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고서전 1권(21화)
第八章 고서의 주인이란(4)


금대호가 얘기한 열흘이 흘렀다. 긴장과 고민과 두통의 연속이었던 날들과는 안녕. 이제는 토할 것 같은 초조함만이 가득했다. 여러 가지 잡생각과 번뇌들이 한데 어우러진 종착점은 거대한 혼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사실 생각이란 게 사라진 것 같았다.
타개할 방책이 보이지 않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밥을 먹지 못한다, 씻는 건 고사하고 옷 갈아입을 생각도 안 든다.
“시간이 거꾸로 흐른 모양이구나. 네놈이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지처럼 보인다, 이놈아.”
사부의 말에 란도 코를 막았다.
“일원. 똥냄새가 난다. 일원은 똥인가?”
뭐 이놈아? 어이가 없지만 그 말대로 내 몸에서는 악취가 장난이 아닌 듯했다. 그 동안 나는 악몽도 꾸며 식은땀도 꽤 흘려 정말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일원. 씻어.”
그렇게 말하며 란은 마당의 우물에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물이 해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무서워하는 모습에 평소라면 웃으며 당장 물을 끼얹었겠으나, 지금으로선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겠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만이 경험한다는 흐릿한 기억. 그랬던 것 같은데 정말 그랬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 일들이 있었다.
이를 테면 내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밥을 먹었다는 것들이다.
여전히 멍하니 있으니 사부의 음성이 들린 것 같았다.

“네놈은 참으로 예의롭지 못한 제자니라. 사부가 술병을 들고 있음에도 안주를 대령치 아니하며, 사부를 대함에 있어 공경이라고는 내가 먹은 고기만큼이나 없도다. 생각해 보니 제자는 항상 사부의 고기를 빼앗아 먹는다. 돼먹지 못했도다. 이 사부는 늙고 힘없고 병들어 육식을 취해야 하거늘. 제자는 그런 사부의 건강에 대하여 눈꼽에 묻은 티끌만큼도 걱정치 아니한다. 제자는 사부를 짐짝 취급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슬프도다. 그러나 제자야. 잘 듣거라.”

굳어졌던 머리가 슬금슬금 굴러간다.
먼저 사부, 자신이 먹은 고기만큼의 공경이라면 난 사부를 무한히 공경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눈에 묻은 눈곱도 아니라, 눈곱에 묻은 먼지라니. 너무 심합니다. 그래도 난 사부를 미령이 다음쯤으로 좋아한다고요. 그런데요 사부, 그거 알아요? 나 어쩌면 사부에게, 그리고 소림에게…… 못할 짓을 할지도 몰라요. 나는…… 사부, 나는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동생을 지키거라.”
“……네?”
“알겠느냐? 소림이나 이 사부 따윈 생각지 말아라. 너는…… 너만은 그리하면 아니 된다.”
사부의 목소리엔 후회와 슬픔과 애절함이 동시에 묻어나고 있어 왠지 모르게 울컥해져 버려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사부를 생각하듯이.
사부도 나를 생각한다.
우리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로 불리기에 손색이 다소 많다 해도, 예와 격이 다소 없어 보인다 해도, 우리는 그런 관계다. 더 살갑게 지내고 더 가까이 지내 오면서 쌓은 정은 부모 자식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마치 가족 같은 관계. 내게 있어 사부는 아버지와 같았고 또는 형제 같았으며 친구 같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사부의 그 말에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은 그랬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조용하던 정적을 깬 것은 미령이의 말이었다.
“왔다.”
누가 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당에는 네 명의 남녀노소가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이 가지런히 서 있었다.

***

장소를 옮겼다. 푸른 들판이 쳐져 있는 곳이었다. 혹시 몰라 소림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곳으로 우리는 이동했다.
나타난 사람은 금대호와 이모저모.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 한 명. 허리가 구부정한 작고 노쇠한 노인 한 명. 두터운 철판을 보는 듯이 전신이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인 서늘한 표정의 주걱턱 사내가 한 명. 그리고 이 세상의 주인공 같은 미남자, 류진룡이 있었다.
“에……? 너, 너도?”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닐세. 나는 부탁을 받고 회합의 증인으로 온 참관인이니까. 그리고 그쪽들도. 나에게 해가 안 끼치게 해 주시오.”
금대호는 염려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을 끝낸 류진룡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풀잎을 입에 물고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정말 멀리도 간다. 작은 점으로 보일 지경이다. 이제부터 있을지도 모르는 싸움의 피해 범위에서 벗어났다기 보다는, 그저 나무 그늘을 찾아간 것 같았다. 참으로 게으른 녀석이도다.
고서의 일은 그쪽 세계와 관련이 없는 이들은 알지도 못하며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참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 류진룡이 참관인의 자격을 얻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류씨 세가는 고서를 보유했었고 그로 인해 무림에 대참사를 불러일으켰다. 고서와 관계가 있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무가로 돌아왔다.
무림과 이면 무림을 넘나들었던 이력. 때문에 이 참관의 증인으로서 적절한 위치라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내 쪽에도 나와 사부, 미령이의 몸을 차지한 고서 란과 이모저모가 있었다. 집법당의 당주님, 소림사 방장 스님, 원로원의 나이 드신 몇 분. 수는 우리가 더 많다. 하지만 유리해 보이지는 않다.
한적한 공터에는 무릎까지 올라올 정도로 잡초가 피어 있었다. 꽤 넓었다. 바람이 스아아 불자 그 흐름에 풀잎들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저쪽의 대표는 아무래도 금대호인 듯 그 무리에서 한 발 나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쪽의 대표는 나와 내 사부다. 다른 이들은 고서의 문제에 정면으로 끼어들 수는 없다.
그래 이제부턴 내 문제다.
금대호는 품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손잡이가 짧은, 그리고 날이 기이하게 휘어져 있는 단도. 고서 하현이었다.
“그래, 소년. 결단은 내렸는가?”
나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겨우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결단은 내렸다. 하지만 그것이 통할지는, 소림을 믿어 보는 수밖에 없다.
금대호는 얼굴에 화색을 띄며 마치 예견했다는 듯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태도로 말했다.
“잘됐군. 중만 있는 이곳에서 시간을 오래 끌다가는 나도 불가에 귀의할 것 같아 불안했거든. 아무튼 그럼 이제 주게나. 고서의 몸이나 혼, 둘 중 하나를.”
웬만하면 운송이 편하게 몸체를 달라는 금대호를 보며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싫은데?”
금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뒤에 있는 고서의 주인들도, 그리고 우리 측 사람들도. 모두가 경직되었다.
그가 하현을 내리며 무거운 음성을 토해 냈다.
“소년. 참사가 벌어질지도 몰라. 아니 그렇게 되겠지. 전에도 그렇지만 말이란 신중하게 해야 하는 거야.”
“해 봐.”
“…….”
“못하겠지? 그래 못할 거야. 내 사부, 소림의 수호신승이 지닌 고서 탈마구주탄(脫魔九珠彈)과 맞선다면 전력을 다해야 할 테니까. 그것이 무엇을 예고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테지? 그러니까, 해 보라고.”
나는 저들을 본 뒤 란을 통해 저들이 가진 고서에 대해 물었다. 내 결심에 확신을 더하기 위해서였다.
란의 말은 이랬다.
“정확한 능력은 모르지만, 느껴지는 영력으로 보아서 전부 합해도 늙은 인간의 고서와 비등하거나 아래다.”
때문에 저들이 전력을 다하지 않는 이상 사부의 옆에 있는 내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전력을 가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 이성을 잃고 마인이 되어 광포하게 날뛰다가 끝내는 모든 원기와 영기를 소모하여 죽음에 이른다.
고서의 주인인 저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금대호와 가타부타의 얼굴은 얼간이처럼 넋이 나가 버렸다.
음, 보기 좋군. 지금껏 내가 고민하느라 밥 굶고 안 씻고 거지처럼 지냈던 지난날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니 어딘가 뿌듯하다. 우리측(내 사부를 비롯한 소림사 일동)의 얼굴도 내 기발하며 발칙한 재치에 넋이 나간 듯 보였다. 하지만 사부의 얼굴은, 그 눈빛은 달랐다.
그것은 슬프게도 보였고 안타까워 하는 듯도 했지만 알 게 뭐냐. 이게 내 선택의 일부다.
문득 저 멀리 류진룡을 보니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있었다. 뭐냐 저 반응은.
“많이도 알아냈구나, 소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역시 저들 중 대표격인 금대호였다.
“네 말이 맞다. 우리가 수호신승과 겨루어 제압하려 한다는 것은, 그래. 최선을 다해 자멸한다는 말이겠지.”
“잘 알았으면 이만 물러나는 것이 좋을 거야.”
말을 하면서도 뭔가 이상했다. 금대호와 가타부타는 분명 충격을 받았던 표정이었는데, 금세 사라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호신승의 옆에 있는 자넬 우리는 건들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거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야 당연하잖아. 내 사부의 고서는…….”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저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새로 등장한 고서를 회수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모든 고서의 주인이라면 지니는 공통적인 의무. 고서의 주인이라면 피해 갈 수 없다.
그리고 내 사부는,
“미안하구나.”
고서 탈마구주탄(脫魔九珠彈)의 주인……이다?
턱. 어깨에 닿는 사부의 묵직한 손길에 소스라치게 몸이 떨렸다.



第九章 진실(1)


류진룡은 말했었다. 그들, 고서의 주인들이 단체 행동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새로 등장한 고서의 회수 때문이라는 사실을. 또한 모든 고서의 주인들은 그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을.
사부는 말했었다. 미령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하지만 그 말을 반대로 생각한다면 사부 역시 소림의 고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란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소림의 고서를 지키기 위한 사부의 방식이었다.
“미안하구나. 소림의 고서를 지키는 방도는 이것뿐이니. 네가 지닌 고서의 반쪽을 넘겨주면 저들도 나도 얌전히 넘어갈 것이야.”
나뭇가지로 돌을 톡톡 내려치는 것 같이 아무 느낌도 감정도 없는 일관된 음성에 헛웃음이 나온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고서의 주인이라 해놓고 그 고서의 주인은 고서를 지닌 자들이 아닌 모양이다.
빼앗기게 된다.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사부와 저 앞에 고서를 소지한 넷. 그리고 방장 스님과 원로원의 노승들. 그 얼굴들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놀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
그들은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죄 지은 사람처럼 시선 하나 마주하지 못한다. 달마역근경이 내 여동생 미령이와 양분되었다는 것은 아마 그들도 알고 있겠지.
웃음도 나오지 않아.
나를 보호해 주기 위해 나서 준 것이라 생각했던 든든한 아군은, 사실은 사부가 동원한 ‘수단과 방법’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 때문입니까? 빼앗기게 될 것이 두려워서?”
“내 고서는 소림의 힘이면서도 그 역사의 일부다. 그리고 저들의 고서들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겠지. 네놈에겐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 그런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무엇이든 해야 하지 않겠느냐.”
분명 사부는 나에게 미령이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라고 했다. 그것은 사부 본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령이도 지키고 싶고 소림도, 사부도 지키고 싶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듯이 사부도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사부가 생각하는 ‘지켜야 하는’ 범위 안에 미령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에게 미령이가 소중하다고 해서, 사부마저 미령이를 소중하게 여길 거라는 건 그야말로 착각이다. 하지만 나는 제멋대로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그건 정말 글러먹은 생각이었다.
나는 가만히 사부를 바라보았다. 사부도 나를 보고 있었다. 문득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궁금했었어요, 사부. 어째서 그렇게 집법당주님이 사부를 싫어하는지.”
사부가 무슨 소리냐며 갸웃거리는 걸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나에게 육사숙님이 있었다는 걸 왜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만하거라.”
무슨 소린지 듣던 사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난 그만둘 생각이 없다. 이 엄청나게 최악의 기분에서는 뭐든지 해 버릴 작정이었다. 그리고 이미 해 버린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죽었다는 것도.”
“그만하래도!”
드물게도 사부는 진심으로 나에게 호통치고 있었다.
사부는 말이 없이 주먹만 꽉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사부의 어깨와 악다문 입은 온몸으로 절규를 하는 듯 보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다. 전날 방장 스님을 뵈었을 때, 나는 이러저러한 말들을 들었다.
그 얘기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