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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25화)
第十章 잃은 것(3)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사부가 끼어들었다.
“아참. 제자야. 중요한 걸 두고 가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말하며 사부는 노리개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노리개. 여성들이 쓰는 장신구.
“으엑. 사부 이런 취향이었어요?”
사부는 넋이라도 잃은 듯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방장 스님의 죽장으로 머리를 얻어맞으면 나올 듯한 표정으로, 믿기 힘들다는 눈빛으로,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르겠느냐? 그건 네가 그리도 좋아하는 녀석 준다고 돈을 모으고 모아 산 거란다.”
“이건 또 뭐예요? 자수 뜬 손수건? 엉성하기도 하고…… 엑, 내 이름. 설마 사부가 직접 한 건가요?”
“그건 네가 좋아하는 녀석이 널 위해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런 놈도 있어요? 아, 남자라면 끔찍한데.”
사부는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령이란 아이를…… ‘잃었느냐’?”
고서의 힘은 대단하나 그 힘을 사용한 대가로 사용자는 무엇인가를 ‘잃는다’. 사부는 끔찍이도 아끼는 막내 사제를 눈앞에서 죽인 흉수를 잃었다. 기억하지 못한다. 때문에 금대호를 만났을 때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부의 기억으로 금대호는 몇 차례 정당한 고서의 비무를 걸어왔다고 한다. 아마 그때에는 인면피구라든지 살수들이 자주 쓰는 역용을 써서 얼굴을 바꿨을 테다. 그리고 사부는 고서의 힘을 썼고, 잃었다.
그리고 지금 사부는, 아마도 내가 잃은 부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사부에게 물었다.
“미령이가 누군데요?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너…….”
사부는 목소리를 잊었는지 입만 벙긋거렸다. 아마도 말로 내뱉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 정도로 충격받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 통쾌하게 웃어 젖힌 것이다.
“푸하하! 놀랐죠? 내가 설마 미령이를 까먹겠어요? 내 사랑스런 여동생은 내 삶의 이유라고요. 그런데 사부, 얼굴이 너무, 우, 웃겨요!”
“예끼 요놈아!”
딱! 아야!
눈앞이 번쩍거린다. 마지막까지 사부에게 딱밤을 얻어맞으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 같다.
“냉큼 가거라!”
“헤헤, 네. 사부도 들어가세요. 항상 건강하시구요. 집법당주님도 들어가세요.”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는지 모른다. 사부는 한 그루 나무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계속해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부의 모습이 나무에 가려지고 점점 작아져 아주 안 보이게 될 때까지 나는 계속 손을 흔들며 사부를 돌아보았다.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도 사부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마나 더 그 자리에 있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겠다.
그곳에 있어야 하는 사람.
이제 앞으로 가야 하는 사람.
십 년간 정들었던 소림을 떠난다. 어쩐지 감상적이 되었다.
그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뱀술이 먹고 싶다고 졸라대던 사부에 못 이겨 뱀을 잡으러 갔다가, 내가 잡힐 뻔했던 기억.
난데없이 산삼을 캐자며 날 끌고 숭산을 헤집고 다녔다가 포악한 곰 무리를 만나 도망쳤던 기억.
꼴도 보기 싫은 제자의 모습이 안 보이는 놀라운 진법을 만들었다며 나에게 한껏 자랑하다 도리어 자기가 진에 갇혀 꺼내 달라던 사부.
그 하나하나의 추억들이, 점점 멀어져 간다.
“이해할 수가 없다.”
“으악, 깜짝이야!”
갑자기 흥취를 깨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란이 옆에 있었다.
“제발 인기척 좀 내라. 니가 무슨 귀신, 이구나. 아아, 그렇구나. 난 귀신과 함께 있었지. 그런데 뭘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건데?”
“일원은 사부와 제자의 관계에서 성립할 수 없는 일을 했다.”
그런 일이 뭘까 하고 고민해 봤는데, 사실 사부와 나는 그런 일을 꽤 자주 했던 것 같다. 사부와 제자. 그런 딱딱하기 만한 관계는 결코 아니었기에. 하지만 지금 란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는 짐작할 수 없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응? 무슨?”
“일원은 여동생을 기억하지 못하잖은가.”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내뱉지 못한 말이 입안을 맴돌다 목구멍 속으로 다시 꿀꺽 삼켜졌다.
입안이 썼다.
그 말대로 나는 미령이라는 내 여동생에 대해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애초에 나에게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하고 질문하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정말 있었다는 란의 말에 그렇게 알고 있기로 했다가 조금 전 사부와의 대화로 확신한 것이다.
나에게는 미령이라는 여동생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란의 혼이 들어 있는 인간의 육신이, 이 예쁜 소녀가 내 동생이라니.
나는 두 팔을 깍지껴 뒷목에 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사람은, 그래. 이런 거짓말은 당연한 거야. 사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걱정…… 잘 모르겠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란의 모습이 제법 귀엽게 보였다.
그야 넌 사람이 아니니까, 라는 말은 상처받을지도 몰라 삼켰다. 오늘따라 참 많은 말을 삼키고 있다. 이러다 내 위장에 바람만 가득차 버릴까 걱정이다.
날씨는 또 그렇게 좋았다. 초여름에 접어든 날씨는 어쩐지 가을과 비슷한 느낌이어서 괜히 감상적이 된다.
나는 미령이를 잃었다. 정말 잃은 건 아니고 기억이 소멸되었다. 그것이 고서의 힘을 사용한 대가. 잃게 되는 무엇. 나는 아마 그것이 무서웠지 않았을까.
란과 계약한 후 나는 란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아 냈다. 내가 고서의 힘을 사용하고 무엇을 잃든 간에 나에게 그 잃은 것을 꼭 말해 달라고. 물론 알게 된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는 요구였다. 내가 무엇을 잃었든 그걸 란이 뺏어 가는 것도 아니고, 알 턱이 없을 테니까.
다행히 란은 내가 잃은 것에 대해 알았고, 그래서 듣게 된 것이 미령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쩐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부는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막내 사제를 눈앞에서 죽인 살인범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내 삶의 이유라는 내 여동생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중요한 것만 앗아가 버린다, 그 대가라는 것은.
“저기, 란. 물어봐도 돼?”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고서의 힘을 사용하는 대가가 하필 ‘기억’인 거지? 너희들에게 인간의 ‘기억’이란 어떤 의미라도 있는 건가?”
“틀렸다. 우리는 인간의 기억에는 관심이 없어.”
뭐? 그렇다면 대체 왜 나나 사부의 기억을, 소중하거나 중요한 부분이 소멸된 건데.
잠시 머뭇거리던 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영기. 그게 필요하다.”
“영기?”
“그렇다. 인간은 음식을 섭취하면 살 수 있듯이 고서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어. 그것이 바로 영기. 영기를 받아 내는 과정에서 소실되는 기억의 파편은 부수적인 현상이지만, 관측하기는 좋다.”
“뭘?”
“한계. 더 이상 잃을 추억이 없다면 일원은 일원 자신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편하겠지.”
즉, 마인이 되어 버린다는 소리다. 어마어마한 이야기네. 방금 들은 말에 대한 의심은 조금도 가지 않아 이미 내가 겪었으니까.
“그럼 넌 너 살자고 나와 계약하자고 그렇게 보챘단 말이야? 보기보다 치사하다, 너.”
“일원. 원망하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선택은 네가 한 것이지 않나. 바람대로 여동생도 지켰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어쩐지 보기 좋게 넘어가 버린 것 같아 기분이 조금 그랬다.
“그런데 일원. 이제 어디를 가는 건가?”
“어디긴? 뒤바뀐 너와 내 여동생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러, 북경에.”
“나야 환영할 일이지만 일원은 여동생을 기억 못하잖아. 거기다 여동생이 쓴 일기를 봤지 않은가.”
떠올리기 싫은 일만 애써 떠올리게 만들어 주는 재주가 있다. 나의 고서는.
그 말대로 나는 여동생이 쓴 일기를 보았다. 정신이 깨어난 내게 파문이라는 선고를 내린 방장 스님은, 나에게 당시 사고 현장 주변에서 찾았다며 작은 책자를 내밀었다.
그것은 미령이가 쓴 일기였다. 상당 부분은 훼손되었지만 건재한 부분도 있었다.
무슨 현상인지 꼭 마음 쓰린 부분들만 건재했다.

***

나에게는 오라버니가 있다.
왜? 어째서? 나에게 가족은 이곳 중원상회의 식구들인데.
아버지, 어머니, 나를 귀여워해 주는 두 오라버니도 언니도.
내 가족은 이들이다. 절대 소림사에 있다는 그 남자가 아니야.
기분 나빠. 어째서 그런 남자가 내 오라버니여서, 아버지가 양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거야? 왜 이런 소외감을 느껴야 하는 거야? 억울해. 그런 남자,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아버지한테 혼났다. 모르겠어. 난 그런 오라버니 필요 없다고 말한 것밖에 없는데. 어차피 제대로 기억도 못해. 너무 어릴 때 헤어졌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날 귀여워해 주는 아버지가 내 뺨을 때리다니! 모든 게 그 남자 때문이야. 뭐가 날 위해 소림에 갇혀 있다는 거야? 웃기고 있어. 날 팔아넘기고 소림이라는 명문 정파에 들어간 거잖아!
싫다. 다 싫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십 년이나 못 본 오라버니를 보고 오라며 상행에 아버지가 등을 밀었다. 둘째 오라버니 주려고 정성스레 딴 내 자수를. 내 첫 작품을. 그 남자에게 줘야 한다.
싫지만 구석에 그 남자의 이름도 새겼다. 귀찮아서 향이에게 시켰다.
이 좁은 마차 안이 꼭 지옥 같아.

결정을 내렸어.
내 오라비라는 그 남자에게 이 일기를 줄 거야. 자수도 줄 거야.
그리고 말하겠어.
난 이렇게 살아왔고 행복한 내 인생에서 당신 같은 남자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내 인생에서 사라져 줘.

***

란은 내게 물었다.
“정말 여동생을 원래대로 돌릴 건가?”
“그럴 생각이야.”
“어째서지? 널 싫어하는 인간이다. 이렇게 된 걸 보면 인과응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내 여동생이잖아. 나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런 건 상관없는 거야.”
여전히 란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넌 다시 네 몸에 돌아갈 수 있는 거니까, 좋게 생각해.”
란은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다. 싱거운 녀석.
비록 쉽게 말하긴 했으나 나 역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란에게 들은 말로는 나는 여동생을 유복하게 키우기 위해 이곳에 와 갇혀 지냈다고 한다. 다른 속가제자들의 구타에도 견뎌 냈고 어떤 모진 대우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서와 계약을 하고 소림에서 파문당한 것도.
오로지 미령이라는 내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라니. 내가 다 눈물이 나려고 하네. 정작 여동생이라는 본인은 전혀 날 오라비로 생각지 않는데.
하지만 어쩌면 난 구제불능 얼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령이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
되돌아온 미령이가 나를 냉대해도 상관없고 환대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어차피 나는 미령이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중요한 건 틀어진 어떤 것을 바로 맞춰야 한다는 것일 테다.
“아무튼 란.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내 여행의 유일한 동료인 란은 연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숭산의 봄이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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