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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3화)
第二章 토하는 석두상(1)


다음 날, 난 뜬눈으로 밤을 새고 집을 나섰다. 사부는 이미 방에 없었다.
새벽녘 공기는 차가웠고 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터라 사방은 어두웠다. 그러나 내 걸음은 거칠 것 없이 가벼웠다.
이제 강한 무공을 배울 수 있으리란 생각에 마음이 크게 들떴다. 속으로 만세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과연 사부는 내게 뭘 가르쳐 줄까? 소림의 절기라는 칠십이절예일까? 근데 내가 그걸 다 외울 수 있으려나? 아니면 나한권? 또…… 밤을 꼴딱 새워서 그런지 소림의 고절한 무공 이름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아는 게 그거뿐이다.
아무렴 어떠랴, 랄랄라.
그나저나 힘이 생기면 어떻게 한담? 일단 날 괴롭히는 다섯 세가 녀석들을 혼쭐 내주리라. 아니 그랬다가 그놈들이 일러 바치기라도 하면 곤란해. 내가 쫓겨날 테니까. 그런데 왜 날 괴롭혔더라?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이제 나는 강해진다.
미령아. 이 오빠가 강해져서 나중에 널 지켜 줄게!
사부에게 뭔가 대단한 걸 배운다는 생각에 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생각은 연봉정에 도착하고서야 끝이 났다.
연봉정은 소림사가 위치한 숭산의 무수히 많은 봉우리 중 작고 아담한 연화봉의 꼭대기에 지어진 정자의 이름이다.
정자에는 사부가 정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음. 우습군. 정자에 정좌했다라. 키득키득.
혼자 실실거리며 다가가니 사부의 음성이 들렸다.
“왔으면 땅을 파거라.”
연봉정 앞에 준비된 삽과 곡괭이를 이용해 나는 땅을 팠다.
내 허리까지 들어갈 정도의 깊이로 땅을 파자 사부가 말했다.
“나무를 베어 오너라.”
나는 마련된 도끼를 들고 내 허리 둘레만 한 나무를 베어 왔다. 내 허리가 보기보다 얇아 나무는 품에 안기에도 충분했다.
“심어라.”
파 놓은 구덩이에 나무를 심었다. 여기까지 말은 쉬웠으나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떠오르는 햇살에 번들거리는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 사부는, 어느새 풀어진 자세로 내가 심은 작은 나무를 보더니 심원한 얼굴을 끄덕인 것이다. 이제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고강한 절학을 전수받을 생각에 나는 흐르는 땀을 훔치며 사부를 지켜보았다.
“이제 내려가자꾸나.”
나는 조용히 도끼를 들어 올렸다.
“……곱게 갈 생각은 마시죠.”
“네놈이 드디어 기사멸조의 죄를 지으려고 하는구나. 좋다. 덤벼라.”
당연히 나는 안 덤볐고 대신 사부가 달려들어 날 내동댕이쳤다. 망할. 꼭두새벽부터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잔뜩 골이 나 툴툴거리는 나를 보며 사부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얄밉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불유쾌한 감정을 추스르려 애쓰며 물었다.
“이게 그 고강하다는 무공인가요? 무공명은 ‘식목공(植木工)’?”
사부가 대견하다는 듯 날 내려다보았기에 나는 괜히 우쭐거렸다. 이 정도쯤이야.
“매를 버는 입이로구나.”
딱!
아야! 왜 골림당한 건 난데 내가 맞는 거냐고!
내가 날카롭게 노려보거나 말거나 사부는 태연하게 정자에 앉아 가져온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밤을 새고 새벽부터 등반하여 삽질한 지금까지의 여정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내 사부는 무공이라고는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저 술과 함께 기억 속의 무공을 위장으로 넘겨 소화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한숨을 픽픽 내쉬는 나에게 사부의 음성이 들렸다.
“이놈아.”
“그렇게 술을 드시니 치매에 걸리는 겁니다.”
“뭐라?”
“벌써 제자 이름도 까먹으시다니. 앞날이…… 악!”
딱! 내 이마를 한 대 쥐어박은 사부는 다시 술을 기울였다. 새벽녘의 찬 공기 탓인지 술기운 탓인지 사부의 코끝이 벌겠다.
사부는 다시 말했다.
“일원은 듣거라.”
“예에.”
“무릇 어떤 공부라도 대단치 아니한 것이 없다. 도공의 기술에도 뜻이 있으며 화백의 그림에도 의기가 있다. 하물며 무공에는 어떠하겠느냐. 본디 공부란 그 끝이 없으나 결국 하나의 길로 모이게 되어 있느니라. 그것이 바로 만류귀종이다. 또한 사람의 생김새가 다르듯 각각의 품기가 다르다. 같은 그릇을 만들어도 도공이 다르면 그릇의 생김도 모양도 질도 달라질 것이며, 한 경치를 화폭에 그린다 하여도 화백에 따라 느낌과 정취와 색이 다를지어다. 너는 이 말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너의 품기를 넓히는데 정진하여야 하느니라.”
사부의 긴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지난밤과는 달리 이번엔 사부의 말이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런데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닥치고 하던 거나 똑바로 하란 거네요.”
“같은 말이라도 꼭 그리 저렴하게 해야겠느냐.”
“다 사부를 닮아서 그런 겁니다.”
다시 맞을까 잽싸게 이마를 가렸으나 사부는 그저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이제 일어나서 준비하거라. 오랜만에 네 성취나 확인해 보아야겠다.”
나는 진심으로 놀라 벌떡 일어나며, 입으로는 사부의 말의 어폐를 지적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랬나?”
사부는 또 낄낄거리며 웃었다. 하여간 저 망승, 술만 먹으면 히죽거려요. 그래도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아무튼 뭔가 확인이라는 걸 해 본다고 하니 나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백보신권을 처음 배울 때만 해도 자세를 고쳐 주거나 수련법만 알려 줬을 뿐, 그 뒤로의 지시는 오로지 술상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달리 할 게 없었고, 심심할 때마다 백보신권이나 펼치며 놀았다. 이제는 숨 쉬는 것처럼 몸에 베어 버렸다.
심어 둔 나무에 백보신권을 펼치라는 지시에 나는 나무 앞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콕콕 찌르며 상쾌하게 스며들었다.
자세를 바로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는 원수를 대하듯 나무를 노려보았다.
백보신권은 백 보 밖까지 그 권세가 뻗친다는 절세의 신권이다. 물론 내가 하면 그냥 주먹질 정도밖에 안 되지만. 어쩌면 사부는 백 보 밖까지 권세가 떨쳐 나갈 위력의 비밀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설렘을 가득 안고 나는 불끈 쥔 주먹을 떨쳤다.
“으라야압―!”
텅!
심어 둔 나무가 한 차례 부르르 떨렸고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려 잎이 우스스 떨어졌다. 그리고 나도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아프잖아!
“마지막에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느냐. 호흡은 기의 운용에 그리도 중요하다 누누이 일렀건만. 에잉, 쯧.”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 듣는 소린데요?”
“처음 듣는 거니까 새겨들어야지!”
……엄청나게 뻔뻔하다. 하지만 원래 사부는 이랬으니까, 그렇게 색다를 것도 없다. 다만 의문이었다.
“그런데 사부. 정말 그렇게 하면 이 나무, 부서져 버릴 텐데? 기껏 심어 놨는데 부수면 안 되잖아요?”
사부는 마치 고기가 한 조각 남았을 때 나와 경쟁하던 그 눈빛으로 날 보았다. 물론 그때마다 난 고기 포획에 실패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호오, 부수지 못하는 쪽에 네가 아끼는 노리개를 걸겠다.”
“안 돼요! 그건 내 동생 주려고 모으고 모은 돈으로 산 거라고요!”
“그럼 다른 걸 걸자.”
그리고 나는 정말 바보 같은 궁리를 한 것이다.
“음. 그럼 뭘 걸까요…… 라고 말할까 보냐! 댁 걸 걸어! 댁 걸!”
씩씩거리며 소리치는 날 보며 사부는 또다시 껄껄거리며 웃었다. 위험했어, 말려들 뻔 했다고. 과연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남자다, 내 사부는.
“아무튼 부술 수 있다면 어디 해 보거라. 그래 봐야 네놈이…….”
“얍.”
쩌적― 쿵!
“……할 수 있단 걸 알고 있었다.”
당신, 목소리가 떨렸어. 사부는 제자를 믿었다! 따위의 뻔뻔한 거짓말하지마, 이 땡중아!
역시 사부는 대처가 빠르다. 그래도 조금 망연해졌는지 기둥이 부서져 쓰러진 나무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얼빠진 얼굴을 보니 왠지 내가 승자인 것 같아 난 한껏 의기양양해졌다.
그리고 사부는 뭔가 고뇌하는 듯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얼굴이 된 것이다.
“……역시 조금 앞당겨야겠어.”
사부가 몹시도 의문스러운 혼잣말을 했으므로 나는 제자 된 도리를 다해 무시해 주었다.
안 속아. 안 넘어가.
“그 녀석들에게 강도를 좀 높이라고 해야겠군.”
“……잠깐. 방금 그 말은 진심으로 수상쩍거든요?”
“못 들은 걸로 해라.”
귀가 없는 걸로 해라, 라는 어이없는 요구에 뭐라 항변하려 할 때였다. 사부가 부스스 정자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나에게로 걸어왔다.
“아무튼…… 못난 제자 놈을 위해 딱 한 번 보여 줄 테니, 놓치지 마라.”
“뭘 보여 주시게요? 식목공?”
딱!
아이코 머리야. 이러다 내 머리 남아나질 않겠네. 설마 사부는 제자에게 남몰래 철두공을 전수시켜 주려는 건…… 아니겠지. 고통이 너무 심했나 보다. 그런 괴상한 생각을 하다니.
그러는 사이 사부는 이제 연화봉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대체 무얼 하려는 걸까?
여전히 한 손에 술병을 쥔 채로, 사부는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으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믿겨지지 않는 말을 내뱉은 것이다.
“백보신권이다.”

***

나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고, 제대로 들었더라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하하! 사부, 뭘 하신다고요?”
“백보신권이다, 백보신권! 귀가 썩기라도 했느냐?”
“그건 아니지만…… 키킥. 사부 무공 할 줄은 알아요?”
사부는 대답 대신 손을 슬쩍 움직였다.
딱!
으악, 내 이마! 뭐야. 대체 저 멀리서 어떻게 때린 거야? 라는 의문을 품었을 때 콧등을 타고 물줄기가 흘렀다.
킁킁, 술 냄새네. 에? 설마 술 방울로?
나는 콧등을 훔치며 크게 뜬 눈으로 사부를 보았다. 사부는 몸을 돌린 채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그 뒷모습이 꽤 무게 있어 보이다니. 큰일이다. 눈이 나빠졌나 보다.
아무튼 사부의 무공 시연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나도 바싹 집중했다. 그런데 정말 할 수 있는 걸까?
그도 그럴 것이 사부는 백보신권을 전수해 줄 때에도 술을 기울이며 말로만 했었다. 그리고 한 손에 든 회초리로 내 몸 이곳저곳을 때리며 자세를 잡아 주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 사부가 무공을, 그것도 백보신권을 펼치려 하는 것이다. 나는 기대와 설렘과 의문이 적당히 섞여 야릇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 떠오른 봄날의 햇살을 받으며 사부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뼈와 가죽밖에 없는 앙상한 팔이 드러났다.
사부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나는 사부의 호리호리한 체격이 거인처럼 커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호흡은 바로 하늘의 기운. 즉, 천기(天氣)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사부가 다리를 벌리고 슬쩍 말아 쥔 주먹을 허리춤으로 끌어당겼다.
“천기를 받으면 그 다음은 지기(地氣).”
쿠웅―!
사부의 발이 땅을 구르자 지진이라도 난 듯이 지면이 흔들렸다. 나는 중심을 잡기 위해 몸을 바싹 숙여야 했다.
사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아 있었다.
“본디 무공이란 천, 지, 인.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되어 삼위일체가 되어야 하느니라. 천기와 지기를 몸 안에 받아 융화시켜 인을 완성하면, 비로소 삼위일체가 된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바람이 불었다. 그것은 너무도 강렬해 내 몸을 이 장이나 날려 버릴 정도였다. 땅이 흔들리며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연봉정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삐걱거리는 요란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나는 그 혼란스러운 광경 속에서 천천히 주먹을 내뻗는 사부의 모습을 보았다.
내가 있는 곳은 태풍이라도 한 차례 지나가는 듯 광란인데, 사부가 서 있는 곳은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고요했다. 마치 다른 세계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아, 그 모습이 무척이나 신비롭게 보였다.
곧 사부의 주먹이 직선의 운행을 마쳤다.
“백. 보. 신. 권.”
쩌엉―!
지금 사부의 주먹 끝이 닿아 있는 공간이 쪼개졌다― 고 보인 것은 착각일까.
그리고 그 순간, 땅을 뒤흔들고 사납게 몰아치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