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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4화)
第二章 토하는 석두상(2)
이른 아침. 연화봉 끝에서 무공을 펼친 사부의 얼굴에는 땀이 한 방울 흐르고 있었다. 숨도 조금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장인이 유작을 남기 듯 혼신을 다한 듯한 기색이었다.
나는 제자 된 바로써 사부의 첫 무공 시연에 대한 감상을 밝혔다.
“뭐예요, 그게? 그냥 요란한 주먹질에 불과하잖아요?”
거센 바람이 불고 지축이 뒤흔들렸지만 고작 그것이 끝인 것이다. 게다가 주먹질과는 상관없는 연출만 현란했다. 그러나 사부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피식거렸다.
“요놈. 아직 끝난 게 아니니라.”
“그게 무슨…….”
나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아니 분명 뭐라고 소리를 내긴 했지만, 더 큰 소리에 묻혀 버렸다.
우르르르―!
저 맞은편의 낯선 돌산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음, 정말 낯선 돌산인데.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
그 돌산은 사부가 주먹을 뻗은 방향에 있던 돌산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돌산은, 국가 무구인 화탄에라도 직격당한 것처럼 중앙이 함몰되어 부서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거인이 암석을 토하는 것 같아, 기괴하면서도 장대한 광경이었다.
“사, 사부…….”
넋 나간 내게 사부의 한껏 자아도취된 음성이 들려왔다.
“후후. 놀랍겠지. 사실 이런 위력은 나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너는 내게 배웠다. 물론 자랑스럽게 여겨야겠지. 아아, 존경은 되었다. 이 사부는 속세에 미련을 버리고 은둔하여 살아가는, 세월이란 물결의 방랑자이니.”
엄청나게 뻔뻔한 사부의 금칠을 들으며 나는 다시 박력 넘치게 무너지고 있는 돌산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주먹질에 저 멀리 있는 돌산이 무너져 내린다. 바위를 부숴도 대단하다 할진데, 무려 돌산이다. 그 광경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 항상 술에 취해 사는 취중망승인 사부가 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새삼 사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렇게 틈 많아 보이는 땡중이더라도 과연 소림의 제자는 제자인가 보다. 아침 햇살을 받아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사부의 초췌한 얼굴이, 오늘 따라 달마의 그것처럼 숭고해 보였다…… 라니. 내 눈 어떻게 되어 버린 걸까.
그건 그렇고 저 돌산은 너무 낯이 익은 것이다. 마치 우리 집 뒤에 있는 그 돌산처럼. 그 돌산이잖아!
“사부! 저거!”
내 다급한 음성에 그제야 사부는 자아도취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칭송하는 황망하기 짝이 없는 짓을 방해한 나를 몹시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가 잘못 되었느냐?”
“저 돌산이요!”
“후후. 그래, 내가 한 일이니 공경과 존경에 숭배 정도는 받아 주마.”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난 답답해서 소리쳤다.
“그 밑이 우리 집이라고요!”
“아. 그러냐? ……뭣이!”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에 눈을 뜬 사부가 입을 쩍 벌리고 무너지는 돌무더기와 그 밑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망연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집 뒤의 돌산이 무너진다. 돌무더기가 집을 덮친다. 눈과 비와 더위와 추위와 강풍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던 안락한 보금자리가 사라진다. 더할 나위 없는 악몽이겠지. 그리고 사부도 자각한 것 같았다.
심각하게 굳어진 사부가 이윽고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얼마 전에 담근 뱀술이! 내 목숨이이이!”
그쪽이 아니야! 집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라고!
허겁지겁 뛰어 내려가는 사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저 얼간이 같은 모습이 과연 돌산을 부숴 버린 일 권의 소유자라고 생각할 수나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사부가 왜 이제야 무공을 제대로 가르쳐 준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자 약이 올랐다.
흥! 꼴좋다. 아예 집까지 산산조각 내어 버려라, 돌산아! 그래 집…….
“노리개! 미령이 줄 노리개가아아!”
뒤이어 허겁지겁 뛰어 내려가는 나 역시도 한심하다 아니 할 수 없겠다.
***
기적이었다.
무너진 돌무더기들이 우리 집만 피해 간 것이다. 돌무더기들의 난입으로 황폐해진 공간에 우리 집만이 건재하다니. 하늘이 도왔음이 분명하다.
물론 사부는 그 기적을 뻔뻔하게 자신의 공으로 돌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일전에 진을 설치해 두었다는 것을 깜빡했군. 보아라, 제자야. 이 사부의 지혜가 하늘에 닿았음이 분명하다. 저기 저 말뚝이 보이느냐? 저것은 진의 개진을 위한 방위에 정확히 박혀 있는 것 같은데…….”
진은 개뿔, 멋대로 추측하지 마라.
무엇보다 저 말뚝. 내가 빨래를 널어 두기 위해 박아 둔 것이다. 저 봐, 말뚝에 줄이 묶여 있잖아.
요행으로 돌무더기들이 집을 덮치진 않았으나 그래도 흙먼지의 난입은 피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상당의 시간을 들여 청소를 해야 했다.
집안은 말끔해서 마당만 치우면 되었다. 노리개도 무사했고 망할 뱀술도 건재해 사부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한바탕 정리 정돈이 끝나자 사부는 마당의 평상에 올라가 힘들어 죽겠다며 늘어졌다.
나는 술독을 껴안고 있는 것도 육체적 피로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놀고 싶은 거잖아.
아무튼 사부는 평상시대로 평상에서 술을 마셨다.
“으음.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삭신이 다 쑤시는구나. 고기가 당겨, 고기가. 관절엔 역시 고기야. 제자야, 사부는 고기가 당기는구나, 고기가.”
고질병인 관절염을, 그것도 소림사의 중이 육식으로 해결한다는 놀라운 처방에 치를 금할 길이 없다.
대소림사 스님의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립니까 그게. 거기다 관절에 고기가 좋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투덜거리면서도 해 줬겠지만 오늘은 무리다. 무엇보다 내가 힘들었다.
그래서 대신 다른 걸 줬다. 쳇, 나도 아껴 먹는 것이지만 오늘 사부에게 배운 것이 적지 않았기에 선심 썼다.
“고기라 생각하고 드세요.”
“에잉? 이게? 이건 당과잖앙, 냠. 이런 건, 냠, 애들만 먹는 거다.”
맙소사. 난 무림에 전설로만 존재하는 반로환동의 고수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는 그대론데 정신만 어려졌어.
하여간 이런 사부를 돌봐야 하는 내 처지만 불쌍할 뿐이다. 아아, 누가 보호자인지 확연하게 느껴지지 않은가.
“그래도 이런 소란이 일어났는데, 아무도 안 왔네요?”
사부는 자신은 관대하다며 말했다.
“흠, 신경 쓰지 않아.”
신경을 쓰는 대상이 잘못 되어 있다.
사부 본인께서는 언제나 저런 상태라서 그렇다고 치지만, 소림에서는 왜 이리 잠잠할까. 분명 이런 대참사를 일으킨 문책을 하러 두 눈에 불을 켜고 집법당주님께서 한걸음에 달려오실 법도 한데 말이다. 뭐, 조용히 넘어가면 다행이려나.
“아무튼 사부. 아까 했던 거 말이에요.”
“백보신권? 허허, 그렇게 존경 가득한 눈으로 볼 것 없다. 말했다시피 이 사부는 속세를 등지고 세월 속을 방랑하는 고독한 은거기인. 그렇지만 그 정도는 기본이지.”
강호는 아마 내 존재를 알았다면 발칵 뒤집혔을 거야, 따위의 자랑을 늘어놓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은 무시해 주도록 하겠다.
무엇보다 알려지면 소림의 명예에 누가돼서 안 돼.
“제가 배운 백보신권 하고는 전혀 다른 것 같던데요?”
“어디가?”
“결과가 판이하게 다릅니다만?”
내 허리 두께의 나무를 격파한 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돌산을 격파한 것이 절대로 같은 무공일 리가 없잖은가.
내 날카로운 지적에 사부는 히죽거리며 마지막 남은 당과를 들어 올렸다. 나는 한 달 동안 먹으려 했던 당과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슬픈 광경을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다 드셨으면 이제 알려 주시죠.”
“네놈 스스로 알아보거라.”
나는 마당을 쓸던 빗자루를 거꾸로 쥐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잔뜩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으르렁댔다.
“기사멸조는 어떨까요?”
“후, 훌륭하다.”
사부는 낄낄거렸으므로 협박을 감행한 난 초라해진 자신에 한숨을 내쉬며 빗자루를 내렸다.
아아, 무리다. 분명 사부는 날 약 올리기 위해서 무공을 펼친 것임이 틀림없다. 생각해 보니 사부는 날 약 올리기 위해서라면 별짓을 다했던 것 같다. 오늘 일만 봐도 그렇다. 새벽녘부터 연화봉에 오르게 하더니, 땅을 파고 나무를 베어 와 심고, 그 나무를 격파한 것이 끝이지 않은가.
대체 왜 멀쩡한 나무는 베어 와 부수라고 했담? 난 차력사가 아니라고.
평상에 주저앉아 투덜거리고 있자니 내 한 달치 당과를 해치운 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원은 들어라.”
“귀가 없는 걸로 하죠.”
아까 날 귀 없는 놈 취급했으니 이 정도의 반항은 통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사부는 “그럼 귓구멍으로 들어.”라며 나에게 놀라운 번민을 안겨 주었다.
귀가 없어도 귓구멍은 있는 건가? 음. 헷갈리네. 어디까지를 귀라고 정의하는 거지?
얼간이 같은 생각을 하는 사이 사부는 이제 평상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로서 네놈에게 백보신권의 오의를 모두 전수했다. 어디까지 깨닫는가는 오로지 네놈에게 달렸겠지.”
사부는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내가 품던 의문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말이었다.
오의. 숨어 있던 진정한 뜻. 과연 그러한 것인가.
근데 숨기지 않고 알려 줬으면 더 좋았잖아. 대체 왜 숨긴담.
그 뒷모습을 슬며시 노려보는 내게 사부는 나지막하지만 조금 한탄 섞인 말을 남겼다.
“맞고 다니지 마라.”
나는 조금 놀라 있었다가 피식 웃었다. 분명 류진룡을 제외한 다섯 세가 녀석들에게 뭇매 맞는 걸 이야기하는 것일 테다. 그게 안타까워 오늘 나에게 백보신권의 숨겨진 오의를 전수한 거겠지.
다 알고도 모른 체하고 있다니. 제자를 사랑하는 방식이 글러 먹었잖아, 망할 사부님. 하지만 어째서 내가 고분고분 당해 주는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아아, 날씨 좋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봄날의 푸른 하늘은 미령이의 미소처럼 맑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령이를 회상하면 그리움과 동시에 나에 대한 초라함 때문에 씁쓸했는데 지금은 어딘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비친 태양 빛 때문에 검붉은 시야 속에 백보신권을 펼치는 사부의 뒷모습이 보였다. 더불어 박력 넘치게 암석을 토하고 있는 큰 바위 얼굴도.
곧 사부의 모습이 나로 서서히 변해 갔다. 나는 주먹을 뻗었다. 사부가 한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백보신권이었다. 이윽고 내 권격에 직격당한 큰 바위 얼굴은…… 피식거리며 비웃는 것이다.
도대체 망상에서조차 안 되는 이유는 뭐냐.
한심함을 머금고 잠시 누워 있자니,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에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꿈에서 미령이가 나와 식목공을 펼치는 날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다가 지방 현령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현령이 사부였던 터라 난 잠에서 깨자마자 졸고 있는 사부를 걷어차 주었다.
불길하다. 무슨 꿈이 이 따위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