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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5화)
第三章 재회(1)


바람이 머리를 쓰다듬고 가는 서늘하고도 섬뜩한 느낌에 깜짝 놀라 일어나자마자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허이쿠!”
“……그건 무슨 인사법입니까.”
내 눈에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는 사부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일어나자마자 유쾌한 볼거리를 제공해 준 것에는 무한히 감사하다만. 몹시도 수상하다.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햇살을 보건데 아직은 이른 아침. 이 시간에 남의 방에 무슨 일로 왔단 말인가.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그게 말이다…… 그렇게 되었다.”
날카로운 날을 드러내는 작은 수도(手刀)를 들어 올리며 사부가 싱긋거렸기에 무슨 일인지 파악했다.
“사부! 또 내 머리카락을 밀어 버린 겁니까!”
머리를 더듬거리니 맨들맨들하여 머리카락이라고는 느껴지지가 않았다. 안 돼. 나도 류진룡처럼 멋진 장발을 갖고 싶었다고! 물어내라 내 인생 내 품위, 모든 걸 변상해!
억울함에 소리치자 사부는 굉장히 이쁘게 해 줬다며 뻔뻔스럽게 감사를 요구했다. 아아, 아침부터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나는 소림사의 속가제자다. 정식 제자들처럼 소림의 규율에 크게 얽매일 이유가 없으며, 때문에 삭발을 강요당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까까머리다. 슬프다. 사부는 내 머리카락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는 걸 용납하지 않는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발을 도맡아 해 주시고 있다. 쓸데없는 데서 성실할 필요는 없다며 거부하자 이렇게 내가 잘 때를 틈타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정말 사부는 여러모로 범죄형이다.
“왜 그렇게 삭발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설마 이거, 전투력에 도움이 되는 건가요? 어떤 비장의 한 수라든가.”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럼 왜?”
“소림의 중은 중다워야 하느니. 네놈이 아무리 속가라 해도 내 제자인 이상 소림의 중 다워야 한다. 바로 이 사부처럼!”
한 차례 짧고 굵은 강연을 마치신 사부는 목이 타는지 술을 들이킨다. 더불어 어디서 구해 왔는지 닭다리도 우물거린다.
그러니까 어디가? 스님은 술과 고기를 그렇게 안 하거든요? 의중 같은 건 파악하면 머리만 아파 와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이 사부는 천하제일인이 되겠다는 제자의 의지에 각오를 더한 것이니라. 오늘부터 수련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 맞다. 그랬었죠.”
문득 어제 보았던 믿기지 않은 광경이 떠올랐다. 백보신권의 오의. 그 후로 사부는 밤을 새워 나에게 그 이론과 무공의 구결을 알려 주었다. 정말 난생처음 밤늦도록 공부란 것을 해 본 것이다.
생각해 보니 오늘 아침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사전 전략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 봤자 사부처럼 무지막지해지진 못하겠지만요.”
“그야 당연하지. 사실 이 사부는…… 흠, 아니다.”
갑자기 말을 흐렸기에 몹시도 궁금해졌다.
“사실은 뭐요? 그 오의란 것 말고도 있는 건가요?”
사부는 침을 삼키며 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봉변을 당한 것도 있고 해서 집요하게 바라보자 사부는 곧 비밀을 털어놓았다.
“나는 소림의 수호신승이도다!”
전혀 예상하기 싫은 비밀이었다. 수호…… 뭐?
“잘 알았습니다. 그럼 이제 어떤 식으로 수호하는지 말해 주세요.”
아무래도 내 말은 무시당한 것 같다.
“알겠느냐 제자야? 이 사부는 절대 숭산 밖으로 나갈 수 없느니. 이것이 소림을 수호하는 수호신승의 숙명이니라. 고독하고 외롭고……. 주절주절…… 하지만 천하제일인일 지도 모르지.”
소림의 명예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수호하는 거란 걸 잘 알았다. 만약 사부가 세상에 나간다면 소림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리라. 어라?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사부는 숭산 밖으로 한 발도 나간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경전에 심취해 있거나 무공에 몰입하여 있는 것도 아니며 막중한 중책을 맡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사부는 숭산에만 있는 것일까.
오늘은 아침부터 일진이 불안하였기에 더는 사부와 말을 섞지 않기로 했다. 사부에게 머리가 깎인 날이면 그날은 어떻게든 된통 안 좋은 일만 생긴다. 무엇보다 수련하러 가라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사부는 내가 씻자마자 날 쫓아낸 것이다. 기합이 가득 들어 있다.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솟은 응원인지는 출처가 모호하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한가롭게 언덕에 올라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백보신권의 오의는 그 심오한 심공을 바탕으로 하는데 문파의 비밀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한 가지 특이한 부분을 말하자면 보통의 무공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는 점. 내가 지닌 내공은 발화점일 뿐, 실제 발현하는 힘의 근원은 대자연의 기운이니까. 그 거대한 기운을 받아들이고 포옹하려 아등바등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무척 힘들어서 수련은 하다 말고 언덕에서 자 버렸다.
미령아, 오빠는 내일부터 강해질게.

***

“이놈! 뭐하는 짓이냐!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 그렇게 가르쳤거늘!”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리니 보였다.
눈빛이 부리부리한 중년. 짙은 눈썹 날카로운 눈매, 뭉퉁한 코, 넓은 턱. 고집스러운 입술. 그 생김새는 분명 집법당주님의 것이어서 나는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제자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마주하기만 해도 절로 죄송스러워지는 존재가 바로 집법당주님이기에 그렇게 말했으나, 생각해 보니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억울하다. 어째서입니까. 나를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고 계시다. 이상하게도 집법당주님은 나만 보면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리는 것이다. 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 작은 풀잎에도 생명이 있거늘! 네놈은 어찌하여 이리도 많은 생명을 짓밟는 것이냐. 너에게 그런 자격이라도 있단 말이냐!”
억지다. 엄청난 억지다. 하지만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원래 권력 앞에 힘없는 약자 입장이 이런 거다.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당주님. 당주님도 지금 풀잎 밟고 계십니다만.”
그래도 난 사부를 꽤 닮았나 보다. 이런 용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집법당주님은 흠칫 짙은 눈썹을 떠시더니 헛기침과 함께 슬그머니 뒤꿈치를 드셨다. 그리고는 이제 되었느냐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초상비 같은 건 못하십니까?”
“시, 시끄럽다! 애당초 네 녀석과는 면적이 다르잖느냐, 면적이! 불가피한 살생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네놈은 대놓고 드러누워 이 가여운 생명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지 않았느냐!”
거기다 말대꾸까지 한다며 집법당주님은 엄하게 날 꾸짖었다.
“안 되겠다. 네놈에게 생명의 존귀함을 조금이라도 알려 줘야겠구나. 앞으로 달포 동안 집법당의 마당을 깨끗이 쓸며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거라!”
생명의 존귀함을 배우려면 마당을 쓸어야 한다는 집법당주님의 말씀은 나에게 작은 깨달음을 주었다.
마당 청소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였구나.
난데없이 나타나 벌을 내리고 떠나는 집법당주님의 뒷모습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뒤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총총거리며 최대한 풀잎을 안 밟으려 애쓰는 모습이 가상하다.
그런데 대체 이유가 뭘까. 이곳 소림사에서는 영문을 모를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 나를 향한 집법당주님의 이유 없는 미움과 다섯 세가 녀석들의 이유 없는 구타.
대체 왜 날 싫어하는 거지? 뭐 잘못한 거 있나 고민해 보았으나 있을 턱이 없다.
멀리서 당장 안 가고 뭐하는 거냐고 꾸짖는 집법당주님의 말씀에 나는 부랴부랴 움직이면서도 불만이었다.
역시 오늘은 일진이 사나운 것이 틀림없다.

***

아침부터 사부에게 삭발을 당해 발생한 저주는 꽤나 오래 지속되는 듯 보인다. 이 기세와 여세를 몰아 단박에 내가 절명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날씨 좋은 봄 날. 나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뛰고 있는 것이다.
“야! 너, 거기서! 헉헉, 아, 안 서? 잡히면 죽어!”
제발 멈추지 말아 달라는 외침이 뒤통수에 꽂힌다. 참 웃기네. 저 말을 듣고 설 놈이 있겠냐?
나는 지금 나와 동기인 속가제자들과 한가롭게 산을 뛰놀고 있었다…… 라는 상황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나는 도망치는 중이다.
물론 유치하기 짝이 없는 협박이 무서워서 달아나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까 그만 조잘거리고 따라오기나 해라.
지금 내 뒤를 쫓아오는 사내놈들은 나와 동갑인 열일곱 살. 모두 이 소림사의 속가제자들이나 나와는 입장이 조금 다르다.
저 녀석들은 이름만 들어도 깜짝 놀랄 정도로 대단한 가문의 자제들이니까.
먼저 독기 가득한 눈으로 말없이 날 쫓아오는 기생오라비 같이 허여멀건 한 놈은, 뛰어난 두뇌로 유명한 제갈세가의 장남, 제갈기준.
그 옆에서 입에 거품을 문 채 바싹 추적해 오는 덩치가 하북팽가의 팽도현.
또 선이 굵어 남자다운 풍미를 보이는 남궁세가의 남궁진.
그리고 모용세가의 잠룡이라는 모용소천.
마지막으로 암기의 대가인 사천당가의 당문위.
하나같이 우수한 가문의 자제들인 것이다. 그 대단한 가문의 자제들이 꽃이 피어나는 봄 날 쓸데없이 정력을 허비하며 쫓아오는 이유는 오로지 날 괴롭히기 위해서이고, 내가 도망가는 이유는 오로지 이것 때문이다.
“집법당주님이 계셨다.”
절벽을 등진 산속의 한적한 공터에 도착해서야 난 뜀박질을 멈추고 도주의 이유를 은밀히 알려 주었다. 그제야 녀석들의 입이 쩍 벌어진다.
“헉! 뭐어!”
“지, 진짜냐?”
“물론. 너희 정말 큰일 날 뻔했으니까, 나한테 감사하도록.”
녀석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가 눈을 부릅떴다.
“거짓말하지 마! 그럼 네가 도망갈 이유가 없잖아!”
“저게 우릴 바보로 아나.”
과연. 고작 나 하나 괴롭히기 위해 땀 흘리기를 마다하지 않는 모습이 참으로 바보 같다. 녀석들은 숨이 차 씩씩거리면서도 날 믿지 못해 의심하는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진짜다.”
그래, 진짜 맞아.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믿지 못하는데 믿으라고 악 쓸 정도로 난 유치하지 않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시원시원하게 생긴 장발의 미남자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무슨 한 폭의 그림 같다.
“……류진룡.”
천하제일가인 산서 류씨 가문의 장남. 똑같은 승복임에도 다른 감각이 돋보이는 녀석은 역시 남달랐다. 승복의 소매를 잘라 냈군. 시원하겠는걸. 아니, 그보다 멋대로 대문파의 전통성을 잘라 내도 괜찮은 걸까.
“지, 진룡. 진짜 집법당주님이 있었어?”
제갈기준이 류진룡에게 물었다. 조금 어눌한 표정의 제갈기준은 류진룡의 말이라면 끔뻑 죽을 정도로 그를 잘 따랐다. 하지만 류진룡이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바보같이 똑같은 말을 내뱉게 할 생각인가?”
“아, 아니.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진짜겠지.”
음. 한순간에 바보가 되었구나, 제갈기준.
아무튼 류진룡의 증언으로 이제 녀석들은 그 사실을 그대로 믿고 말았다.
후아아아아아아아.
땅 꺼지겠다. 녀석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물론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 이때만큼은 나도 녀석들과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그런 나를 류진룡은 이상하단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뭐 인마. 나도 나름 사정이란 게 있다고. 다름이 아니라 정말 이 다섯 세가 녀석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장면을 집법당주님이 목격하기라도 하면, 녀석들은 혼나는 선에서 그치겠지만 나는 아니다.
아마도 부적응자로 판단되어 쫓겨나겠지.
그 엄한 노인네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소림사에서 율법을 책임지는 집법당주 허백 스님은 정말 무섭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원인 제거가 최선의 답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시는 분이니까.
그 엄하기와 권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방장 스님조차 눈치를 본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다.
물론 무적철면인 내 사부는 눈치 안 본다. 흠, 조금 부럽군.
이쯤에서 나도 사내다, 라는 생각을 해 보겠다. 그렇다면 집법당주님 몰래 저 녀석들과 사나이답게 맞싸움을 벌이면 되지 않겠는가.
……안 되겠다. 저 대단한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턱이 없으니까.
어떻게든 나는 소림에서 쫓겨나면 안 되는 입장인 것이다. 미령이를 지켜야 하니까. 그런데 좀 슬프다.
아무튼 위험에서 벗어난 나는 류진룡을 흘깃 바라보았다. 녀석은 마치 산보를 나온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그 먼 거리를 뛰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땀을 비 오듯 흘리는 나나 다른 녀석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역시, 천하제일가의 장남이란 거겠지.
절벽을 등진 공터는 한적했고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자, 그럼 이제 아까 하려던 거. 마저 해야지?”
“……?”
그리고 녀석들은 바닥에 엎드려 웅크린 나를 멍청하게 바라만 보는 것이었다.
한심한 것들. 내가 다 답답하네.
“안 때려? 그러려고 쫓아온 것 아니냐?”
“……이 자식! 우릴 놀렸겠다!”
그걸 이제 알았냐. 나는 속으로 낄낄거리며 녀석의 발길질을 허리로 받았다. 달려오느라 힘이 다 빠졌는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문득 내 눈에 날 바라보는 류진룡이 보였다. 녀석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가만히 날 바라보더니 입을 벙긋거렸다. 소리를 내지 않아 귀로 확인할 수 없었으나, 그 입 모양을 눈으로 보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실망이다.
알 게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