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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19화)
第八章 고서의 주인이란(2)


다음 날 나는 일찍부터 일어나 몸단장을 했다. 방장 스님을 뵈러 가기 위해서였다. 란은 여전히 벽곡단을 우물거리고 있었고, 사부는 “방법을 알아냈어! 국고를 터는 거다!”라는 발칙한 말을 해 내 얼을 나가게 만들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아침은 내 긴장감을 날려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방장 스님과 대면했다.
방장 스님과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것은 매우 절실했으며 슬펐다. 나는 소리쳤고, 매달렸고, 애걸했다. 그러나 방장 스님은 굳게 다문 입으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방장 스님은 방법을 찾으셨다.
하지만 나는 무얼 기대했던 걸까. 방법을 찾은 것으로 해결이 될 거라 순진하게 생각한 나는 도대체 뭐였던 걸까.
우리의 대화는 뜨거운 차가 식고, 엎질러진 후에야 멈추었다. 잠시 내가 진정되기를 바라던 방장 스님이 미안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열흘 안에 할 수는 없단다. 이미 40년 전에 사라진 모산파의 전대 호법을, 무슨 수로 열흘 안에 찾겠느냐. 헌데 왜 열흘이어야 하는 게냐?”
나는 망설였다. 만약 방장 스님에게 금대호의 제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방장 스님은 어떤 결단을 내리실까 불안했으나 나는 지금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결심이 서고 숨김없이 금대호의 제안에 대해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듣는 방장 스님의 얼굴은 몹시도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나는 그 시간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어떤 말을 내뱉을지, 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방장 스님의 말씀은 내 예상과 달랐다.
짧게 침음한 방장 스님은 이윽고 말씀하셨다.
“사질에게 강요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소림의 방장으로서 사질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이렇게 말해야겠네.”
그리고 방장 스님이 해 준 말은 이상하게 내 귓가에 깊숙이 들어왔다.
“선택은 사질이 하게.”

***

일생일대의 고민이 또 한 번 찾아온 것은 그리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방장 스님을 뵙고 집법당 마당을 쓴 후 집으로 가는 길에 답답한 나는 절벽을 낀 둔덕에 올랐다. 일전에 미령이를 찾은 그 자리에서, 나는 이번 사태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 보았다.
미령이를 되돌릴 방법은 찾았다. 하지만 사람을 찾는 일이다. 이 중원무림에 수많은 사람들 중 원하는 사람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열흘 안에 해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방장 스님은 선택을 나에게 맡기셨다. 어쩌면 소림의 존망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인데도 그 선택을 나에게 넘겼다.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 걸까. 아니, 그리 물렁하게 생각할 순 없어.
방장 스님은 소림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사람의 성격이 좋고 나쁨을 떠나 이런 거대 단체를 운영하는 사람이 일개 제자에게 사문의 존망을 건 선택을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 ‘선택’이라는 말에 방장 스님은, 방장 스님으로서 할 수 없는 말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라고는 매우 제한적인 것이다.
미령이를, 고서를 건네지 않고 그들과 싸운다. 물론 사부가.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고서의 주인들이 소림으로 오고 있다. 그 하나하나가 강대할 것임은 물론, 내 사부와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을 갖고 있다. 아무리 사부의 고서가 현존하는 고서들 중 최강이라 하며 그 위력 또한 실감했으나, 다수에는 어찌할 수 없겠지.
더불어 그 싸움의 여파로 소림은 황폐해질 것이다.
또 하나의 선택은 미령이를, 둘로 나뉘어진 고서 중 하나를 주고 싸움을 피하고 소림도 구하지만 내 여동생의 몸과 혼 중 하나를 잃는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나에게는 최후의 보루가 있는 것이다.
비록 사부는 반대했지만 어쩔 수 없어, 사부.
“내가, 고서의 주인이 되어야겠어.”

***

무릎을 모으고 앉아 방금 생각해 낸 계책의 문제점을 검토해 보았다. 사부가 반대하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제외하고는 문제가 없다. 완벽해.
비록 달마역근경에 대해 고서로서의 힘은 모르겠지만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소림의 역사와 함께한 책이라면, 기대할 만한 것이었다.
망설일 게 없다. 이제 란에게 가서 “내가 널 선택하든 네가 날 선택하든 하자.”라고 말하면 되는 문제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득 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정체를 깨닫고 나는 말했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내가 갈게. 잘 있어.”
“마침 잘됐군. 난 지금 혼자 있고 싶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검은 장발의 미남자 류진룡이 내 옆에 앉았다. 버릇처럼 입에 물고 있던 풀잎을 손가락으로 쥐고 비비듯 빙글빙글거리고 있다.
무슨 생각인 것인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녀석.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조금 묘했다. 나를 때리지도 않고, 나를 때리는 녀석들을 말리지도 않고, 구경만 하며 고서에 대해서는 어째서인지 잘 아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하다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녀석을 추종하여 따라다니는 악의 무리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여 묻자 녀석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석 달 정도 집에서 푹 쉬다 오겠지. 현재 소림은 귀중한 가문의 소가주를 두기엔 위험하니까.”
그 말대로 지금 소림은 상당히 오랜만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문내에서는 어떤 훈련의 일종이라 하였으나 경계가 심각한 수준으로 높아졌고, 수련도 강도가 높아졌다. 방장 스님을 뵙고 나오며 보고 느꼈던 소림은, 어떤 결의가 확실할 정도로 비장한 분위기였다.
물론 고서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그것은 문 내에서도 최고등급에 달하는 비밀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꽁꽁 숨기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고서의 주인들이 미령이를, 달마역근경을 빼앗으러 오고 있다. 때문에 쟁쟁한 다섯 세가에서 자신들의 소가주를 소환한 일은 응당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너는 왜 남아 있는 건데. 너도 천하제일 류씨 세가의 소가주잖아?”
“나는, 정확히 말해 내 가문은 고서에 관심이 많다. 지금 같이 조사해 볼 만한 상황에서 물러나는 건 있을 수 없지.”
얼마 전 녀석은 사부에게 ‘그들’ 고서의 주인들이 숭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 대체 고서도 존재하지 않고 이면 무림에는 끼어들 수 없는 천하제일가에서, 무엇 때문에 고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일까.
“방장 스님을 만나고 왔더군.”
“남자를 따라다니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괜찮은 거냐, 너?”
“무슨 오해인지 모르겠다.”
류진룡은 정말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기에 순진하지 않은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허나 아무리 잘생긴 미남이라고 해도 남자가 나를 쫓아다니는 건 결코 좋지 못한 기분인 것이다.
더불어 정체가 확실하면서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것 같이 아리송한 이 녀석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튼 나는 조금 바쁜 일이 생겨서.”
몸을 돌리자마자 녀석의 음성이 들렸다.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째서 그런 놀라운 힘을 지닌 고서가, 문파의 문주에게 계승되지 않는지.”
“시도는 좋았어.”
난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이어지는 류진룡의 말엔 귀가 솔깃한 것이었다.
“내 가문에도 가주에게만 전해지는 무공이 있다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문파라 하더라도 그 비정절예는 문파의 대표자에게만 습득 권한이 주어지지.”
갑자기 무슨 소린가 했는데 듣다 보니 의혹이 불거진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소림의 고서는 소림사 방장 스님이 아니라, 내 사부. 취중망승이자 수호신승에게로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서를 전담하기 위해 수호신승이라는 직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다른 문파를 보더라도 고서의 주인은 문주가 아니야. 소림을 비롯한 다른 팔대문파도, 고서의 존재를 숨기고 있다.”
“너…… 대체 어떻게 그런 사정까지 다 알고 있는 거냐?”
“관심이 많다 하지 않았나.”
한 문파의, 그것도 대문파가 감추려고 하는 진실의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을 정도면 이미 관심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도를 넘어섰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소림에 있는 고서의 위치까지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소림과 천하제일세가와 어떤 연이 닿아 있음은 모르겠지만, 이 예로 보았을 때 나는 녀석이 하는 말에 한 톨 거짓도 없을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그것은 이미 충분히 위험한 것이었다. 대문파들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라면, 그 문파에서 그냥 두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어쩌면 천하제일세가와 그들, 팔대문파와는 모종의 협의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만. 내가 알 바는 아니겠지.
아무튼 이 위험천만한 사내의 말이 궁금해 나는 계속 들었다.
“고서는 사실 깨어날 때부터 성향이 없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내 어깨가 멋대로 떨린 건 자의가 아니다. 날 뚫을 것같이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에서 나는 놈이 내 비밀, 미령이와 달마역근경에 대해서까지도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소림에 고서는 둘 이상 존재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이곳까지 올 이유는 없을 테니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잠시 숨을 고른 류진룡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고서에겐 악함이나 선함 같은 게 없다. 그런데 어째서 40년 전 혈검의 난이 일어났던 걸까. 궁금하지 않은가?”
“그야 당연히…….”
“그 검은 마검이니까, 라는 말은 하지 않길 바라네. 아까도 말했듯 고서가 탄생할 때 성향이란 건 없으니.”
“그럼 고서의 주인이 마인이었겠지.”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내 말에 류진룡의 표정 없는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내뱉는 음성도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의 이름은 류세현. 마음이 여리고 인성이 고우며, 무공을 익혔으나 선비 같은 분이지. 절대 마인이 아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잠깐. 이름이 류세현?”
설마, 아차, 이럴 수가, 라는 탄성이 절로 나올 추리가 머릿속을 빠르게 누볐다. 류진룡은 그 류세현이란 사람에 대해 어떻게 자세히도 알고 있을까, 라는 의문은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남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류진룡은, 그 간직한 비밀의 크기만큼이나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조부라네. 또 그 혈검의 이름은 천룡신검. 내 가문의 가보였지.”
나는 너무도 놀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 녀석이 가문의 비밀을, 그것도 남에게 절대 말 못할 것 같은 이런 거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이유에 대해서는 한참이 지나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어째서 내게……?”
“자네는 알 권리가 있어. 다음 대 고서의 주인이 될 테니까. 아니, 어쩌면 소림에 있는 다른 고서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지. 그런데 전에 보니 자네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았더군. 어째서인지는 나도 몰라. 그러나 수호신승이, 소림이 자네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걸 나는 용납할 수 없는 거네. 가려져 있는 진실에 대한 아픔을 알기에, 그 비참함을 알기에, 나는!”
나는 숨을 들이켰다. 항상 입에만 물고 있던 풀을 돌리고 있던 손은, 꽉 쥐어져 있었다. 풀잎은 가루가 되어 흘러내린다. 언덕을 내리긋는 바람에 류진룡의 긴 장발이 휘날려 이를 악물고 있는 그의 하얀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나는 자네에게 말해 주는 거라네.”
그 어떤 회상을 했는지 분기 가득한, 그러나 몹시도 슬픈 얼굴로 류진룡은 내게 충격적인 비밀을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