광이 번뜩이는 도를 뽑아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느긋한 걸음 어디에서도 두목이 함정에 빠진 부하의 모습 같은 것은 볼 수 없었다.
가볍게 발을 놀려 번천망에 휘감긴 혈무악에게 다가간 흑서가 수염을 꼬며 물었다.
“괜찮아요?”
“그럼 안 괜찮겠냐?!”
카그그극―
혈무악이 몸부림치자 그의 몸을 휘감은 번천망이 펄럭였다. 다행히 살상용이 아닌 포획용 암기라 상처는 남기지 않고 그저 온 힘을 다해 혈무악의 몸을 옥죄는 것이 전부였다.
“에라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번천망에 기어코 혈무악의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빌어먹을 것은 왜 꿈쩍도 안 해?!”
“괜히 번천(樊天)이겠습니다. 당가의 장인들이 만들었으니 아마 두목이라 해도……!”
슈칵―
약 올리듯 수염을 꼬며 빈정거리던 흑서가 고개를 숙이자 묵직한 귀두도가 미처 따라가지 못한 흑서의 머리칼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어이쿠.”
깡총 몸을 날린 흑서가 과장된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귀두도를 피했다.
“죽어라, 이 개자식아!”
귀두도를 꼬나 쥔 대머리 거한이 노성을 터트리며 흑서를 향해 달려들었다.
“차―핫. 귀혼필살(鬼魂必殺)!”
쿠―와앙!
대머리 거한의 귀두도가 허공을 일그러트리며 흑서의 목을 노렸다.
후웅.
간발의 차로 귀두도를 피한 흑서가 가볍게 발을 퉁겨 대머리 거한과의 거리를 벌렸다.
“일단 나보다 번천망에 묶인 두목을 먼저 처리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그게 부하가 할 소리냐!”
“저도 살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
흑서와 혈무악의 말싸움에 대머리 거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익. 두 놈 다 닥쳐라.”
성난 기세와 함께 들이닥친 귀두도가 흑서의 몸을 난도질할 듯 살기를 뿜었다.
“우와아아악. 귀혼천하(鬼魂天下)!”
콰릉. 콰릉.
칙칙한 검정색 도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듯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대머리 거한의 발악이 멈추지 않자 간발의 차이로 도기를 피하던 흑서가 수염을 꼬며 말했다.
“어이쿠, 쉬엄쉬엄 해라. 나보다 네가 먼저 죽겠다.”
“으아아악!”
여유로운 그 모습에 대머리 거한이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여유롭게 움직이는 흑서가 돌연 빈틈을 보이자 대머리 거한이 눈을 번뜩였다.
“놈!”
꽝!
“꽥.”
일갈과 함께 내지른 찌르기에 명치를 얻어맞은 흑서가 발랑 뒤집어져 한참을 나가떨어졌다. 흑서가 한참을 날아 수풀 속에 떨어지자 대머리 거한이 대소를 터트렸다.
“우하하하! 제 놈이 아무리 소면살이라고 해 봤자 이 귀혼도 님을 이길 성싶더냐.”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대머리 거한이 귀두도를 고쳐 잡고 외쳤다.
“이제 두목인 대막광마의 목을 따면……!”
“대막 뭐?”
대머리 거한의 심장을 가르는 서늘한 목소리.
턱.
“다시 한 번 말해 봐, 새끼야.”
딱딱한 손인지 서늘한 목소리인지 모를 것이 대머리 거한의 목을 움켜잡았다.
“커윽.”
금방이라도 뜯길 듯한 목의 통증에 대머리 거한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디 다시 한 번 말해 보라니까!”
“커윽, 컥.”
대머리 거한의 목을 움켜쥔 혈무악이 두 눈으로 형형한 안광을 내뿜었다. 당장이라도 대머리 거한의 목을 부러트릴 듯 목줄기를 움켜잡고 있던 혈무악이 대머리 거한의 신형을 내던졌다.
마치 본래의 무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 한참이나 날아간 대머리 거한의 거구가 바닥에 처박혔다.
우당탕.
“크악!”
바닥을 구르는 대머리 거한을 향해 줬던 시선을 돌린 혈무악이 흑서가 사라진 수풀을 향해 다짜고짜 욕을 내뱉었다.
“너 이 자식, 셋 셀 동안 안 나오면 네 처소에 있는 뱀술은 내가 가진다. 하나, 둘, 세…….”
“아니, 그건 또 언제 보셨어요.”
부스럭.
작은 투덜거림과 동시에 수풀이 들썩이며 한 인영을 뱉어 냈다. 놀랍게도 인영은 바로 대머리 거한의 일도(一刀)에 명치를 맞고 나가떨어진 흑서였다.
“어, 어떻게……!”
흙투성이 얼굴의 대머리 거한이 두 눈을 부릅뜨며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흑서를 바라봤다.
“네, 네놈은 분명 내 도에……!”
“쟤가 독이라도 먹었냐? 미쳤다고 네 도에 당하게.”
대머리 거한에게 이죽거린 혈무악이 몸에 달라붙은 번천망의 찌꺼기를 떼어 내며 말했다.
“이 번천망인지 뭔지 더럽게 질기네.”
투투툭.
혈무악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번천망의 찌꺼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어, 어떻게 번천망을……!”
“겨우 그따위 그물로 이 몸을 묶을 생각을 하다니, 이 몸이 어떤 몸인데……!”
“귀하디귀한 몸이시죠.”
어느새 다가온 흑서가 수염을 꼬며 빈정거렸다.
“대체 제가 멀쩡한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네가 어떤 놈인데 저런 멍청한 놈한테 당하겠냐.”
“그거 칭찬이죠?”
“그렇다고 쳐.”
혈무악과 흑서의 대화를 듣는 대머리 거한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저게 싸움하는 놈들의 대화야?’
광마(狂魔), 미친 마귀라는 별호를 가진 혈무악이야 원래 미친놈이라 쳐도 그 옆에 저 염소수염 중년인은 뭐란 말인가.
“이럴 수는 없다…….”
얼빠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대머리 거한의 입술을 비집고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이럴 수는 없어…….”
대막광마 혈무악의 악명이라면 지겹도록 들었다.
악마 같은 네 조장들의 흉명 또한 지겹도록 들었다.
그래도 자신과 수하들이 온 힘을 다한다면 당가의 번천망 정도야 못 잡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크아악!”
“사, 살려 주세요, 당주님!”
“으아악! 도, 도망쳐!”
무서울 것 없이 사천을 질타하던 수하들은 뚱뚱하고, 마르고, 더러워 보이는 세 악마들에 의해 피를 뿌리며 나자빠졌지만 감흥 따위는 일지 않았다.
“흐, 흐흐.”
대머리 거한의 입에서 바람 빠진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흐흐흐.”
대머리 거한의 두 눈동자로 붉은 핏줄이 불룩였다.
“으하하하하!”
쩌렁쩌렁한 광소와 함께 대머리 거한의 귀두도에서 그조차도 감당 못할 무시무시한 기운이 폭사되어 흑서와 혈무악을 향해 쏘아졌다.
“어이쿠, 피하세요.”
“큭.”
꽈―앙!
검은색 기류가 강타한 땅이 움푹 파였다.
“크아아아!”
침을 질질 흘리며 발악하는 대머리 거한을 바라보는 혈무악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거 설마 미쳤나?”
“끄응. 아무래도 독 때문인 것 같네요.”
“독?”
굳은 얼굴의 흑서가 수염을 꼬며 말했다.
“흥분제 종류의 독 같네요.”
“정력제?”
“정력제가 아니라 흥분제요.”
“그게 그거지, 자식아.”
“끙. 그렇다고 칩시다.”
애써 혈무악의 시선을 피하는 흑서가 다소 굳은 얼굴로 질질 침을 흘리는 대머리 거한을 주시했다.
‘저 증상이라면 분명…… 광견분(狂犬粉)이로구먼.’
당가의 광견분이라면 겨우 흥분제로 표현될 만한 독이 아니었다. 신체 능력을 다섯 배가량 상승시켜 주는 독으로, 그 지속 시간이 길어지면 급기야 피를 토해 내는 양날의 검인 셈이다.
“죽여 주마아아!”
콰릉.
우지끈.
검은색 도기가 주변의 거목을 쓰러트렸다.
“쯧. 저거 저대로 두면 안 되겠네요.”
짧게 혀를 찬 흑서가 검갑에 검을 집어넣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다’ 하는 순간 흑서의 신형은 대머리 거한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크와악! 소면살 이노옴!”
다가오는 흑서를 발견한 대머리 거한이 불같은 기세를 내뿜으며 그를 향해 마주 달렸다.
쿵쿵쿵.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움푹 주저앉았다.
“소면살, 이 개자……!”
콱―!
대머리 거한의 말이 미처 끝을 맺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흑서의 손이 대머리 거한의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크륵.”
가래 끓는 소리를 터트리는 거한의 목줄기를 잡은 흑서의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불거졌다.
우득, 우드득.
뼈가 엇갈리는 소리와 함께 대머리 거한의 얼굴이 점차 새하얗게 질려 갔다.
스윽.
“소면살은 내가 그리 좋아하는 별호가 아니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대머리 거한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댄 흑서가 말을 이었다.
“이십 년 전에 너희가 부르던 별호가 있으니 앞으로는 날 그렇게 불러라.”
뿌득.
대머리 거한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광혈검마라고 말이야.”
뿌드득.
대머리 거한의 목이 흑서의 손힘을 버티지 못하고 동강나 부러졌다.
“꾸르륵.”
대머리 거한의 입에서 질펀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어이쿠.”
혹여 손에 피라도 묻을까, 흑서가 재빨리 손을 놓고 뒤로 빠졌다. 흑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는 마주칠 일 없겠지만 말이…….”
퍼―억!
콰당!
폼 나는 모습으로 말을 하던 흑서가 허리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에 비틀거리며 자빠졌다.
“으으.”
“어디서 똥폼을 잡아, 똥폼을 잡긴.”
흑서의 옆구리를 후려친 혈무악이 가소롭다는 얼굴로 말했다.
거의 쓰러지듯 바닥에 앉은 흑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에이, 시팔. 진짜 왜 나한테만……!”
“나한테만 뭐?”
“잘해 주시냐고요. 헤헤.”
오늘도 힘의 차이에 굴복한 흑서가 비굴하게 웃으며 수염을 꼬았다. 그런 흑서를 향해 못마땅한 듯 눈을 부라린 혈무악이 말했다.
“끝냈으면 가서 애들 좀 도와줘라.”
“두목이 도와주면 되잖아요.”
“나는 두목이잖냐.”
“허.”
혈무악다운 그 대답에 넋 빠진 신음을 흘린 흑서가 힐긋 설치는 세 조장들을 보며 말했다.
“현상금 사냥꾼들이라도 도와줄까요?”
흑서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는 세 조장들에 의해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천마제천』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