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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24화)
인영의 칭찬에 당충이 말끝을 흐렸다.
“저는 당 가주님이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을 알아 두세요.”
“예, 예.”
당충이 지나치게 긴장해 고개를 조아리자 인영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하.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당 가주님은 저희 천(天)의 사람입니다. 천주인 제가 제 사람을 해할 리가 있겠습니까?”
“…….”
인영의 말에 당충이 감히 답하지 못했다.
눈앞의 이자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하하.”
당충이 침묵하자 인영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공천량의 팔을 잡은 중년인들 중 검은 중년인 흑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천주님, 슬슬 천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흑귀의 말에 웃음을 멈춘 인영이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북천주(北天主)와 남천주(南天主), 동천주(東天主)가 올 때가 되었군요.”
“북천주와 동천주는 이미 와 있고, 남천주도 지척에 왔다고 합니다.”
“호오.”
고개를 끄덕인 인영이 말했다.
“서천주(西天主)는 임무 중이니 이번에도 보지 못하겠군요.”
“서천주가 중원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임무 중이라 이번 회의 때는 오지 못할 것입니다.”
흑귀가 인영의 눈치를 살폈다.
“서천주를 천으로 부를까요?”
“아니에요. 자신의 임무를 하고 있는 서천주를 제 개인적인 일로 부를 수는 없지요.”
“알겠습니다.”
“으음…….”
무엇을 향하는지 모를 칠흑의 눈빛으로 허공을 주시한 인영이 허리춤에 달린 기병을 쓰다듬으며 옷매무새를 잡았다.
“섬서에 있는 매화표국의 정원이 그렇게나 아름답다고 하네요.”
작게 중얼거린 인영이 그림 도구들을 챙기며 환히 웃었다.
“천으로 가는 길에 매화표국에 들러 그림이나 그리고 가죠.”
그의 흑색 눈 위로 샛노란 실선이 꿈틀거렸다.
* * *
“제기랄, 나보다 저놈이 더 중요하단 거야 뭐야. 대체 저놈이…….”
작은 불평.
“일부러 일행에 동참시킨 게 분명해. 그래, 저 빌어먹을 놈의 심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작은 불평이 점차 길어졌다.
“그러고 보니 저놈이 나한테 두목 대리를 맡긴 것도 이상했어. 다 수작이었던 거야. 저놈이…….”
“입 다물어라, 혈갈.”
“너나 입 닥쳐라, 백랑.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안 풀리니까.”
“…….”
지은 죄가 있음인지 보통에는 발끈했을 백랑조차 혈갈의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시끄럽다고 사람을 기절시킬 수가 있는 거야? 시킨 놈이나 시킨다고 한 놈이 둘 다…….”
“어이, 아저씨. 좀 조용히 좀 갑시다.”
참다 못한 혈무악이 미간을 찌푸리며 핀잔을 줬다.
“뭐라고? 이 빌어먹을 놈이……!”
“그러게 누가 한 방에 뻗으래?”
“누가 한 방에 뻗었다는 거냐!”
“누구긴 누구야.”
광풍 위에 걸터앉은 혈무악이 도갑으로 혈갈을 가리켰다.
“끄응.”
혈갈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너를 따라 나온 내가 병신이다, 병신이야.”
스스로에게 욕을 한 혈갈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겨우 일각 전이었다.
몸을 찌르는 상처의 고통은 둘째 치고, 뭔가 들썩이는 느낌에 눈을 떠 보니 말등에 묶인 채로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납치라도 당한 줄 알고 놀랐지만 유유자적 농까지 주고받으며 움직이는 일행의 모습에 자신에게 상처 입힌 놈에 대한 분노는 둘째였다.
일단 몸을 죄는 줄부터 푼 뒤 한바탕 일행에게 욕을 하고 그제야 보인 정체불명의 놈에게 검을 뽑아 드는 자신을 말린 사람이 바로 적돈이었다. 물론 상황 설명을 해 준 사람 또한 적돈이었다.
적돈에게 모든 상황을 들은 혈갈이 무명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맞장 뜨면 친구다’라는 혈무악의 괴론에 의해 일행이 된 것 아닌가?
“좀 드실라우?”
힘없는 혈갈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는지 적돈이 반쯤 먹다 남긴 육포를 내밀었다.
“너나 처먹어!”
“왜 화는 내고 지랄이야. 내가 땅에 떨어진 거 줬나?”
“차라리 떨어진 게 낫지. 자기가 처먹던 거 주는 놈이 어디 있냐!”
“아니, 이 아저씨가 지금……!”
“둘 다 그만 해라.”
둘의 싸움이 소란스러워지려고 하자 혈무악이 중재를 나섰다.
“여자가 보는데 창피하지도 않냐? 명색이 광풍사의 조장이라는 놈들이 말이야. 쯔쯧.”
“흠흠.”
“어험.”
철연화의 존재를 깨달은 혈갈과 적돈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낄낄.”
둘의 모습을 보며 흑서가 웃었다.
울컥한 혈갈이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혈무악의 눈치를 보고는 화를 삼켰다. 그 모습에 흑서가 다시 웃음을 터트리자 혈무악의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뭐가 좋다고 웃어?”
“예?”
“뭐가 좋다고 웃냐고!”
“왜 또 저한테 시비세요. 심심하세요?”
“그래, 심심하다.”
“잘됐네요.”
“뭐?”
의미 모를 흑서의 말에 혈무악이 고개를 갸웃하자 흑서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또 온 모양인데요?”
푸스슥.
흑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길 양옆으로 뭉쳐 있는 수풀이 흔들리며 한 무리의 인영을 내뱉었다.
“뭐야, 이것들은?”
들뜬 혈무악의 물음에 숲이 뱉어 낸 수십의 인영이 대답 대신 일행을 둥그렇게 둘러섰다.
스스슥.
하나같이 잔뜩 굳은 얼굴을 가진 인영들 대부분은 장정들이었다. 그중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대머리 거한이 커다란 도로 혈무악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대막광마 혈무악, 당장……!”
“대막천마다, 새끼들아!”
파―앙.
단말마의 외침과 함께 광풍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날린 혈무악이 힘껏 도를 휘둘렀다.
콰―우우우.
우악스러운 광풍과 함께 쏟아지는 날카로운 기운에 무리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탁.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혈무악이 대머리 거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대막 뭐?”
“으…….”
낮게 침음한 대머리 거한이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섰다.
‘빌어먹을.’
자신을 바라보는 수하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하얗게 질린 입술을 꿈틀거린 대머리 거한이 두툼한 귀두도(鬼頭刀)로 혈무악을 겨눴다.
“네놈이 혈무악 맞느냐?”
“오냐, 내가 바로 혈무악이다.”
거한의 물음에 혈무악이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한 태도로 답했다. 너무나 당당한 그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은 거한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세간에서 귀혼도(鬼魂刀)라 불리는 어르신이 바로 나다. 그리고 내 뒤의 녀석들이 섬서 제일의 현상금 사냥꾼들은 귀혼당(鬼魂黨)이다.”
대머리 거한, 귀혼도가 짐짓 호기롭게 외쳤으나 평생을 대막에서 살아온 혈무악이 귀혼도니 귀혼당이니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후비적 귀를 판 혈무악이 대뜸 물었다.
“네 이름 따위 알 필요 없고, 현상금 사냥꾼이냐?”
“뭐……!”
오만한 혈무악의 물음에 노호성을 터트리려던 거한이 곧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건 됐고, 현상금 사냥꾼들이냐고.”
자신의 말을 자른 혈무악을 향해 성을 내려던 대머리 거한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내뱉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현상금 사냥꾼들이다.”
“잘됐네. 마침 심심했는데.”
스릉.
혈무악이 씨익 웃으며 도를 뽑아 들었다.
“이 방자한 놈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태연자약한 혈무악의 모습에 꾹꾹 눌러 뒀던 대머리 거한의 화가 폭발했다.
“네놈과 사악한 네놈의 일행이 죽인 동료들만 해도 그 수가 오십이 넘는다. 네놈은 사람도 아니란 말이냐.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하하하하하!”
대머리 거한의 말을 듣던 혈무악이 돌연 대소를 터트리며 허리를 젖혔다.
“하하하하하!”
“이, 이놈. 뭐가 우습냐!”
허리까지 젖히고 대소를 터트리는 혈무악의 모습에 일행을 에워싼 현상금 사냥꾼들은 물론 일행마저도 혈무악을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
한참을 웃던 혈무악이 몸을 추스르며 말했다.
“하하하. 그럼 반대로 내가 말하지. 너 같으면 다른 놈들이 너 죽이겠다고 달려들면 어떻게 할 테냐?”
“당연히…….”
“죽여야겠지?”
혈무악의 말에 대머리 거한이 입을 다물었다.
혈무악이 씨익 웃었다.
“죽기 전에 죽인다. 당연하잖아?”
“이익.”
잇소리를 낸 대머리 거한이 도를 휘두르며 외쳤다.
“그 입 닥쳐라, 대막광마 혈무악!”
“대막천마라니―까!”
마지막 ‘까’ 하는 순간에는 이미 혈무악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친 뒤였다.
웅웅.
광풍도가 살기를 머금고 낮게 울었다.
“죽어……!”
“지금이다!”
혈무악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대머리 거한이 뒤로 몸을 날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쉬시시식.
쫘―아악.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수풀 속에서 검은 물체가 혈무악을 향해 날아들었다.
“두목!”
“두목님!”
내심 방심하고 있던 조장들과 철연화 또한 난데없이 튀어나온 검은 물체에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물체가 혈무악의 몸을 휘감았다.
버버벅.
쿠웅.
뭔가 잔뜩 조이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있던 혈무악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평소의 혈무악이었다면 꿈에서도 걸리지 않을 법한 유치한 함정이었지만 상대에 대한 방심으로 인해 걸린 것이었다.
“하하하하! 놈, 어떠냐.”
대머리 거한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그것이 바로 번천망(樊天網)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네놈이 강하다고 해도 천하의 번천망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하하!”
“번천망!”
흑서가 흠칫 안색을 떨었다.
번천망이란 당가에서 사용하는 포획 암기로 그 수가 셋을 넘기지 않는 귀한 것이었다. 전설 속에나 나오는 교룡(蛟龍)의 힘줄로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수축하는 성질이 있어 풀거나 끊기가 매우 어려웠다.
‘당가의 번천망이 어째서 사냥꾼들 손에?’
당가의 기물이 어째서 현상금 사냥꾼들의 손에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 급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두목인 혈무악이 잡혔으니 나머지 놈들도……!”
자신만만한 얼굴로 부하들을 독려하려던 대머리 거한이 딱딱하게 굳은 부하들의 얼굴을 보고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뭐야, 이놈들이 왜…….”
부하들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돌아간 대머리 거한의 얼굴이 졸지에는 부하들의 그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감히 이따위 그물로 날 잡았다고 생각하는 거냐!”
자그르르르―
혈무악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기세에 그의 몸을 휘감은 번천망이 찢어질 듯 들썩였다.
“두목!”
“두목님!”
혈무악이 무사하자 조장들과 철연화가 반색을 하며 외쳤다.
“이 중원의 버러지들이……!”
쿠―오오오오.
자그르르르르―
번천망의 들썩임이 점점 심해지며 찢어질 듯 들썩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위태로웠지만 번천망은 질겼다.
“이, 이 빌어먹을 것이?”
단숨에 찢겨질 거라고 생각했던 번천망이 의외로 끈질기게 버티자 혈무악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하하. 그럼, 번천망이 어떤 물건인데. 그렇게 쉽게 끊길 리가 없지.”
설마, 하는 얼굴로 조마조마 떨고 있던 대머리 거한이 슬쩍 떨리는 목소리로 혈무악을 자극했다.
꿈틀.
잔뜩 미간을 찌푸린 혈무악이 몸속에 있는 기운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크아아아아!”
거센 포효와 함께 해일과도 같은 거센 기파가 휘몰아쳤다.
카그그극―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혈무악의 몸을 휘감은 번천망이 들썩였다.
뿌직, 뿌지직.
전설 속 교룡의 힘줄로 만들어졌다던 번천망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찢어지기 시작했다.
“저, 저!”
대머리 거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저 괴수 새끼, 저러다 정말 찢는 거 아냐?’
치솟는 불안감을 애써 지운 대머리 거한이 그물 속에서 용을 쓰는 혈무악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에잇, 뭣들 하는 거냐! 어서 달려들어 놈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려라. 먼저 놈의 목을 따는 놈에게는 현상금의 절반을 주마.”
그 또한 혈무악의 악행을 알고 있음인지 먼저 나서지 않고 수하들을 앞서 보냈다.
“우와아아! 놈의 목을 잘라라!”
“와아아! 죽여라!”
“놈의 목은 내 것이다.”
현상금의 절반이라는 막대한 재물에 귀혼당의 사냥꾼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혈무악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 어?”
번천망에 묶여 포효를 터트리던 혈무악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냥꾼들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 새끼들이……!”
혈무악의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솟구쳤다.
네 조장들이 사냥꾼들을 향해 마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