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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21화)


“네놈이냐?”
“…….”
혈무악이 장내에 나타난 사내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사내가 아무 말이 없자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네가 내 부하들을 이렇게 만들었냐고 물었다.”
“그래.”
사내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무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전신에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살기가 사내를 압박했다. 그러자 사내 또한 살기를 일으켜 혈무악의 살기에 대항했다.
쏴―아아.
둘의 살기에 주변의 풀이 급속히 시들었다.
혈무악의 눈에 의외라는 빛이 떠올랐다.
“현상금 사냥꾼치고는 제법이군. 그래도 내 부하들을 저 꼴로 만든 대가는 받아야겠지?”
혈무악의 말을 듣던 사내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은 필요 없다!”
도를 앞세운 혈무악의 신형이 사내를 향해 쏘아졌다.
“으음.”
묵직한 신음을 흘린 사내 또한 열었던 입을 다물고 검을 곧추세워 혈무악을 향해 겨눴다.
콰―우우우.
혈무악의 도가 바람을 찢어발기며 흉포한 이빨을 들이댔다.
“팔 하나만 내놔라!”
씨―잉.
혈무악의 도가 사내의 왼팔을 노리고 밑에서 치고 올라왔다.
사내가 오른 손목을 꺾어 검을 내려 혈무악의 도를 막았다.
까―앙.
도와 검이 부딪치며 노란 불꽃이 튀겼다.
카그극.
낭아도의 이빨에 긁힌 검이 비명을 질렀다.
“하―아!”
힘찬 기합을 내지른 혈무악이 그대로 도를 추켜올렸다.
카―가가각.
날카로운 이빨이 검을 갉아먹으며 사내를 노렸다.
“큭.”
손목이 찌르르 울리는 통증에 침음을 삼킨 사내가 빙글 손목을 돌리며 검을 튕기자 검이 출렁이며 도를 튕겨 냈다.
“제법이구나, 현상금 사냥꾼!”
“나는……!”
까―앙.
둘의 외침이 날카로운 금속음에 먹혔다.
허공으로 솟구친 혈무악의 도가 흔들흔들 그 몸을 떠는가 싶더니 곧 세 개로 몸을 불렸다.
“음.”
묵직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슬쩍 뒤로 뺀 사내가 좌우로 검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한 개였던 검이 두 개가 되었고, 두 개였던 검이 네 개가 되었다. 그렇게 검이 열여섯 개가 되어 혈무악의 앞섶을 노렸다.
사내의 머리 위로 세 개의 도가 떨어져 내렸고, 혈무악의 가슴 앞으로는 열여섯 개의 검이 쏘아졌다. 서로의 병기를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두 사람이 병기를 잡지 않은 손에 내력을 보내 휘둘렀다.
꽈―앙.
주르륵.
커다란 폭음과 함께 둘의 신형이 반대편으로 밀려났다.
혈무악이 다섯 걸음 물러났고 사내가 네 걸음 물러났다.
혈무악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이 새끼가……!”
단순히 내력을 담아 휘두른 혈무악과는 달리 사내는 장법(掌法)이나 수법을 사용해 휘둘렀기에 당연 혈무악보다 더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혈무악이 사내처럼 무공을 이용해 휘둘렀다면 사내 또한 똑같이 물러났을 것이다.
“팔 하나로는 안 되겠다, 현상금 사냥꾼.”
스윽.
혈무악이 슬쩍 자세를 낮췄다.
우―웅.
그의 도에 강맹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팔 두 개, 아니면 팔 하나, 다리 하나다.”
“…….”
사내 또한 검을 들어 올리며 기운을 일으켰다.
“할 말이 있다.”
사내가 말했다.
“나는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다.”
사내의 말과 동시에 무거운 적막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뭐?”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라고 했다.”
코웃음 친 혈무악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무슨 개소리냐.”
물씬 풍기는 살기에 사내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나는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다.”
휙 소리 나게 고개를 돌린 혈무악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혈갈을 바라봤다.
“어떻게 된 거야?”
“으으. 뭐가 말이냐.”
바닥에 몸을 누인 혈갈이 힘겹게 답했다.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라잖아!”
혈무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쿨럭 피를 토한 혈갈이 말했다.
“그런 거 따질 상황이…… 쿨럭, 쿨럭.”
마른기침과 함께 피를 게워 내던 혈갈이 축 고개를 늘어트렸다. 재빨리 다가가 혈갈의 몸을 살핀 백랑이 말했다.
“기절했습니다.”
“으음.”
낮은 신음을 흘린 혈무악의 시선이 적돈에게 향했다.
두 명의 당사자 중 한 명은 기절했으니 남은 한 사람이 대답을 해야 할 터였다.
“흠흠.”
적돈이 헛기침을 하며 혈무악의 시선을 회피했다.
“현상금 사냥꾼인 줄 알고 공격했나 봅니다.”
적돈 스스로가 말하고도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엄살을 피웠다.
혈무악의 두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질끈.
입술을 깨문 혈무악이 무표정의 사내를 향해 겨눴던 도를 슬쩍 비꼈다.
“일단 사과하지.”
“무엇을 사과한다는 거지?”
“크윽.”
아무런 억양 없는 사내의 물음에 혈무악이 낮게 침음했다.
“부하가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공격한 것, 그리고 나 또한 무작정 공격한 것.”
“음.”
나직이 신음한 사내가 답했다.
“처음에 정체를 밝히지 않은 내 잘못도 있다.”
고개를 끄덕인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더 싸워야 할 이유가 있나?”
오해도 풀렸다.
물론 혈갈과 적돈이 다치긴 했지만 사정을 알아보지 못한 둘의 잘못이 더 컸으니 더 이상 눈앞의 사내에게 살심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없다.”
사내 또한 싸울 마음이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좋아.”
혈무악이 도를 치우자 사내 또한 검을 챙겼다.
도를 챙기는 혈무악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중원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군.”
무감정한 저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강함은 진짜였다. 그것이 혈무악을 매료시켰다.
“나 또한.”
사내의 짧은 대꾸에 혈무악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도 세외에서 왔냐?”
끄덕.
사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흥미 담긴 신음을 흘린 혈무악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거 더 마음에 드는데? 세외 어디서 왔지?”
“말할 수 없다.”
사내의 말에 혈무악의 오른 눈썹이 요동쳤다.
“그럼 이름이라도…….”
“무명(無名).”
혈무악의 왼쪽 눈썹이 요동쳤다.
“어디서 왔는지도 가르쳐 주기 싫고, 이름도 가르쳐 주기 싫다?”
끄덕.
사내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꿈틀.
혈무악의 양 눈썹이 요동쳤다.
“…….”
사내가 말이 없자 혈무악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더럽게 비싸게 구네.”
벅벅 머리를 긁은 혈무악이 혈갈을 살피는 흑서에게 고개를 돌렸다.
“좀 어떠냐?”
혈갈의 몸을 살피던 흑서가 답했다.
“뭐, 심각한 상처는 아닙니다. 오늘 밤만 쉬면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피부가 상해서 상처가 조금 남겠지만 후유증은 없을 겁니다.”
“다행이군.”
혈무악의 얼굴 위로 작은 안도가 흘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혈무악이 말했다.
“여기서 야영은 무리겠지?”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내장과 피가 질펀하게 흐르는 공터는 누가 봐도 야영지로는 부적합했다.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린 흑서가 수염을 꼬았다.
“제가 봐 둔 곳이 있으니 그리고 가죠.”
“그래? 그럼 그리로 가자. 흑서, 네가 혈갈을 부축해라.”
“제가요?”
흑서가 얼굴을 구기며 되물었다.
거부의 뜻이 잔뜩 묻어 나오는 흑서의 표정에 혈무악의 얼굴 또한 덩달아 구겨졌다.
“하라면 해.”
“예, 예. 누구 말이라고 안 듣겠습니까.”
흑서의 빈정거림에 울컥 치솟는 마음을 진정시킨 혈무악이 적돈을 보며 물었다.
“혼자 걸을 수 있겠냐?”
“배고파요…….”
배를 쓰다듬으며 불평하는 적돈의 모습에 혈무악이 작게 웃었다.
“다음 야영지에서 실컷 먹게 해 주마.”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이고 뭐고 어서 일어나라.”
“끄응. 예.”
적돈이 몸을 추스르고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일행이 몸을 사리고 떠날 준비를 하자 혈무악이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 무명을 향해 물었다.
“따라올래?”
끄덕.
잠시 침묵하던 무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갈을 부축한 흑서가 앞장서서 일행을 새로운 야영지로 안내했다. 다행히 가까운 곳이었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광풍을 동여맨 혈무악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흑서를 바라봤다.
“대체 이런 곳은 언제 봐 둔 거야?”
흑서의 안내로 도착한 새로운 곳은 예전의 야영지보다 훨씬 더 좋았다. 바람을 막아 줄 커다란 돌이 배후에 있어 암습의 걱정도 없었고 근처에는 샘까지 있었다.
“아까 사냥할 때 도망치는 놈을 쫓다 발견했습니다.”
흑서가 뿌듯한 얼굴로 수염을 꼬며 답했다.
“하여튼 시키지도 않는 건 잘해요.”
“크윽.”
내심 칭찬을 기대하고 있던 흑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잘해도 지랄이야…….”
“뭐?”
“아이코. 죽네, 죽어.”
혈무악이 눈을 부라리자 흑서가 부축하고 있는 혈갈을 챙기며 딴청을 피웠다.
피식.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일행의 뒤를 따르던 무명이 작게 웃었다. 대충 자리를 잡은 혈무악이 무명을 향해 말했다.
“앉아라.”
끄덕.
무명이 검을 풀어 챙겨 놓고 자리에 앉았다.
“흑서, 너는 가서 장작 좀 구해 와라. 백랑은 가서 사냥 좀 해 오고.”
“사냥은 내가 다녀오지.”
잠자코 있던 무명이 끼어들었다.
혈무악이 답했다.
“그래도 대접하는 건데 그러면 미안하지.”
“조부님께서는 남에게 신세를 지지 말라고 하셨다.”
“현명한 조부님을 두셨군.”
혈무악이 시원스레 웃었다.
“그럼 백랑 너는 짐에서 약과 붕대를 꺼내 혈갈을 치료해라.”
“예.”
철연화를 지키던 백랑이 들고 있던 짐에서 약과 붕대를 꺼내 혈갈에게 다가갔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스윽.
흑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자 무명 또한 사냥을 하기 위해 검을 들고 사라졌다.
“처음 보네요.”
“응?”
두 사람이 사라지자 돌연 철연화가 말했다.
“뭐가 말이냐, 여자.”
잠시 말을 삼킨 철연화가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호의적인 두목의 모습이요.”
“흐흠, 흠.”
철연화의 말에 혈무악이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백랑이나 도와라.”
“후훗, 예.”
철연화가 작게 웃으며 백랑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혈무악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끄응.”
몸을 옥죄는 붕대가 답답한 듯, 혈갈이 몸을 뒤척이며 신음을 흘렸다.
“가지가지 하네, 가지가지 해.”
혈갈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꼼지락거리자 혈무악이 얼굴을 찌푸렸다.
“자꾸 움직이면 기절이라도 시켜.”
혈무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절해 있던 혈갈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배, 백랑?”
눈앞에 아른거리는 백랑의 얼굴에 혈갈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백랑의 두 눈에 결심이 서렸다.
스윽.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는 백랑의 모습에 혈갈의 얼굴이 잘게 떨렸다.
“너 무슨……!”
푸푹.
거칠게 혈을 강타하는 백랑의 손길에 혈갈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