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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23화)
第九章 진실(3)
나는 사부를 바라보았다. 어제 보던 사부와 오늘 보던 사부는 달랐다. 내가 달라졌기에, 어제와 오늘의 다름이 보였다.
그렇기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사부가 나를 생각하듯이 나도 사부를 생각하니까.
“미안해, 사부.”
“그리도 미안하면 얼른…….”
갑자기 사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무슨……짓이냐…….”
“정말 미안해, 사부.”
나는 천천히 사부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사부는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씰룩거렸으나 무리일 테다.
란의 힘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니까. 나는 사부의 정신에 충격을 조금 주어서 사부를 기절시켰다.
말을 멎고 스르륵 쓰러지는 사부의 몸을 나는 받아들었다. 앙상한 팔을 드러낸 사부의 몸이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힘의 대가.
내가 알게 된 사실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고서의 힘을 버티는 영혼의 한계량. 내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사부가 막으면. 어쩌면 사부는 마인이 될지도 몰라. 난, 그건 못 보겠더라.”
입이 썼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란은 그걸 말해 주지 않았다. 입을 꾹 닫고 아무런 이야기도 내게 해 주지 않았다. 내 상태가 어찌 될지는, 내가 나를 볼 수 없어 나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마인이 될지도 모른다.
사부의 고서 탈마구주탄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동시에 나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고서들의 공격이 나를 덮쳤다.
***
“좋아, 란. 계약하자.”
이른 아침. 일어나니 사부는 보이지 않았다. 또 어딘가로 산책을 나간 듯했다.
란은 대답 대신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일원은 이상하다. 마음과 말이 달라. 일원은 지금 무서워하고 있다. 이성을 잃고 마인이 되어 이 소녀를 해치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계약을 하자고 말한다. 어째서지?”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란도 더는 묻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어서 오히려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담담했다. 아마도 또 내 마음을 엿 본 것이겠지. 그리고 내 마음을 엿보았다면 내가 품은 걱정도 알았을 테다.
“그대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란은 처음으로 웃었다. 그 미소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했다.
***
내 바람은 이루어진 걸까.
나는 황폐해진 공간을 둘러보았다. 방장 스님을 비롯한 소림의 스님들은 모두 건재했다. 다소 흙먼지를 뒤집어써 평소의 근엄함은 엿볼 수 없었으나 인명 피해는 없어 보였다.
소림은 지켰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있는 사부가 보였다. 사부 또한 지켰다. 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란도, 무사해.
“괴…… 괴물 같은 놈…….”
고개를 내렸다. 고서 하현의 주인인 금대호가 땅에 허리를 반쯤 묻은 채로 너덜거리는 손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와 내 목숨을 노리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당신도 무사하군요. 다행입니다.”
너무도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손목이 아닌 목을 노렸을 뻔했다. 다행히 내 이성도 무사했다.
“……죽여라, 소년.”
“그럴까요?”
내가 손을 휘젓자 책 한 권이 날아가 금대호의 턱을 모서리로 가격했다.
아프겠네.
금대호의 입에서 피와 함께 부서진 이의 파편이 날아갔다. 다시 내 앞에 돌아와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낡은 책의 겉표지에는 달마역근경이라 쓰여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아. 소림에 맡길 거거든.”
“흥! 웃기는 소리! 고서의 주인인 날 소림은 건들 수 없다!”
“맞아. 당신이 고서의 주인이라면.”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내 손에는 서슬퍼런 단도, 하현이 쥐어져 있었다.
화룡의 쩍 벌린 아가리가 나를 삼키려 내리꽂혔다. 수많은 비도들이 내 몸을 꿰어 버릴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흙과 돌로 둘러싸여 단단해진 거대한 거인의 주먹이 나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듯 날아든다.
“란.”
나는 조그마하게 나의 고서를 불렀다. 고서는 응답했다. 영혼이 아닌 본체 쪽이.
낡은 책은 내 앞에 두둥실 떠오르더니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말로만 듣던 무림 고수들의 호신강기가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강경한 둥근 막을 형성했다. 힘의 우위에 있어서 달마역근경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달마역근경의 보호를 앞세워 나는 고서들을 하나하나 사냥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사냥이었다.
내가 계약한 고서. 달마역근경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렇게 들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보호와 파괴. 그것이 내 바람에 가장 적합한 힘이었다.
본체인 책은 내 의지대로, 정확히는 내 마음을 읽은 란의 의지대로 나를 보호한다.
그리고 나는 ‘고서’를 파괴한다.
“죽여. 그냥 나를 죽이라고!”
내 손이 스친 화룡의 도가 산산이 깨어지는 광경을 본 여인은 정신을 놓아 버렸다. 이래저래 울부짖다가 혼절했다.
흙과 돌의 갑주를 걸쳐 거대해진 거인의 돌주먹과 내 주먹이 맞닿았다. 그는 주먹부터 부서져 나갔다. 나를 향한 불신 깊은 그의 눈동자는 잊지 못할 것이다.
얇은 통을 휘둘러 무수히도 많은 비수를 국수가락 뽑듯 뽑아내던 노인은 등을 돌려 달아났다. 쫓아가려 하였으나 그의 신출귀몰한 경공에 포기했다.
그리고 내 그림자 밑에서 서슬퍼런 단도.
하현이 솟아났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바닥을 적신다. 순발력 좋게 나는 하현을 붙잡았고 그 순간 고서 하현의 능력을 멈추었다. 더불어 날아온 책이 하현을 쥔 금대호의 손목을 작살 냈다.
고서로서의 힘을 잃은 금대호는 내 그림자에서 끝까지 솟아날 수 없었고 나는 땅에 허리부터 파묻혀 있는 금대호를 걷어찼다.
그렇게 나를 열흘이나 괴롭혔던 고서의 주인들은 일각이 채 지나지 않아 정리되었다.
그것이 다소 허탈하였다.
“당신이 그랬지? 고서는 고서를 알아본다고.”
이를 빠득빠득 갈며 금대호가 말했다.
“그것이 어쨌단 말이냐?”
“만약 당신이 고서의 능력이 아닌 살수로서의 능력으로 나를 죽이려 했다면 성공했을 거야. 고서는, 고서를 알아보니까.”
순간 금대호의 눈이 부릅떠지는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그러나 곧 그는 박장대소했다. 목젖까지 보일 정도로 호쾌하게 웃어 젖히더니 곧 웃음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소년…… 건방 떠는 것도 여기까지다. 이 사실은 조만간 점주에게 전해질 터! 모든 고서의 주인들이 네놈을 노릴 것이다! 그때도 네놈이 그리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마!”
“그건 당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참, 땅속에 숨어 있어서 못 봤겠네? 내가 지닌 고서의 힘을.”
나는 손에 들고 있는 단도, 하현을 들어 올렸다. 손잡이가 아니라 날을 잡고 있는 터라 통증이 지독했지만 이 정도 고통쯤은 지난 내 인내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순간 금대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비록 땅 속에 숨어 있었으나 분명 느끼고 있었겠지.
고서가 하나하나 죽어 가는 것을.
“서, 설마…….”
침을 꿀꺽 삼키는 그를 향해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긍정의 의미다.
“소, 소년. 내 말 좀 들어 봐! 내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 고서를 준다고 했어! 수호신승 앞에서 그 중을 죽이면 고서를 준다고 했다고! 고서라고! 그럼 할 수밖에 없잖아! 자, 잠깐. 진짜 하려는 건 아니겠지? 머, 멈춰! 안 돼, 안 돼에에!”
사부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결단을 내렸다. 금대호에겐 다시 없을 정도로 잔인한 말이었을 테다.
“돼.”
파직. 어딘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기괴한 곡선이 아름다운 고서 하현은 전신에 수많은 균열이 생기더니 모래알갱이처럼 잘게 부수어져 바람에 흩날려 갔다.
“이제 당신은 고서의 주인이 아니다.”
이어지는 금대호의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소림의 법을 집계하는 집법당주님이 그 앞에 서서 조용히 불호를 외웠다. 그리고는 냅다 그의 뒤통수를 걷어차 기절시켰다. 나에게 짧게 눈짓을 해 보인 것 같은데 흐릿하여 잘 보이지가 않았다.
끝났다― 라는 마음에 긴장이 풀렸는지 몸이 녹초가 되어 흐느적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간신이 버텼다.
소림을 지켰고 사부를 지켰고, 란을 지켰다. 이십여 년 전 벌여졌던 내 사부의 원수를 찾았고 잡았다.
하지만 어딘가 허전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바람은 이루어진 걸까.
난데없이 머릿속이 핑 돌았다. 란의 모습이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땅이 가까워져 오더니 화면이 홱 바뀌어 방장 스님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는 굉장히 의뭉스러운 말을 들은 것이다.
“미령이를 되돌릴 방법을 아는 사람의 위치를 찾았다는 전갈을 받았네. 그…… 사질, 사질? 괜찮은가?”
시야가 깜깜해졌다. 눈이 감긴 것 같았다. 몸이 끝없이 밑으로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온몸의 감각이 멀어져 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잃게 되는 걸까.
第十章 잃은 것(1)
눈을 뜬다. 눅눅함이 배어 있는 천장과 작년 여름 모기와의 치열한 사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벽지. 구멍 뚫린 것을 몇 번이나 메운 창호문과 한눈에 파악되는 좁고 아늑한 공간.
내 방이다.
머리가 멍했다.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듯이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앵앵앵거리다 점점 맑아지더니 욕설이 들렸다.
“……망할 놈아. 눈 떴으면 냉큼 일어나지 않고 뭐하는 게냐! 이놈이 그래도 누워 있어? 사형 내 제자가 맛이 갔나 보오. 이건 때리면 돼.”
잔뜩 심술 어린 사부의 음성을 뒤이어 방장 스님의 목소리.
“그만두거라.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아이를 또 기절시킬 참이더냐. 사질, 괜찮은가?”
괜찮지 않습니다, 방장 스님. 저는 조금 더 누워 있고 싶……
“법대로 하기 싫으면 당장 일어나라.”
이어지는 집버당주님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조건반사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익숙한 내 방을 낯설게 만드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소림사의 방장 스님, 내 사부, 집법당주님. 그리고 구석에 쪼그려 앉은 란.
그들이 가뜩이나 비좁은 내 방을 더욱 비좁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일어나자 순간 짜르르 한 고통이 손에서 느껴졌다.
“으에에엑, 이건 뭡니까?”
내 오른손이 천으로 칭칭 감겨 있다. 어째서냐. 내 손은 평온할 날이 없도다.
“나도 궁금하구나. 왜 하현을 맨손으로 잡은 것이냐?”
그제서야 떠오른다. 금대호의 고서 하현을 부수었던 기억이. 당시에는 흥분하여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지금은 맹렬히 아팠다. 그보다 이 손. 치료 행위를 한 것 치고는 지나치게 성의가 없다.
“이 사부가 해 줬다. 고마우면 돈으로 갚아.”
벌금의 노예가 되어 버린 사부는 뭐든지 돈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보다 부탁인데 다음부터는 사부가 치료해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림의 의승들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문득 하현이란 말에 그 주인이 떠올랐다.
“금대호는 어떻게 되었어요?”
“가둬 놨다. 그는 자신의 죗값을 치를 것이야.”
무시무시하게 말한 집법당주님은 깨어난 것을 보니 되었다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문을 나서기 전 나에게 말을 남겼다.
“그리고…… 고맙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