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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참마도 1권 (1화)
一.거래(去來)를 하다



무저갱(無底坑).
마교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곳은 희대의 죄인들만 가둬 놓았다는 어둠의 구렁텅이였다.
시신이 되기 전엔 돌아오지 못한다는 이곳에서 유례없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커덩 철커덩, 철커덩.
십육 호는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지를 묶고 있는 만년한철이 바닥에 끌려서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이끄는 대로 앞을 향해 나아 가고 있었다. 아니, 다리의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걷는다기 보단 질질 끌려가고 있다는 말이 맞았다.
좀 더 안력을 돋워 칠흑과도 같이 어두운 길을 쏘아 보았지만, 간간히 길을 밝혀 주는 횃불 때문에 오히려 더 눈앞이 흐리게 보였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해도 술에 만취한 것처럼 모든 것이 몽롱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십육 호는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예상과 다른데…… 교주가 바뀐 것인가? 아니면, 이제 날 죽이려 함인가?’
십육 호는 자신에게 비웃음을 지었다.
“큭큭.”
낮은 웃음소리는 스산하게 바닥에 깔리는 듯했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사지를 맡기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인지 십육 호를 끌고가던 사내는 걸음을 멈췄다.
끼이익.
잔뜩 녹슨 문이 열리 듯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사람의 말소리가 귀에 들렸다.
“명하신 대로 십육 호를 데려왔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오게 한 이가 있다는 말에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려 했으나, 어두운 암동에서 비치는 불빛으로 어렴풋이 한 인영의 형태만 보였다.
인영이 가볍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수고했다.”
그 말이 들리는 순간 십육 호의 몸이 거칠게 암동 안으로 내팽개쳐졌다.
“크윽!”
무거운 몸뚱이가 충격에 고통을 호소했다.
오랜 시간 갇혀 있으면서 상할 대로 상한 몸뚱이는 당장에 바스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당장에라도 혼절할 것만 같았지만 십육 호는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오히려 독기 어린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충!”
십육 호를 내팽개친 사내가 짧게 부복하고는 이내 자신이 들어온 문을 통해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곤 순간의 적막이 찾아왔다.
“…….”
중심을 잡지 못하는 신형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어둠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인영이 입을 열었다.
“흑사자(黑獅子) 구양운(歐陽雲).”
가까스로 일어서고 있던 십육 호라 불리던 죄수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정체불명의 괴인이 내뱉은 그 이름은 이제는 그의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해져 버린 자신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구양운이라 불린 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날 알고 빼냈어. 젠장, 역시나 좋은 일은 아니겠군.’
끌려 나올 때부터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다. 최악의 경우가 무엇인지 아는데도 불구하고 구양운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 지옥과도 같은 암흑 속에서의 시간은 죽은 것과 진배없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 죽음이라는 놈이 코앞까지 다가온 느낌이었다.
그때 어둠속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괴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괴인의 정체는 뜻밖에도 젊은 미공자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수하로 보이는 덩치 큰 자가 바로 뒤따르고 있었다.
구양운은 둘의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반쯤 망가진 날 죽이러 두 명이나 보낼 줄은 몰랐군. 큭큭!”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인데…… 아쉽게도 틀렸다. 난 네놈을 죽이러 올 정도로 한가하지 않거든.”
미공자의 말에 구양운은 얼굴에서 비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런 구양운을 바라보며 미공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가 가지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네놈이 가지고 와 줘야겠어.”
“크, 큭큭! 나에게 지금 명령을 내리는 것이냐?”
구양운이 못 참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무인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망가져 있었지만 두 눈만큼은 죽지 않고 이글거렸다.
그런 구양운의 눈빛과 미공자의 시선이 맞닥트렸다.
무표정이었던 미공자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처음으로 미공자의 표정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도전적인 눈빛이 미공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리고 그때 구양운이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제안이로군. 한데 내 꼬락서니가 지금 이래서 말이야. 안 됐지만 직접 가서 가져오지 그래.”
“이, 이……!”
미공자의 뒤편에 서 있던 덩치 큰 사내가 발끈했다.
조용히 손을 올리는 미공자의 행동에 덩치 큰 사내는 더 이상 나서지 못하고 노기 어린 눈빛으로 구양운을 노려보았다.
미공자는 흰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널 이곳에서 빼 주지.”
“……뭐?”
구양운이 꿈틀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얼굴로 구양운은 미공자를 바라봤다.
구양운이 반문하자 미공자가 말을 이었다.
“바로 이곳, 무저갱에서 널 빼 주겠다고 했다.”
미공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 말의 여파는 보통 것이 아니었다.
마교가 생긴 이래 단 한 명도 살아서 나가지 못한 곳이 바로 무저갱이다. 한 번 갇히게 되면 그 누구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옥의 입구가 바로 이곳이다.
그 아무리 강한 마인이라고 해도 무저갱에 갇히게 되면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죽을 때까지 평생 이 음습하고, 차가운 이곳에서 숨을 연명하게 되는 것이다.
천하에 있는 그 누가 무저갱에 갇히게 된 죄인을 풀어 준단 말인가!
구양운은 쉬이 믿기가 어려웠다.
‘불가능한 일이야. 한데……’
미공자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차 있었다.
“무엇을 고민하는 거지? 십 년 만에 맡는 바깥공기가 좋지 않은가?”
구양운의 복잡한 눈동자를 읽었는지 미공자의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감돌았다.
“난 당장이라도 너의 무공과 내공을 금제한 갈고리를 빼줄 수도 있다.”
구양운의 가슴팍엔 긴 쇠갈고리가 양쪽으로 한 개씩 꽂혀 있었다. 이것은 내공의 흐름을 막는 것으로 제아무리 강한 무인이라고 해도 단 한 줌의 진기도 모으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물건이었다.
“너는 누구지?”
구양운은 처음으로 눈앞의 미공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것들을 압도하는 기백이 느껴지는 자다. 그리고 이곳 무저갱에 갇힌 구양운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빼 주겠다고 하는 자.
미공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말인가?”
여유로운 모습과 함께 몸을 뒤로 돌린 미공자가 천천히 겉에 걸치고 있던 흑색 피풍의를 벗었다. 피풍의가 스르륵 아래로 흘러내리는 순간 구양운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흑룡(黑龍)!
청색의 비단 옷에 수놓아져 있는 것은 당장에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은 검은색의 용이었다. 등 뒤편에 수놓아진 그 흑룡이 무엇을 뜻하는지 마교의 인물이라면 모를 리가 없다.
마교 내에서 용을 옷에 새길 수 있는 부류는 단 하나뿐이다.
바로 마교의 교주, 그리고 그 직계 혈통뿐이다.
미공자가 천천히 몸을 돌려 구양운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예의 자신 있는 어투로 말했다.
“마교 이공자 사공악(司空岳)이다.”
“……!”
구양운은 꿈틀했다.
비록 이곳 무저갱에 갇힌 지 오래 되었지만 사공악이라면 구양운 또한 알고 있었다.
마교인이라면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교주의 두 번째 아들인 사공악을.
구양운은 아주 오래전 무척이나 어렸던 사공악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이제는 그 모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말이다.
마교의 인물이라면 당장에라도 오체투지하고 예를 취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구양운은 그러지 않았다.
마교를 위해 길러진 무인이었지만, 그것은 무저갱에 갇히기 전의 이야기다.
구양운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아무리 교주의 직계라고 할지라도 무저갱을 들어오는 건 불허한다고 알고 있소. 피풍의로 몸을 감추고 나타난 것을 보아하니…… 허락을 받고 온 건 아닌 듯싶소만?”
구양운의 말투에 사공악의 뒤편에 있던 사내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건방지기 그지없구나! 감히 이공자님의 신분을 알고도 이리 오만불손하게 군단 말인가! 당장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라!”
예를 취하라는 말에 구양운이 천천히 사공악의 수하인 거구의 사내를 바라봤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구양운의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사내는 온몸의 털들이 쭈뼛하며 일어서 버리는 느낌이었다.
사내가 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굳어 있을 때였다.
구양운이 입을 열었다.
“예를 취하라고? 반쯤이나마 말을 올리는 것이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다. 난 마교인이 아니거든. 무저갱에 갇힌 그날부터……”
사공악이 수하 사내에게 물러서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는 구양운을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다. 무저갱은 제아무리 나라도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 만약 이 사실이 발각된다면 제아무리 이공자인 나라고 해도 벌을 면치 못할 게야. 그것도 무척이나 큰 벌을 받겠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 사공악이 구양운의 지척까지 다다랐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을 무렵 사공악이 다시금 말했다.
“알면서도 난 너를 찾아온 것이다 구양운. 그만큼 네가 가져와야 할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니까.”
“왜…… 하필 나요?”
구양운이 물었다.
사공악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교 이공자라면 그 아래에 있는 수하들의 수만 해도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개중에는 구양운 본인보다 강한 자들도 많을 것이고, 또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임무를 완수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 수하들을 놔두고 굳이 무저갱까지 위험을 감수하면서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던 것이다.
사공악은 그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대꾸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물론 내 수하 중에는 네놈보다 나은 놈들도 많지. 이곳 무저갱에서 십 년이나 썩은 네놈보다 무림의 정세도 밝고 위험 부담도 없고 말이야. 나 또한 그런 걸 모를 리가 있겠느냐. 하지만 말이야.”
사공악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구양운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물건을 찾아올 수 있는 건 천하에 너 하나밖에 없거든.”
구양운은 사공악의 미소 속에 담긴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간파해 냈다. 사공악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왜 구양운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구양운의 인생을 망쳐 버리게 한 것이기도 했다.
“설마……”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빙긋 웃으며 사공악이 말을 이었다.
“구유수라마검(九幽修羅魔劍).”
사라져 버린 천마의 전설적인 검공인 구유수라마검. 사공악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예상이 적중했거늘 구양운은 씁쓸했다.
“그게 어디 있는 물건인지 알고 하는 말이오?”
“후후, 알지. 아니까 널 찾아온 것이다.”
사공악은 품 안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약병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구양운 앞에 놓으며 말했다.
“원앙혈고(鴛鴦血蠱)다. 잘 알고 있겠지?”
구양운의 눈동자는 자연스럽게 그 약병을 향했다.
누군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구양운은 눈앞의 물건에 대해 잘 알았다.
보통 이것을 고독(蠱毒) 또는 고(蠱)라고도 부르는데 사람의 몸속에 기생하는 맹독성 벌레로 상대방의 몸에 투입되어 기생해 있다가 한 짝을 이루는 다른 벌레가 죽으면, 숙주를 공격해 죽이는 것이다.
구양운 역시 한때는 마교인이었는데 이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절대 충성을 요구할 때 쓰는 물건이었다.
“먹어라.”
“……크크큭!”
구양운은 갑자기 어깨를 가늘게 들썩거릴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는 구양운의 눈에선 활화산처럼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순식간에 갈무리되어 사라졌다.
“만약에 말이오, 거절한다면…… 어쩌시겠소?”
순식간에 웃음기가 싹 걷힌 구양운의 말에 사공악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것이 가능하리라 보느냐?”
물음에 답하는 사공악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내가 지금 부탁이라도 하고 있다고 여겼더냐?”
그것은 강자만이 지을 수 있는 절대자의 웃음이었다.
차르르!
구양운은 눈앞의 약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