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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23화)
“이 멍청한 놈들아, 뭐 하는 거냐. 저놈이 나를 공격한 놈이란 말이다. 적돈, 이 새끼! 처먹지만 말고 어서……!”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혈갈을 바라보던 혈무악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백랑.”
나직한 혈무악의 말을 신호 삼아 백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혈갈을 향해 다가갔다.
“응?”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움찔 몸을 떤 혈갈이 비틀거리는 몸을 애써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뭐, 뭐야. 왜 다가오고…….”
“네 잘못이다.”
“뭐?”
푸푹.
백랑의 손이 혈갈의 혈을 때렸다.
“너 이 새끼……!”
스르륵.
뿌드득 잇소리를 끝으로 혈갈의 신형이 풀썩 쓰러졌다.
“네 잘못이다.”
죄책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심한 얼굴과 중얼거림이었지만 기절한 혈갈이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하하. 남은 고기나 먹자고.”
혈갈이 쓰러지자 혈무악이 웃음을 터트리며 남은 고기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나머지 일행 또한 쓰러진 혈갈을 뒤로하고 다시 고기 먹기에 열중했다.
“하하하하!”
깊은 밤, 유쾌함이 담긴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숲에 흘렀다.
第六章 만날 사람들은 다 만나게 되어 있다
사천성 변두리 광원(廣元)의 깊은 산속에 위치한 철권문(鐵拳門)은 파산권(破山拳) 공천량이 문주로 있는 문파로, 깊은 전통과 고강한 무공을 자랑하는 곳이자 사천에서는 당가를 제외하고 그 적을 찾기가 어렵다는 단체다.
문주인 공천량의 무공이 철권문 역사에 전무후무할 정도로 고강한 것이 이유 중 하나였고,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이유는 공천량과 당가의 가주인 당충의 친분이었다.
당청은 삼정(三正) 중 한 명이자 독정(毒正)이라 불리는 독인(毒人)으로, 파산권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명성을 가진 자였다.
공천량과 당충의 친분은 이십 년 전 혈교지란 때 시작되었고, 둘의 우정은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철권문이 여타 문파들의 방해 없이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당충 덕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혈교와의 전투에서 우정을 키워 온 두 집단의 우두머리가 한 장소에 모였다.
한 명은 고개를 조아린 채, 또 한 명은 피투성이의 몸으로 땅에 쓰러진 채로.
“으아아악. 당충, 네놈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피투성이의 인영, 공천량이 바닥에 처박힌 채 노호성을 터트렸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의 웅덩이가 깊어질수록 그의 몸 또한 싸늘히 식어 갔지만 분노만은 화산과도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 찢어 죽일 놈! 으아아악!”
피에 젖은 공천량의 수염이 질척였다.
붉게 충혈된 그의 두 눈이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당충을 향했다.
“…….”
공천량의 시선을 받는 당충의 표정은 너무나 덤덤해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에 서린 감정은 단 하나!
바로 두려움이었다.
“고개를 드세요.”
두 사람의 앞에서 돌연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땅을 향하고 있던 당충의 고개가 천천히 쳐들렸다.
그의 두 눈에 언덕 밑의 철권문이 보였다.
혀를 날름거리는 붉은 화염을 배경으로 비명과 신음이 이어지는 철권문의 모습에서 과거의 영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으아악!”
“제발 살려 주세요.”
“꺄아악!”
여러 사람의 비명과 신음이 당충의 귀를 괴롭혔다.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공천량의 몸이 들썩였다.
“당충,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쿨럭.”
격한 분노를 토해 내던 공천량이 한 움큼 피를 게워 냈다.
‘시끄러운 놈.’
이십 년을 쌓아 온 우정 따위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공천량의 분노를 한 귀로 흘린 당충이 슬쩍 시선을 올려 자신의 앞에 존재하는 인영을 바라봤다.
언덕 밑에서 펼쳐지는 참상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양,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그림을 그리는 인영을 바라보는 당충의 두 눈에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귀한 집안의 공자들이 입는 새하얀 옷에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잔뜩 들어 있는 짐을 등에 걸친 인영의 나이는 고작해야 이십 대 중반 정도였다. 칠흑의 머리칼을 질끈 묶고, 뽀얀 피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다.
한없는 어둠을 담고 있는 두 눈, 그 눈만 아니라면 어느 집안에서나 볼 수 있는 귀공자였다. 허리춤에 달린 병기는 도로 보였으나 그 길이가 짧고 대신 폭이 넓었다. 그 용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기병(奇兵)이었다.
“꿀꺽.”
천천히 인영을 훑은 당충이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자는 대체…….’
눈앞의 끔찍한 참상이라면, 그것도 자신의 명령 하에 일어나는 참상이라면 일말의 감정이라도 있어야 하건만 그림을 그리는 인영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일말의 평화로움마저 보였다.
인영이 그리는 그림을 본다면 더 오싹했다.
인영이 그리는 그림은 바로 참상이 닥치기 전의 철권문이었다. 그림 속 철권문에서는 수많은 무인들이 자신을 연마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놀이를, 아낙들은 일을 하고 있었다.
타악.
마침내 그림을 완성했는지,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인영의 붓이 멈췄다.
“흐음.”
인영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어딘가 불만에 찬 신음을 흘렸다.
움찔.
그 불만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당충이 몸을 떨었다.
“흑귀(黑鬼), 백귀(白鬼).”
스르륵.
인영의 부름과 동시에 어둠이 또 다른 두 인영을 뱉어 냈다.
풍채가 좋은 중년인들이었는데, 한 명은 검은 머리칼에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새하얀 머리칼에 새하얀 옷을 입고 있어 그자들이 바로 인영이 부른 흑귀와 백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천외대천주(天外大天主).”
“그냥 편하게 천주(天主)라고 부르세요. 하하.”
“예, 천주.”
나타난 두 인영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파락.
“어떠십니까?”
멋들어진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들어 올린 인영이 두 중년인을 향해 물었다. 채 마르지 않은 그림이 흘러내렸지만 인영의 관심 밖이었다.
“멋지십니다.”
“과연 천주님이십니다.”
두 중년인이 극찬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요?”
하지만 두 중년인의 극찬에도 인영의 목소리에 서린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흐음.”
낮게 신음한 인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서 꿈틀대는 공천량을 향해 다가갔다.
“으으으.”
“기분이 어떠십니까?”
신음을 흘리는 공천량의 앞에 멈춰 선 인영이 물었다.
“으으.”
미약한 신음을 흘린 공천량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앞의 인영을 바라봤다.
“대체 네놈은 누구냐…….”
“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영이 살짝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쿨럭. 이 찢어 죽일……!”
“어머니처럼 말입니까!”
콰악.
돌연 성난 기세를 피워 올린 인영이 공천량의 주먹을 발로 밟았다. 순수했던 인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야차처럼 돌변했다.
콰드득.
“으아아악!”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난자당한 공천량의 주먹이 가해지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뭉개졌다. 산을 부수는 주먹이라 칭해지던 그의 주먹이 볼품없이 으깨졌다.
“찢어 죽이겠다고요? 어머니처럼 말입니까? 아버지처럼 말입니까? 형님처럼 말입니까?”
“으아아악!”
손에 가해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공천량을 바라보는 인영의 두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줄줄이 쏟아졌다.
“어디 한번 해 보시지요. 어디 한번 해 보란 말입니다.”
“으어…….”
이제는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지 공천량의 입에서 처연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꺼윽, 꺼윽.”
“퉤.”
경련을 일으키며 숨을 몰아쉬는 공천량의 머리에 침을 뱉은 인영이 한 걸음 물러나 손에 들린 그림을 펼쳤다.
“이 그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인영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차가운 살기로 화해 당충의 뼈를 시리게 만들었다.
“이자를 세우세요.”
“예.”
스슥.
두 중년인이 쓰러진 공천량의 양팔을 잡고 일으켰다.
“끄으.”
힘을 잃은 공천량이 실 끊어진 연처럼 축 늘어져 딸려 올라왔다.
“저는 아직도 꿈을 꿉니다. 당신들의 손에 갈가리 찢긴 가족들의 꿈을요.”
“……!”
이어지는 인영의 말에 공천량의 신형이 벼락이라도 맞은 양 부르르 떨렸다.
“그들이 제게 말합니다. 복수를 해 달라고. 당신들의 피로 세상을 물들여 달라고 말합니다.”
“너, 너는……!”
푸―욱.
공천량의 입이 막 열리는 순간, 어느새 뽑아 든 인영의 도가 그의 가슴 어름에 박혔다.
“크륵.”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공천량의 신형이 푸르르 떨렸다.
쑤―욱.
촤―아악.
부드럽게 도를 뽑은 인영이 그대로 도를 회전해 공천량의 목을 갈랐다.
푸화아악.
공천량의 목이 쩍 갈라지며 붉은 피를 뿌렸다.
투투툭.
공천량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청년의 손에 들린 그림을 적셨다.
투툭, 툭.
그림에 튀는 피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인영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하하, 하하하!”
한바탕 앙천광소를 터트린 인영이 손에 든 그림을 번쩍 치켜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떻습니까, 숙부님들? 정말 멋진 그림이지 않습니까? 하하하.”
“…….”
목이 갈라진 공천량을 든 두 중년인이 잘게 떨었다.
그들의 주인이 자신들을 ‘숙부’라는 호칭으로 부를 때가 바로 주인의 살기가 절정으로 치솟을 때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림이라면 응당 이래야지요. 하하.”
만족스럽게 웃은 인영이 작게 손을 흔들자 손에 들려 있던 그림이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 불타오르는 철권문 장내에 떨어졌다.
“하하하하하!”
그림이 떨어지는 모습을 음미하듯, 한참을 보며 광소를 터트리던 인영이 입을 열었다.
“당 가주님.”
“예, 예.”
공천량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던 당충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당 가주님이나 당가 또한 이십 년 전 혈란(血亂)에 참여했는데도 제가 왜 가만히 놔두는 줄 아십니까?”
“…….”
“당 가주님의 독과 당가 무인들의 독이 제 가족들의 살을 녹이고, 당 가주님의 암기와 당가 무인들의 암기가 제 가족들의 뼈를 꿰뚫어 피를 흘리게 했음에도 제가 왜 당 가주님과 당가를 가만히 놔두는 이유를 아냐고 물었습니다!”
“히, 히익. 모르겠습니다.”
살기 섞인 인영의 목소리에 당충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당충의 공포를 음미한 인영이 살기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당 가주님께서 친히 제 개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네.”
‘개’라는 표현이 모욕적이기도 하건만 당충의 얼굴에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혈영대(血影隊)를 붙여 드렸으니 맹검철가라는 가문을 지우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 하지만 이미 비무로 결정을…….”
“제가 언제 비무를 취소하라고 했습니까?”
“예?”
당충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자 인영이 웃음을 지웠다.
“듣자 하니 세간에서 맹화라 불리는 소저가 지금 섬서를 향해 가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아마 섬서를 통해 사천으로 오려나 봅니다.”
“아.”
자신 또한 알지 못하는 정보가 인영의 입에서 나오자 당충이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 비무도 좋지만 그전에 기세를 좀 꺾어 놓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예? 아, 예.”
“하하하. 당 가주님은 머리가 좋으셔서 이야기하기가 참 편합니다.”
“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