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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2화)
第一章 강해진다는 것(2)


지금 돌이켜 보건데 그때는 내가 정말 어렸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아무리 설득력이 강하다 해도 이상과 현실이 같을 리는 없는 것이다.
물론 설득의 내용대로 나는 소림의 무공을 배울 수 있었다. 여기서 약간의 문제가 있지만, 배웠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또 천하제일가라는 산서 류씨 세가의 장자도 보았고, 다른 무림 오대세가의 자제들을 전부 보았다. 그들도 나와 같은 소림의 속가제자다.
우리는 꽤나 자주 본다.
현재 정도를 지향하여 만들어진 정도무림맹의 주축을 이루는 것이 육대세가다. 그 육대세가의 자제들이 모두 나와 같이 소림에서 공부한다는 사실은, 그들을 경외하던 어린 내게 있어서 꽤 충격이었다. 아무래도 소림은 영재 교육에서 앞서 나가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판단했다고 해서 나 또한 영재라고 착각한다면 그것은 실례다.
그들과 같은 속가제자라 하여 정말로 친해지리라 믿었던 것도 사회란 엄숙한 곳에 대한 실례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내 얼굴을 제외한 온몸에 무례를 저지른 그들의 주먹과 발길질을 실례라고 생각하면 아니 된다. 아니 이건 실례가 맞잖아.
아무튼 나는 중원상회 회주의 아들로서 이곳에 왔으며, 원래는 거지였다. 상회의 회주가 자기 자식을 보내기는 싫고 소림의 후광은 등에 업고 싶어서 거지인 나를 샀다. 일종의 계약이랄 수 있다.
물론 나는 편안하게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을 준 것만으로도 양아버지이자 계약자이며 더없이 은혜로운 회주에게 상당히 고마워하고 있다. 더불어 내게 가장 소중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족.
내 여동생 미령이를 양녀로 거둬들여 준 것에도 무한히 감사한다. 그러니 이 정도 고통쯤은 괜찮다. 나는 어차피 낳아 준 부모 얼굴도 모르며 하늘을 지붕 삼아 떠돌고 구걸하고 뭇매 맞고 쫓겨 다니던 거지였으니까.
그런 거지가 대소림사의 속가제자가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인생 역전이니 만족하련다.
더불어 이곳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쫓겨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꽤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속가제자들은 틈만 나면 날 구타한다. 돈 냄새 나는 더러운 새끼부터 근본 어쩌고 하는 욕들까지. 근데 그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어느 날 구타를 참다 못한 내가 이 사실을 집법당주님께 아뢴 적이 있다. 그것은 ‘문제’가 되었다.
알고 있겠지만 집법당주란 소림의 율법을 다스려 판결하는 집법당의 총책임자로써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분이시다. 번들거리는 대머리에서부터 날카로운 눈매까지 이어지는 위엄은, 절로 사람을 위축하게 만들었다.
그날 나는 집법당주님께 ‘예의 없는 놈’부터 시작해서 ‘시기와 질투로 눈이 먼 놈’이란 소리까지 들으며 크게 혼이 났다. 한 번 더 그런 거짓을 고했다간 당장 쫓겨나고 가문에도 큰 누가 끼칠 것이라는 엄포까지 들었다. 몇 번 더 말을 하였으나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이쯤되니 억울해서 흐르던 눈물도 말라 버린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자식들이 나에게 하는 짓을 이르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그러니 절대로 어디 가서 말해서는 아니 된다.
말했다간 내가 쫓겨나겠지. 내가 쫓겨나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간 회주와의 약속을 어기게 된다.
내 여동생 미령이를 양녀로 받아 주는 대가로 소림에 십오 년간 있겠다는 계약. 그 계약에 위배되어 분명 미령이에게 해가 갈 거다.
미령이가 쫓겨날지도 몰라. 끔찍하다. 절대로 그것만은 아니 된다. 나는 힘들더라도 미령이만큼은 편안하고 유복하게 생활해야 한다.
그러니 오늘도 언덕에 누워 고통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참는다.
내 여동생 미령이는 잘 있겠지.
벌써 못 본 지도 10년이나 되었지만 그 예쁜 얼굴은 똑똑히 기억한다. 내 여동생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령이는 정말 예뻤다.
일부러 얼굴에 흙칠을 하여 감추고 다닐 정도로 고왔으니까.
곱게 자란 사람들은 잘 모를지도 모르나, 세상엔 여러모로 취향이 다양한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치안의 힘이 닿지 않는 거지 부락에서는 그 취향을 마음껏 드러내 놓기 일쑤여서 나는 미령이를 감추고 다녔다.
십 년이 흐른 지금 미령이는 더 많이 예뻐졌겠으나 그 뒤로 본 적은 없었다. 가끔 편지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멍든 가슴을 안고 누워 헤벌쭉 웃으며 나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령아. 아아, 내 여동생 미령이가 보고 싶다.

***

천하제일가인 류씨 세가의 장자, 류진룡은 속가제자들 중 우두머리 격이다. 훤칠한 키에 긴 생머리를 뒤로 곱게 묶었고 항시 목검을 허리에 차고 다닌다. 똑같은 승복(僧服)을 입었음에도 내 것과는 다른 감각이 돋보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 정도로, 녀석은 꽤나 멋있었다.
무엇보다 눈빛이 일품이다. 아무 색도 없는 듯한, 어딘가 달관했다든지 초월했다든지 하는 그 무료함이란. 그런데 좀 싸가지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무공은 어느 정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한 번도 내 몸에 손을 대지 않았으니까.
다른 다섯 세가의 자제들이 날 주무를 때도 언제나 항상 구석에 주저앉아 입에 풀잎을 물고 딴생각을 하고 있다. 어쩐지 다른 분위기가 흐르는 녀석이다.
하지만 천하제일가라는 류씨 세가의 장남이니 엄청 강하겠지.
아무튼 그날도 그렇게 산 구석에서 폭행을 당하고 바닥에 쭈그려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날 신나게 유린한 다섯 세가의 아이들은 지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먼저 내려갔다.
그때 남아 있던 그 녀석이 내게 뜻밖의 말을 한 것이다.
“어째서 네가 선택된 거냐?”
나도 궁금하다. 어째서 그 녀석들은 폭행의 대상으로 날 선택한 거냐.
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류진룡의 얼굴엔 드물게도 감정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매우 짧은 순간 번뜩인 것이지만 난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분명.
“맞으면 아프지 않나?”
그제야 나는 최대한 초연하게 답했다.
“음…… 괜찮다.”
그가 말했다.
“매질이 익숙해졌다는 건 인간의 존엄을 포기한 일이다. 추하군.”
재수 없는 말을 멋있게 뱉고 녀석은 주인공처럼 내려갔다.
물론 심한 모욕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말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류진룡을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저주하거나 실컷 욕하거나 할 정도로 나는 마음이 좁지 않다. 그런데 기분은 좀 나쁘다.
잠을 자기 위해 눕기까지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머리만 아팠다. 존엄이고 뭐고 간에 내가 미령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니까.
근데 좀 암담했다. 그래서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같이 가슴이 무겁고 숨이 턱턱 막히고 손발이 오들오들 떨리며 소름이 끼쳤다.
회주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소림을 내려가면.
나는 이제 무엇으로 미령이를 지켜야 하지?

***

이건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일생일대의 고민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새벽을 마당에서 설쳤다.
적당히 사는 것은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지만, 지극히 냉엄한 현실 앞에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하면 아니 된다.
나는 고민하고 궁리하고 고뇌했다. 소림사에서는 스님들이 번민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 같은데, 난 그냥 머리를 쥐어짰다.
소림사의 속가제자 출신이라면 나가서 꿀리진 않겠지. 어딘가에서 표사로 일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건 실력이 뒷받침된 다음에야 가능한 것 아닐까.
내가 여기서 배운 것이라곤 술상 차리는 법과 간단한 주먹질뿐이다. 거지 근성 때문인지 큰 욕심이 없었다.
적당히 여기서 버티면서 미령이가 우아한 여성으로 자라길 바라기만 했다.
한심하다. 이것이 내 십칠 년 인생의 총결산이라 생각하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생각하고 졸다가 깬 나는 퍼뜩 이런 결정을 하고 만 것이다.
미령아, 이 오빠가 반드시 강해져서 널 지켜 줄게!

***

중원 무림의 무인들은 모두 강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렇다면 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날 때리고도 양심 멀쩡한 그 다섯 세가의 자식들처럼, 누군가를 때리고도 양심 멀쩡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결국 힘이란 강함의 기본이란 소리. 그리고 무림에서 힘이란 무공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이곳은 정파무림의 기둥이라는 소림사. 그리고 나는 소림사의 속가제자다. 아무리 정식 제자가 아니더라도, 아무리 팔려 왔더라도. 속가제자에게는 한 명씩 사부가 붙는다.
결심이 선 그날, 나는 내게 배정된, 10년이나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는 사부에게 푸짐한 상을 차려 주며 말했다.
“사부. 나 강해지고 싶어.”
사부는 꿩 다리를 뜯던 입을 쩍 벌렸다.
“……뭐라?”
“힘을 갖고 싶다고.”
사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죽엽청 한 병이 떨어졌다. 빈 술병에서 몇 방울이 바닥에 튀었다. 사부는 그것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내 술을 네가 마신 거냐?”
“아니. 고기만 몇 점.”
“고기를 마시고 취했구나!”
참고로 내 사부님의 속된 별칭은 취중망승이다. 항상 만취한 망승이라는데, 제자 된 바로써 부정하기가 그렇다. 이래 보여도 내 술상 차리는 솜씨는 제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림에서 내 사부를 대놓고 막 대하진 못한다. 저래 보여도 내 사부는 현 소림의 방장 스님, 허태 대사의 사제니까. 덕분에 방장 스님의 주름살만 늘어난다고 한다.
아무튼 그런 취중망승이라 해도, 내게 있어서는 단 하나뿐인 사부였다. 더불어 무려 방장 스님의 사제씩이나 되니 무공을 잘 알 테다.
“그러니까, 강해지고 싶단 말이렷다?”
“네.”
“그래, 얼마만큼?”
“천하제일인.”
사부는 진지한 내 태도만큼이나 더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만졌다. 이마도 만져 보고 눈도 들여다보고, 입안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내 뒷덜미를 잡고 술병을 거꾸로 쥔 손을 들어 올린 것이다.
“거기까지. 뭐하는 거예요?”
“걱정 마라. 정신을 깨우는 데는 이게 최고니.”
“무시무시한 농담은 그만두시죠.”
정신과 더불어 내 머리가 깨질 거란 생각은 터럭만큼이라도 해 달라고.
사부는 껄껄거리며 술병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 꿩 다리를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냠냠, 네 녀석도 냠, 들은 거냐?”
“스님이 고기를 씹는 불경한 소리라면…… 아야!”
딱! 어느새 뼈만 남은 꿩 다리가 내 머리를 때렸다. 난 이마를 쓱쓱 문지르며 방금 사부가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거지로 살아서인지 눈치만큼은 제법인 나다.
“사부. 소림에 무슨 일이 있나요?”
“백보신권으로 모자란 것이더냐?”
“말 돌리지 말고요.”
사부는 말없이 고기를 삶은 국을 후루룩 마셨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말해 주지 않아 넘어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제 본격적으로 무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나라고 이곳에서 놀고먹고 폭행당하고 사부님 술상만 차리며 10년을 지내온 건 아니었다. 나름 소림의 속가제자라고 사부는 내게 친히 토납법과 무공 하나를 가르쳐 주셨다.
백보신권(百步神拳). 사부가 하는 말에 따르면 백 보 바깥까지 그 권세가 뻗어 나간다는 절정의 무공이라고 했다. 그것도 무려 ‘신권’이란다.
처음 배울 때에는 그 설명을 듣고 탄복한 나머지 열성적으로 배웠으나, 곧 그 백 보가 개미 걸음으로 셈 한 것이라 판단하고는 열의를 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부는 귀찮았던 게 틀림없다. 그래서 대충 주먹질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내게 전수한 것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그 뒤로 무공에 뜻이 없어 아침 운동으로 전략해 버린 것이 백보신권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사부가 그릇을 탁 놓고는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강함이란 그 끝이 없어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를 바라는 인간들이 많으니 참으로 우매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계곡에 흐르는 물은 약해 보이나 바위를 깎고 산세를 바꾸니 어디 약하다 할 수 있으랴. 가지를 꺾는 것은 눈 한 송이니 그 역시 약하다 할 수 없느니라. 또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세월을 견디지 못해 태어나고 스러진다. 그러니 강함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며 어찌 도달한단 말인가.”
어딘가 심오해 보이는 오묘한 말이었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으면서도 난해해 나는 한참을 궁리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그냥 가르쳐 주기 싫다는 거죠?”
사부는 껄껄거리며 웃었고 나는 볼을 부풀렸다. 내일부터 술상 따윈 바라지도 마라, 망할 사부 같으니.
상을 치우며 구시렁거리고 있자니 어느새 드러누워 이를 쑤시던 사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일 인시 말, 연봉정이다.”
“네?”
“늦지 말거라.”
그 뒤로 사부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