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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



고서전 1권(1화)


고양이를 기르고 싶은데 애완동물을 몹시도 싫어하는 사람과 살고 있어 아쉽게도 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털 달린 애완동물을 싫어한다니. 생리적인 거부반응도 없는 사람이 무턱대고 애완동물을 싫어한다면 인격을 의심해야 하는 겁니다만. 저보다 윗사람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그래서 거미를 기르고 있는데 이건 집안에서 저만 아는 비밀입니다. 그렇다고 정말 거미를 기르는 건 아니고, 창고 창문에 살고 있는 걸 쫓아내지 않고 있답니다. 사실 무서워서…….
딱히 저에게 공격 의사를 표현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거미는 무섭습니다. 제 둥지를 틀고 그 얇은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말이지요.
그런데 이 거미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고에서 저는 담배를 피거든요.
조금 설명을 하자면 집 안이 금연 구역인지라 흡연자인 저는 담배를 피려면 집 밖으로 나가거나 어쨌거나 실내에 담배 연기를 뿜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택한 곳이 창고인데 구석에 보일러가 있어 조금 위험한 것 같아 담배를 줄이고 있습니다. 내년의 목표는 올해와 마찬가지로 금연일 것 같네요.
그런데 보일러 물 새는데 이거 괜찮은 걸까요. 물 샌 지 벌써 일 년인데…… 뭐, 괜찮겠죠.
아무튼 그렇다 보니 담배 연기 때문에 날벌레들이 별로 없습니다. 거미의 식량이 적다는 말이지요. 그건 조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진심으로)
처음에는 이 거미도 생물인지라 담배 연기를 맡자마자 부리나케 구석으로 도망가곤 했는데, 지금은 어딘가 숨어 있다가도 담배 연기를 맡으면 나타나곤 하는 것이 꽤 정감이 갑니다. 귀엽진 않아요.
진심으로 애완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에 사로잡히네요.

조금 징그러울지도 모르는 거미 얘기는 이쯤하고.
창고는 밖에 나가지 않는 한 제가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방의 창문은 옆 건물이 바싹 붙어 있어 하늘을 보기가 여간 어렵더라고요.
아무튼 그 창고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되는 곳입니다. 생각이란 걸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창고에는 담배 연기 대신 그 생각이 가득 찼겠지요.(실상은 담배 연기가 가득.)

이 이야기도 그 창고에서 거미에게 담배 연기를 주입하다 떠올렸습니다.(거미야 미안.)
어찌 보면 자신을 잃으면서 누군가를 지킨다는, 정말 평범하고 진부한 이야기. 그리고 어떤 물건에 혼이 어린다는 마찬가지로 진부한 설정.
저는 그런 진부한 것들을 신선하게 보이도록 꾸미는 걸 참 즐겨 합니다.
막상 주제와 소재가 나왔을 때는 즐거웠으나 어떤 장르를 입힐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연재하는 공간 특성상, 무협과 판타지 중 골라야 했기에 과감히 무협을. 정확히는 신무협 판타지라는 장르를 선택해 버렸답니다.
신무협 판타지. 무협의 바탕에 판타지적인 이야기란 거겠죠? 아니더라도 멋대로 그러리라 생각해 버립니다.(이미 써 버렸는걸요.)
물론 어떤 지인은 반대했습니다.
“무협은 이렇게 쓰는 게 아니야.”
“그럼 어떻게 쓰는 건가요? 가르침을 내려 주세요.”
“피의 길을 걷는 거다! 어떤 의미로든 피! 다 죽여! 복수! 뭐든! 피 터지게 싸워 목적을 쟁취하는 거다!”
“아, 네…….”
조금 위험한 사람인 것 같아 피하기로 했습니다.

아무튼 처음에는 별 욕심 없이 가볍게 생각하여 썼는데 어쩌다 보니 계약이 되어(감사하게도!) 이렇듯 책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이게 제일 신선한 일인 것 같아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집필이 조금 늦어지게 되었습니다만 나름 최선을 다해 썼습니다.
그런데 출판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분량이 모자랍니다.”
“헉! 어느 정도나 모자른가요?”
“1만 5천자 정도 더 써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전투신이라도 추가해 주었으면 합니다.”
라는 요구를 듣게 되어 추가하려 했습니다만.
저는 평화주의자입니다. 싸움 반대.
사실 그렇다기 보다는 이야기 특성상 이번 권에서는 전투 장면을 많이 넣기가 조금 힘들었습니다.
앞으로는 많이 싸우게 해 볼 생각입니다.(아마도)

마지막으로 인사 말씀.
처음이자 이 작품의 끝까지 맡아 주실 출판사분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 요구하는 게 많은 작가라 죄송합니다. 이런 글 편집하게 되셔서 고생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연재했을 때 좋아해 주신 독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또 이 글을 쓰기까지 투정만 피우는 저를 다독여 준 Club_C 동료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손에 쥐고 계실 독자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낯설어 거부감이 드시는 분도, 혹은 너무 마음에 드셔 하시는 분도(정말?), 애매하다 하시는 분도. 읽어 봐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만약 괜찮으시다면 다음 권도 어떠신가요.
더 재밌고 즐거운 이야기를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소중히 여기고 지켜 내고야 말겠다는 그 어떤 ‘존재’가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으며, 가족, 연인, 애완동물, 거미에 이르기까지. 분명 그것은 존재하고 누구의 마음속에서나 살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존재’에 대해 기억도 못하면서 어떻게든 지켜 내려 아등바등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 권을 마무리 지었으니 다음 권은 금방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장담합니다. (1,2권이 동시 출간이거든요.)


2011년 늦가을 현규(玄奎).



서(序) 고서




……사실 고서(古書)라는 것은 그저 오래된 책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일부 단체에서는 이 고서에 대해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오래된 물건, 특히나 책과 같이 저자의 사상과 지식 지혜 등 다양한 부분을 담고 있는 서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귀기가 어려 혼이 깃든다고 하는데, 흔히 마경(魔經)이라느니 하는 것들이 이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원과 무림에 대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고서들은 특별 관리가 되어……(중략)…… 하여 그 은밀한 단체를 더욱 은밀하게 보이기 위해 흔하게 고서점(古書店)이라 부르는 것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황상에 대한 충성과 그 명예가 드높은 황실학사 구만학이 성은에 보답하고자 집필한 ‘진실의 이면’ 1권 1장. 고서점의 존재의의 중 발췌.



세상의 모든 장인이 만든 물건엔 혼이 깃든다고 한다.
온갖 불행을 가져오는 비녀부터, 집안 대대로 축복을 내리게 한다는 한 폭의 산수화, 보기만 해도 색정에 물들게 한다는 요녀가 그려진 그림. 마검(魔劍)이나 신검(神劍)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잘 움직이는 것이 바로 책.
장인이 저술한 책에 어린 혼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악명 높은 마인이 저술한 무공서는 엄청난 피를 불러일으키며, 훌륭한 도인이 쓴 책은 만인에 평온을 가져다준다.
허나 그 무엇보다 모든 책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어느 고서점 주인의 자서전 中



第一章 강해진다는 것(1)


내 이름은 일원. 올해 십칠 세의 소년이며 소림사에 살고 있다.
숭산에 위치한 소림사는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전통을 자랑하는 불도(佛道)를 계승하는 문파로 중원 무림에 그 위명이 쟁쟁하다. 일반적으로는 불도를 공부하는 스님들로, 무림에서는 그 드높은 무학으로.
나는 그런 소림사의 속가제자다.
속가제자란 정식 제자와는 달리 머리를 박박 밀지 않아도 된다. 인간으로서의 미적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 그것만큼은 마음에 들어 매우 흔쾌하다. 하지만 슬프게도 난 까까머리다. 속가제자가 삭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여차저차한 문제로 나는 계속해서 머리를 밀고 있다. 슬픈 일이다.
아무튼 나는 천 년 소림의 전통이 담긴 무공을 배울 수 있었다. 엄청나지 않은가. 물론 소림사의 상승 무학은 정식 제자들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터라 배울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소림의 무공이다. 어지간한 문파의 무공보다는 좋다고 한다.
무엇보다 소림은 아무나 속가제자로 들이지 않는다. 속가제자로 소림에 입문하는 이들은 소문에만 듣던 무림 명가의 자제들. 앞으로 가문을 잇게 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평탄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왜 평탄한 미래의 보장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