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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22화)


“컥.”
추욱.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혈갈의 몸이 축 늘어졌다.
“움직인 네 잘못이다.”
뒤늦은 변명이었지만 기절한 백랑이 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붕대를 감는 백랑의 손길이 한층 빨라졌다.
“다 했습니다.”
“수고했다.”
고개를 끄덕인 백랑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철연화가 백랑의 뒤를 따라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적돈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응? 뭐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백랑과 그 옆에서 똑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철연화. 그 둘을 힐긋 쳐다본 적돈이 말했다.
“저 둘이요. 사이가 묘한 것이 마치…….”
“마치 뭐?”
“그러니까 마치…….”
“마치 뭐!”
뜸을 들이는 적돈을 보다 못한 혈무악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백랑과 철연화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흠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적돈은 애꿎은 육포만 질겅였다.

* * *

“이런 건 매일 나한테만 시키고 지랄이야, 지랄이…….”
한 자나 튀어나온 흑서의 입이 쉴 새 없이 욕을 뱉어 냈다.
“그래도 내가 왕년에는……!”
한 아름 나뭇가지를 안은 흑서가 두리번거리며 마른 나뭇가지를 찾았다. 품 안에 있는 나뭇가지만 해도 족히 이틀은 써도 될 양이었지만 장작을 줍는 흑서의 손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흑서 나름대로의 반항이었다.
흠칫.
쉴 새 없이 움직이던 흑서의 몸이 작게 떨리며 우뚝 멈췄다.
파르륵.
품에 안은 나뭇가지를 쏟아 부은 흑서가 손을 뻗어 검병을 움켜잡았다.
스릉.
반쯤 검을 뽑은 흑서가 어두컴컴한 수풀을 향해 말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부스럭.
수풀이 들썩이며 한 인영을 뱉어 냈다.
흑서의 두 눈이 떨렸다.
“너는…….”
자신이 뱉은 반말에 흠칫 놀란 흑서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소협이 무슨 일이십니까?”
흑서의 물음에 수풀 속에서 나타난 무명이 손에 들린 토끼 몇 마리를 들어 올리며 답했다.
“사냥 중이었습니다.”
“그렇군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흑서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풀고 바닥을 구르는 장작들을 주웠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지켜보던 무명이 장작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흑서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흑서의 만류를 무시한 무명이 장작을 주워 흑서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소협.”
장작을 건네받은 흑서가 무명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잠자코 있던 무명이 넌지시 말했다.
“예의가 바르시군요.”
자신보다 나이가 족히 두 배는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무명에게 실언을 했다는 기색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예?”
“…….”
흑서의 반문을 듣지 못했는지 몸을 돌린 무명이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예의가 바르다고?’
멍하니 무명의 뒷모습을 보던 흑서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과거 잔악한 성격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예의가 좋다? 차라리 혈무악이 소심하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괴상하게도 저 사내 앞에서는 몸이 위축되고 저도 모르게 긴장되는 것이 마치 생사대적을 앞에 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점잖게 대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무 예민했나?’
“쩝.”
입맛을 다신 흑서가 무명의 뒤를 따라 일행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 이제 왔냐? 뭘 하다 이렇게 늦은 거야?”
흑서가 도착하자 혈무악이 가장 먼저 반겼다.
“뭐 하긴요, 장작 구해 왔죠.”
흑서가 투덜대자 혈무악이 작게 웃었다.
“무슨 장작은 또 그렇게 많이 구해 왔어?”
땅바닥에 나뭇가지들을 내려놓은 흑서가 답했다.
“타 죽으라고 구해 왔습니다.”
“뭐?”
혈무악이 눈을 부라리자 흑서가 금세 꼬리를 말았다.
“밤에 두목 춥지 말라고 구해 왔습니다. 헤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명이 토끼를 다듬기 시작했다.
스윽, 슥.
화려한 손놀림에 토끼 세 마리가 금세 다듬어졌다.
이내 흑서가 모닥불을 만들고, 무명이 구해 온 토끼를 굽기 시작했다.
치이이.
토끼가 지글지글 익으며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숲에 진동하자 육포를 먹던 적돈이 꿀꺽 침을 삼키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토끼를 주시했다.
“술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말이야.”
혈무악이 말하자 흑서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저번에 들렀던 그 객잔에서 조금 챙겨 나올 걸 그랬네요.”
“쩝.”
입맛을 다신 혈무악이 고개를 돌려 무명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현상금 사냥꾼도 아니면서 그 숲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혈무악의 물음에 무명이 답했다.
“지나가고 있었다.”
“하하하.”
명쾌한 무명의 말에 혈무악이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좋지 않은지 무명의 무표정한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뭐가 웃기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안색을 수습한 혈무악이 또다시 물었다.
“어디 가는 길이었냐?”
마치 십 년을 함께해 온 친구에게 묻듯 너무나 자연스런 혈무악의 물음에 잠시 말이 없던 무명이 답했다.
“섬서.”
“섬서?”
혈무악의 두 눈에 살짝 놀람이 번졌다.
“이거 기가 막힌 인연인데? 우리도 마침 섬서로 가는 길이었거든.”
호기심 가득한 얼굴의 혈무악이 다시 물었다.
“섬서 어디로 가는 중이냐?”
“영강.”
무명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행의 분위기가 다소 굳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절묘했기 때문이었다.
눈을 빛낸 혈무악이 짐짓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잘됐군. 우리도 영강으로 가거든. 같이 가자!”
거의 일방적이다시피 한 혈무악의 말에 흑서와 철연화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두목!”
“두목님!”
혈무악을 부르는 둘의 얼굴이 작게 떨렸다.
혈무악 본인은 정말 유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섬서로 가는 건 결코 좋은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만약 저 정체불명의 사내가 매화표국, 혹은 화산파와 관련된 자라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다.
더군다나 혈무악과 대등한 실력을 가진 자라면 지위 또한 결코 낮은 자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거리낄 것 없이 막 나가는 혈무악과 네 조장들과는 달리 철연화는 사화의 한 명이다. 혈무악과 네 조장들이 문제를 만들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녀가 일행과 함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녀나 철가로서는 큰 낭패였다.
매화표국에게 복수하자는 혈무악의 행동도 말리지 못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은 그나마 자신이 이 일행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줄이는 것이었다.
“두목님, 저희는 최대한 비밀스럽게 이동해야 해요. 특히 정체를 모르는…….”
“전음 보내지 말고 직접 말해라, 여자.”
혈무악이 면박을 주자 전음을 하던 철연화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헛기침을 한 철연화가 입을 열었다.
“무명 소협께는 죄송하게 생각하지만 지금 저희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르는 분은…….”
“누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거지?”
“예?”
혈무악의 반박에 철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턱하니 무명의 어깨에 손을 올린 혈무악이 말했다.
“평생을 쓸모없는 말만 하던 그 양반이 한 말 중에 그나마 괜찮은 말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뭔 줄 아냐?”
철연화는 물론 네 조장들, 그리고 무명 또한 이어 나올 혈무악의 말에 호기심을 표했다.
씨익.
모이는 시선에 혈무악의 입가에 자리 잡은 미소가 짙어졌다.
“맞장 뜨면 친구라는 거!”
“하.”
“허허.”
내심 멋진 말을 기대하고 있던 네 조장들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맞장……?”
귀에 익지 않은 생소한 말이지만 말뜻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거리의 건달들이 흔히 ‘싸움’을 칭하는 말로, 결코 좋은 말은 아니었다.
혈무악의 말뜻을 이해한 철연화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싸움을 했으니 그와 자신은 친구라는 말이다.
움켜쥔 무명의 어깨를 바싹 당긴 혈무악이 시원스레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렇지, 친구?”
“…….”
눈썹을 꿈틀거리는 모호한 반응을 보이는 무명을 향해 다시 한 번 미소 지은 혈무악이 휘휘 손을 저으며 말했다.
“자자,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 하고, 먹기나 하자고.”
혈무악에게 뒤질세라 뚫어져라 토끼 고기를 쳐다보던 적돈이 손을 뻗어 토끼 뒷다리를 뜯었다.
“앗, 그거 내 거야, 인마!”
“제가 아까부터 침 발라 놨는데 무슨 두목 거예요.”
“이 자식아, 내가 두목이다. 네 것도 내 거. 몰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고작 토끼 다리 하나 가지고 다투는 혈무악의 모습에 철연화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 수가 없어.’
함께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혈무악의 성격은 좀처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모래폭풍.
마치 대막을 떠나기 직전 부딪힌 모래폭풍이랄까.
부르르.
모래폭풍에 대한 공포를 떠올린 철연화가 가녀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휴우.”
반대편에 앉은 흑서가 멍한 얼굴의 철연화를 보며 낄낄 웃었다.
“보통 사람 머리로 저 인간을 이해하려고 했다가는 평생이 걸려도 모자랄 겁니다.”
말속에 담겨 있는 약간의 비웃음이 그녀를 자극했지만 흑서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기에 철연화는 말없이 그를 외면했다. 철연화를 향해 낄낄대는 흑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노려본 백랑이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가서 드시죠.”
“예, 예.”
나란히 앉은 적돈과 혈무악은 언제 말다툼했었냐는 듯 사이좋게 다리 한 짝씩을 먹고 벌써 두 번째 다리를 뜯는 중이었다.
슥.
남은 토끼의 뒷다리를 뜯은 백랑이 철연화에게 건네고 자신도 다른 다리를 뜯어 입에 물었다. 무명 또한 품속에서 꺼낸 단검으로 먹기 좋은 부위를 잘라 먹었다.
한참 토끼 고기를 뜯던 혈무악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얼굴로 무명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영강으로 가는 이유를 안 물어봤네. 영강에는 왜 가는 거냐?”
가벼운 물음이었지만 그 물음에 담은 뜻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명의 대답이 어떠냐에 따라 앞으로의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무명이 화산파나 매화표국의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처리해야 했다. 말이야 세외에서 왔다고 하지만 본래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꾸욱.
아무렇지 않은 척 병기의 손잡이를 움켜쥐는 백랑과 흑서의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불거졌다. 굳은 얼굴의 일행을 뒤로하고 호기심 담긴 얼굴의 혈무악을 주시하던 무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하를 데리러 간다.”
“수하?”
끄덕.
무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하가 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직접 데리러 간다고?”
혈무악이 묻자 잠시 침묵하던 무명이 답했다.
“정정하지. 수하가 아니라 수하가 될 예정인 자를 데리러 간다.”
“호오.”
낮게 신음한 혈무악이 물었다.
“제법 쓸 만한 놈인가 보지?”
“제법.”
“나중에 소개해 달라고.”
“기회가 된다면.”
“좋아. 하하하!”
호탕하게 웃어 젖힌 혈무악이 무명의 등을 두들겼다.
무명 또한 그런 혈무악의 행동이 싫지 않은 듯, 잠자코 토끼 고기를 뜯었다.
일행이 기묘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막 생각에 빠질 무렵, 죽은 듯이 누워 있던 혈갈의 몸이 스르륵 세워졌다.
“백랑, 너 이 새끼……!”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백랑을 향해 뭐라 말하려던 혈갈이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무명을 발견하고는 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저, 저, 저놈이 왜……!”
화들짝 놀란 혈갈이 황급히 내력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