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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22화)
第九章 진실(2)


사부에게는 끔찍이 아끼는 막내 사제가 있었다. 나에게는 육사숙님이 될 것이다.
어느 날 사부는 무림행을 마치고 소림으로 돌아오는 막내 사제의 마중을 나갔다. 그러나 맞이한 것은 끔찍한 참사.
막내 사제는 날카로운 단도에 전신이 유린당하고 있었고, 그 처참함 앞에서 사부는.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막내 사제를 구할 수 없었다.
흉수는 사부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다.
고서의 주인. 그럼으로 인해 무림의 일에 끼어들지 못함도 알고 있었다. 이를 어길 시 소림의 고서는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그 흉수는 알고 있었다.
사부는 그저 구해달라는 막내 사제의 고통과 외침을 눈과 귀로 접하면서,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해야만 했다.
뒤늦게 달려온 집법당주님이 나섰으나 흉수는 이미 도주를 한 뒤. 그 후로 집법당주님이 사부에 대한 증오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는 방장 스님의 말씀이었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

***

“이번에도 사부는 그렇게 하겠죠. 내 품에서 미령이를, 달마역근경을 빼앗아 저들에게 주겠지요! 내 고통과 비명 정도는 전날 그때에 비하면 덜할 테니까!”
사부의 얼굴은 몹시 힘들어 보였으나 내뱉는 말에는 힘이 가득했다.
“물론, 나는 그럴 것이다.”
한 사람과 꽤 많은 시간을 함께 살아 많은 버릇을 공유해 온 것이 이리도 슬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사부는 손에 든 술병의 주둥이를 엄지손가락으로 쓱쓱 문지름으로써 굽히지 않을 고집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아해야. 수호신승은 너를 위해 이러는 것이니라. 그리 표독스레 볼 것 없어.”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였던가. 지나간 과거를 들춰 보면 분명 불쌍하다 보일 수 있겠으나 난 불쌍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내 손으로 미령이를 지켜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나는 불쌍하지 않아.
진짜 불쌍하고 불행한 것은 오히려 저들이다. 힘이라는 단순한 것을 지키기 위해 더 없이 소중한 것들을 내팽개치는 저들이야말로 내 눈에 참으로 안쓰러워 보였다.
난 품속을 뒤적여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원하는 것은 이건가요? 운송하기 편한 본체 쪽?”
달마역근경.
햇살에 비치는 책은 한눈에 보아도 세월의 힘에 의해 여러모로 손상된 모습이었다.
저들이 바라는 것은 이것.
내가 지켜야 하는 것도 이것.
저들의 눈에 이것은 고서로 보이겠으나 내 눈에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여동생으로 보인다는 괴리가 있다.
소림의 역사와 함께한 고서를 지키기 위해서 사부는 자신이 끔찍이도 아끼는 막내 사제의 죽음을 외면했다. 무용하다. 참으로 하잘것없다. 그런 힘이라면 대저 왜 필요하단 말인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힘을 얻는 것이지, 힘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것을 내다 버리는 건 그야말로 지독히 슬픈 일이잖아.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
“이걸 원한다 하셨죠. 받으세요.”
“……잘 생각했다. 그리고 미안하구나.”
달마역근경을 받으며 사부는 무거운 얼굴을 끄덕였다. 가슴이 턱턱 막히던 공기가 한 결 풀리는 것 같았다. 구석에 앉아 있던 류진룡도 사태가 끝났다고 생각하는지 어기적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야.
“이로써 난 그대들이 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다, 소년. 좋은 선택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며 금대호는 말했다.
그래, 좋은 선택이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옳은 선택은 아니란 걸, 저쪽은 아는 모양이다. 내 눈을 피하는 것을 보면.
금대호와 가타부타는 이제 조금 편안해져 보였다. 이곳 모두가 그런 것 같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가 그들의 얼굴이 그랬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이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겁니다.”
“제자야, 그게 무슨 말이냐?”
사부는 물었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짧지만 내 의지를 포함한 말을 뱉었다.
“란.”
내 여동생의 몸에 들어간 고서 달마역근경의 이름이 란이라는 사실은 사부만 안다. 무공의 경지가 높은 무인들은 작은 말도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이 말은 들어도 도저히 모를 것이다.
하지만 사부는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알고 있었다.
“안 된다!”
사부의 말을 뒤로한 채 나는 란을 향해 돌아섰다.
고서는 아직 이쪽에도 남아 있어. 그것도 영혼을 지닌 쪽이.
나를 에워싼 사람들이 그걸 깨닫는 건 그 순간이었던 모양이었다.
막아! 안 돼! 무슨 짓이느냐! 라는 난잡한 외침과 동시에 내 몸을 붙잡는 손들이 느껴진다.
사부는 내 팔을 붙잡았고 집법당주님의 다리가 내 무릎을 뒤에서부터 꺾었다. 더불어 숨이 턱 막혔다. 두터운 팔이 내 목을 뒤에서부터 죄고 있던 것이다. 내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방립의 끝자락을 보았을 때 아무래도 금대호인 것 같았다. 내 귓가에서 그의 으르렁거리는 음성이 들린다.
“미쳤는가, 소년! 네가 하려는 행동은 위험해! 모든 고서의 주인들이 널 노리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 여동생도 무사하지 못해!”
“맞아. 나만 노리겠지.”
소림과 사부는 무사할 것이다. 금대호는 당황했는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내가 대신 말을 해 주었다.
“그런데 정말 무지하게 빠르군요. 그렇게 멀었는데…… 과연 천하제일 살수였던 당신답습니다.”
그는 자신을 금대호라 소개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을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몽월상인(夢月商人).”
“……뭐?”
내 목을 조이던 팔 힘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뿐만 아니라 내 무릎 뒤편을 누르고 있던 집법당주님의 발도, 거두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집법당주님의 얼굴은, 그럴리야 없겠으나 전날 과음이라도 실컷 한 듯이 창백했다. 사부는 무슨 일이냐는 얼굴이었다.
제자 된 바로서 사부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부분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 없다 해도 그럴 것이다.
“집법당주님이 그러더군요. 제게 있어선 육사숙님이 되시는 분의 살해 사건. 이십여 년 전 숭산 앞에서 그분을 죽인 흉수의 이름을 알아냈다고. 그런데 찾을 수가 없었죠. 어째서인지 그 뒤부터 무림에서 종적을 홀연히 감추었다던데…… 혹시 집법당주님, 제게 그 이름을 다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는 꽤 많은 걸 들었다. 그것들은 마치 쪼개어진 자기의 조각들 같았다. 그 여덟 날 동안 나는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고서의 주인들이 온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렇게 텅 비어 버리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간 내가 한 일이라고는 가만히 앉아 쪼개어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 나가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쌓여 있던 의문을 풀어내는데 상당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제는 그 완성된 조각들을 보여야 할 때였다.
조금 긴 침묵을 깨고 집법당주님은 말씀하셨다.
“몽월상인…… 하현(下弦).”
“……뭐?”
사부의 놀란 음성을 뒤로한 채 나는 고개를 돌려 금대호를 돌아보았다. 그는 몇 걸음 물러선 채로 방립 아래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당신이 말했었지? 나는 너무 많은 걸 알아냈다고.”
그가 지닌 단도의 이름이 하현인 것과 이것은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 그는 몇 가지 의문을 남겼다.
그는 소림을 제 집처럼 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치 언제고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던 것처럼.
살수란 이들은 하나의 살행을 할 때에도 최선을 다한다. 지형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표적의 주변인까지도 조사가 철저하다. 그는 너무 철저했기에 그것이 오히려 덫이 되어 발목을 물린 것이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금대호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소년…… 너는 알아야 할 것이다. 방금 네가 한 말로 인해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나는 서서히 꿇렸던 무릎을 펴며 일어섰다.
“당신도 알아 둬. 이제부터 일어날 끔찍한 일은, 오로지 당신 때문이란 것을.”
고개를 돌리니 가만히 서 있는 란이 보였다. 사랑스럽고 예쁜 내 여동생의 얼굴을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으로 만들고 있는 녀석. 고서 란의 눈은 나를 담고 있었다.
이 선택이 과연 옳은 일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거면 되었다.
나는 말했다.
“란! 계약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느꼈다. 온갖 죽음에 이르는 방법들이 나에게 날아들고 있음을. 저 멀리 서 있던 세 명의 고서의 주인들이 움직였다. 하현의 주인인 금대호의 신형은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사부의 고함 소리와 더불어 갖가지 고서들이 지닌 죽음으로 향하는 이능의 힘들이 내게 집중되는 것은, 어제의 나라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내 귓가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일원. 계약은 아침에 했잖은가.”
나는 이미 고서의 주인이니까.

***

바람이 사납게 불어댔다. 귀를 먹게 만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대기가 진동하며 몸을 압박한다. 무언가에 짓눌리듯 몸이 무거웠다.
갑자기 환해졌다. 태양빛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밝고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뜨겁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거대한 화룡(火龍). 전각 삼층에 해당될 무시무시한 크기를 드러낸 불의 용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나를 향해 찍어 온다. 더불어 구름처럼 하늘을 가리며 수많은 비도들이 모든 퇴로를 봉쇄하며 날아들고 있었다. 마치 수천 명의 군사들이 활을 쏜 것 같았다.
쿵쿵쿵.
지축을 뒤흔들며 철판같이 생긴 사내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것 또한 기이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지면이 뒤흔들리며 흙이, 풀들이, 사내의 두 다리를 타고 올라가 전신을 뒤덮는다. 가뜩이나 큰 덩치는 더욱 커져 거의 일 장에 육박해진 흙의 거인은, 포효를 지르며 바위처럼 크고 단단한 팔을 뒤로 젖히고 있었다.
이것이 고서가 지닌 상식을 벗어난 힘.
그 어떤 강호의 무인들이라도 숨죽일 수밖에 없는 천리를 거스르는 능력.
그것들이 나에게 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바라던 바였다.
“준비해, 란.”
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란과 계약을 한 뒤 속으로 물었다. 너는 어떤 종류의 힘을 낼 수 있느냐고. 란은 말했다.
네가 원하는 그 무엇이든.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이제는 해 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앞을 보았을 때.
“에?”
외소한 등이 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 사부?”
“물러서거라!”
“싫습니다. 사부야말로 물러서시지요.”
“오기 부릴 때가 아니다. 이 멍청한 놈아!”
지금 그 오기는 내가 부리고 있는 게 아니야.
“막을 수 있습니다!”
“누가 모른다더냐? 저 빌어먹을 고서라면 무사히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너는 달라. 무사하지 못해. 소실, 빌어먹을. 잃게 된단 말이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부의 말대로 고서의 힘을 사용한다면 나는 ‘잃게 된다’.
고서의 그 놀라운 힘은 무공과 같은 그런 수련이 필요치 않다. 노력도 없이 난데없이 힘을 얻는 것이다. 대신 힘을 사용할수록 무엇인가를 잃는다. 그것이 천리를 거스르는 힘을 사용하는 대가. 나는 그 어떠한 것들을 모두 ‘잃게 되었을 때’ 마인이 된다는 것을 란에게 들었다.
많게는 수십 번도 더 그 힘을 사용한 다음에 닥칠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모른다. 당장 이번 한 번 출수하고 마인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사부는 그것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알겠느냐? 누구도 한계에 대해 몰라. 만약 이 일전에서 네가 마인이 된다면 내 손으로…… 나는 그러고 싶지 않구나.”
탈마구주탄을 앞세우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사부의 두 눈은 슬픔과 고통, 애환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슴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