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고서전 1권(24화)
第十章 잃은 것(2)


사부가 아끼던 막내 사제이자 내게는 육사숙님이 되시는 분을 죽인 살수는 몽월상인 하현. 금대호다. 사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살심이 치솟는 흉수겠지. 그런 그를 내가 잡았다.
그래도 집법당주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음. 이런 걸 뿌듯하다고 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기분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사부가 나를 불렀다.
“제자야.”
“네.”
“금대호는 더 이상 고서의 주인이 아니더구나.”
“응. 내가 부쉈거든요. 하현.”
사부는 무어라고 할 말을 못 찾는 듯 보였다. 표정을 보니 정말이냐고 묻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내가 지닌 고서 달마역근경의 능력이 그것이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땐 란처럼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궁금하잖아.
그래서 가만히 있으니 돌연 냅다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
“아아악! 소중한 제자에게 무슨 짓입니까! 소중히 다뤄 주세요.”
“이놈이 그래도?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고서를 죽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아아. 그런 것인가, 하고 나는 깨달았다.
그 가치가 국가 보물급에 해당한 것이 고서. 그런 것을 세 개나 없앴으니 어쩌면 나는 천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고서를 없앤 거 때문에 화난 거라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금대호를 소림에서 죗값을 받게 하려면.”
“누가 그딴 걸 신경 쓴데! 내가 손댈 수가 없잖아!”
사부는 발악발악 소리치며 모든 게 제자탓이라며 다시 고서를 살려 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해댔다. 란을 바라보니 란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역시 그건 란으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참으로 사부다운 이유인 것이다.
그 말대로 금대호는 이제 더 이상 고서의 주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서의 주인인 사부가 끼어들 수가 없다. 이면 무림의 인물은 바깥 세계의 일에 끼어들면 안 되니까.
누구보다 흉수를 찾아 복수를 하고 싶었을 사부였을 텐데. 조금 안 됐다는 마음이 들었으나 제대로 심판을 받아야 함이 옳지 않을까.
“그보다 사질. 묻겠네.”
방장 스님은 죽장의 응징으로 사부를 조용케 하고선 말을 이었다.
“사질은 고서를 취했는가?”
“……그렇습니다.”
“그 고서의 능력으로 다른 고서를 없앴는가?”
나는 조용히 끄덕였다. 눈을 지그시 감은 방장 스님은 무거운 얼굴이었다.
나는 허락도 받지 않고 소림의 고서인 달마역근경을 취했다. 이것은 무를 수 없는 영혼과의 계약. 내가 죽지 않는 한 계약은 유지된다. 또한 그 고서로 다른 고서를― 죽였다.
이 사실에 대해서 방장 스님은 어떤 생각을 하시고 어떤 말씀을 할지 나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부도 조용했고 란은 원래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방장 스님의 눈이 뜨였다.
그리고 선언을 하듯이 말씀하셨다.
“미등록된 고서를 욕심내어 취한 제자 일원을 현 시간부로 파문에 처한다. 또한 소림은 달마역근경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

***

사부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금대호를 제외하고 고서가 파괴당한 이들은 소림에서 어찌할 수 없어 놓아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조직에서 고서의 승계를 대대로 잇다 보니 무공이라고는 거의 할 줄 몰랐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사부가 수호신승의 자리를 물려 주려고 일부러 무공을 안 가르쳐 준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 구태여 배울 필요가 없다고나 할까.
어쨌든 나는 파문되었다.
멋대로 고서를 취하고 그 고서로 다른 고서들을 훼손한 죗값. 소림은 더 이상 나에 대한 일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달마역근경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지고지엄하신 방장 스님의 말씀이었다.
“말도 안 돼…….”
“안 되긴 뭐가 아니 되느냐. 다 네놈이 자초한 것이니라. 얼른 짐 싸.”
말은 그렇게 하면서 사부 본인이 분주하게 내 짐을 멋대로 정리하고 있다. 신나 보이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떠난다니까 좋습니까? 난 억울하다고요.”
“억울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내 제자가 게으르긴 했으나 술상 차리는 건 제법이었거늘.”
“갑자기 파문당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요.”
“그러지 마라 제자야. 가지마.”
“왜 이래요, 징그럽게. 붙잡지 마세요. 난 갈 거예요.”
“아니 된다. 엉엉, 안 돼.”
“요거요거, 내가 없으면 외로워서 큰일 나겠군요.”
나와 사부의 유치한 촌극을 구경하는 란의 반응은 싸늘하다. 호응이 없으니 민망해진 나와 사부는 얼간이 같은 짓을 그만뒀다. 하지만 사부는 내 짐을 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내 제자인데 마지막 가는 길은 손수 해 줘야지.”
마치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하게 된 아들을 둔 어머니 같은 말에는 농담도 나오지 않았다.
십 년간 함께한 사부다. 비록 이별 앞에서 농을 주고받고는 있으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 짐을 싸는 사부의 손길에 정성이 가득하다.
“긴 여행일 테니 이런 것들이 필요할 게야. 아, 이것도 좋겠군. 저것도.”
너무 가득해.
한숨이 나온다.
“장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고요.”
내 앞에는 어느덧 엄청난 크기의 짐 보따리가 생성되어 있는 것이다. 높이가 내 가슴까지 올라온다. 뭐냐 이 엄청난 양의 짐은.
그제야 사부는 언제 이렇게 쌓였냐며 다시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고 풀고를 몇 번 반복하다 못 참겠어서 내가 나서서 내 짐을 꾸렸다. 더불어 란에게 필요한 짐도.
내가 짐을 싸는 것을 감독하다 지친 사부는 몹시도 피곤하다며 술병을 찾았고 나는 마지막으로 제자의 도리를 다해 술상을 차려 주었다.
“고기가 없구나.”
“대신 사랑이 가득하잖아요.”
“설마하니 먹으면 열흘간 배앓이를 한다거나 갑자기 확 늙어 버린다거나 토한다거나 하는, 그런 걸 넣은 게냐?”
“아니요. 사랑에 빠지는 묘약입니다.”
“끔찍한 음식이군. 냠냠.”
평소처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아도 즐겁지 않다.
나는 이제 소림을 떠난다. 사부 곁을 떠난다. 마지막이지만 시간이 없어 고기를 올리지 못하는 게 여간 미안했다.
사부는 말 없이 술을 들이켰다. 쓸데없이 양만 많은 찬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꾸역꾸역 먹었다.
“사형을 미워하지 말거라.”
사부는 술로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네놈을 파문시켜야 소림도 너도 지킬 수 있으니. 사형도 눈물을 삼키고 내린 결정일 게다.”
“네…… 저도 알아요.”
자세히 들은 이야기는 없으나 분명 고서를 관리하는 어떤 조직이 있는 것 같았다. 고서를 회수하러 온 이들이 임무를 실패했을 시 자신들의 고서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했으니까.
분명 상상도 할 수 없이 큰 힘을 지닌 세력일 테다. 고서들을 소유하고 있는 곳이니까.
그런 그들로부터 소림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장 스님은 달마역근경이라는 소림의 보물을 포기했다. 오히려 나를 포기하여 그들에게 넘기고 달마역근경을 취하는 것이 소림의 이득이었을 텐데. 그래서 그런 대담한 결단을 내린 방장 스님께 감사하고 있다.
사부는 빈 술병을 말끔히 해치운 상 위에 내려두고는 입을 열었다.

“고서점이란 게 있다. 망할 놈들이지. 세상의 모든 고서를 독점으로 관리하는 기관이다. 소속이 어디인지, 거점이 어딘지는 불분명하며 주인이 누구인지도 몰라. 다만 고서점이라는 흔하디 흔한 이름을 사용하여 은폐를 확실히 하고 있다. 얄팍하다. 그 거대한 힘을 독차지 하려 한다.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모든 고서의 주인들은 고서점의 소속이니까. 나 역시도 마찬가지니라. 알겠느냐? 그 고서점의 고서들을 파손시켰으니 이제 모든 고서의 주인들이 앞으로 너를 노릴 것이야.”

사부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 빈 술병을 기울였다. 술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고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흔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고서는 그야말로 몇 세기에 걸쳐 생성되는 희귀한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고서의 시작이 언제였는지 알지 못하므로, 고서가 얼마나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나에게서 란을 회수하기 위해 넷을 보냈다면, 나를 죽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서를 보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갑자기 소림을 벗어나는 것이 몹시도 두렵게 느껴졌다.
“나…… 괜찮은 걸까요.”
“걱정 말거라. 고서의 주인들은 무림에 끼어들 수가 없어. 무림 집단인 살수 조직이라든가 하오문에도 의뢰를 하지 못하지. 그들도 방법을 생각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게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사부. 고서를 사용하면 잃는다는 건 대체 뭐예요?”
“너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니라. 나 같은 경우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잃어 버렸지.”
“뭔데요?”
사부는 새로운 술병을 꺼내 잔을 채우며 씁쓸하게 말했다.
“흉수의 얼굴.”

***

“그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십 년간 눈과 비와 더위와 추위와 강풍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던 안락한 보금자리 앞에는 사부와 집법당주님이 내 배웅을 위해 나와 주었다.
조심히 가라는 둥, 신세진 걸 알면 황금으로 갚으라는 둥의 배웅 인사가 오갔다.
“방장 스님이 전해 주라고 하더라.”
그렇게 말하며 집법당주님이 내민 종이에는 간략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북경. 한경서점주. 홍허.

“이건…….”
“그 사람을 찾아가면 될 게다. 그리고 이것 받아라.”
건네받은 주머니를 여니 철전과 은자가 섞여 있었다. 꽤 묵직했다.
“방장 스님이 배웅하러 오지 못한 마음에 주는 노자다. 물론 내 옷값은 제했다.”
계산이 철저한 집법당주님이었다. 감사하단 인사를 하려던 찰나 주머니가 또 손에 쥐어졌다. 사부였다.
“속세의 고기는 비싸다고 하더구나. 무전취식 같은 건 하지 말고 꼭 잘 먹고 다니거라.”
“사부…….”
감격하려는데 갑자기 집법당주님이 말했다.
“잠깐. 그건 도로 내놓거라. 사형, 벌금을 잊으셨소?”
“이미 내 것이 아닌데? 빼앗으면 강도짓 하는 거다, 사제.”
그 천하제일의 뻔뻔함도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사부의 얼굴과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억지로 활기차 보이려 애를 쓰고 있다. 무려 십 년이나 같이 산 내 눈에는 그런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 아팠다.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마지막으로 방장 스님께 전할 말이라도 있느냐?”
고개가 숙여진다.
나로 인해 소림이 받는 피해는 어마어마하다. 소림의 역사적 가치가 드높은 달마역근경을 포기했으며 고서점이라는 고서를 관리하는 기관에서 압박을 받을지도 모른다.
내 욕심 때문이다. 란을 지키기 위해 멋대로 계약하고 고서들까지 부셔 버렸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 책임을 지고 파문을 당하여 소림에서 나간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책임 회피가 아닐까. 떠나간 나는 자유롭지만 항상 이곳에 있어야 하는 소림은 그렇지 못할 테니까.
그런 내가 무슨 면목으로 방장 스님께 할 말이 있을까.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귀에 집법당주님의 말씀이 들렸다.
“할 말이 없다면 내가 한마디하마.”
“경청하겠습니다.”
“다시는 소림에 오지 마라.”
기어가는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당연하다. 나는 파문제자니까. 그런데 섭섭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