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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
황실을 둘러싼 권력 다툼



이방인 1권(1화)
제1화 소환(1)


평온하던 대륙 오메가하임은 3년 동안 지속된 가뭄으로 인해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었다.
기근으로 인해 엄청난 숫자의 난민들이 발생했고 폭동이 대륙을 뒤흔들면서 인간 세상은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혼란은 두 명의 영웅의 등장으로 잠잠해졌다.
기사 알버트 그레고리, 마법사 딜란, 두 사람은 엘프를 설득해 엘프의 대지인 카잔으로 난민들을 이끌고 가 그곳에 하나의 제국을 건설했다.
이렇게 탄생한 올란 제국은 그레고리 2세에 이르러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2대 70년의 세월, 올란 제국은 두 현명한 황제의 지도로 대륙 어느 왕조에 못지않은 강력하고 풍요로운 국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레고리 3세가 황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즉위 당시 그레고리 3세의 나이는 겨우 23세에 불과했다.
그레고리 3세의 즉위 당시, 2대 70년에 걸친 성장과 발전으로 올란 제국의 사람들은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의 꿈은 크고 원대한 법이었다.
그레고리 3세는 지금까지 내부의 발전과 안정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두 명의 황제와는 달리 그 시선을 제국 밖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혈기왕성한 젊은 황제의 야망, 그것은 인간 세상의 오직 하나뿐인 황제였다.
그것을 진정한 제국의 완성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이를 국가의 기치로 내걸었다.
오메가하임 대륙,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확실히 이를 꿈꾸었던 인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이룬 인간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아직 어떤 인간도 이루지 못한 꿈이기에 그레고리 3세는 이를 꿈꾸었고, 심지어 인간뿐만이 아니라 대륙에 숨 쉬는 모든 종족을 자신의 발아래 두겠다는 당찬 꿈까지 꾸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올란 제국의 건국사가 그런 그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이곳은 엘프의 대지, 약속의 땅 카잔이었다.
다시 말해 올란 제국의 모든 사람들의 뿌리가 이곳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모두가 다른 국가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미 70년의 세월이 흘렀기에 대부분의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곳이 고향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레고리 3세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고향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정한 고향의 주인은 바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떠났던 그들의 선조라고 주장했다.
이런 그레고리 3세의 주장이 2대 70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올란 제국의 사람들의 가슴속에 잠시 잠들어 있었던 발전의 욕구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런 그레고리 3세의 꿈을 단순한 꿈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에게는 그에 걸맞은 힘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신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용맹한 기사들, 신비한 힘을 가진 마법사들, 그리고 그들 휘하에 잘 훈련된 정예 병사들, 그레고리 3세는 이들이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레고리 3세는 과감하게 그 꿈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올란 제국의 가디언 왕국 침략이었다.

가디언 왕국은 지난 70여 년간 올란 제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대륙이 혼란에 빠졌던, 올란 제국 건설의 초창기에 가디언 왕국은 물심양면으로 올란 제국을 도와주었다. 이런 가디언 왕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올란 제국이 제대로 안정을 찾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계속된 양국의 친분 덕분에 서로가 서로간의 사정을 불을 보듯 뻔히 알고 있었다.
가디언 왕국은 왕성에는 한 명의 궁정 마법사와 기껏해야 몇 명의 기사들과 그들 휘하 3천의 병사들이 전부였다. 물론 각 지역의 영주들 밑에 일단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있었지만 이들을 소집한다고 할지라도 7천을 넘지 않는 병력이었다.
이는 단순히 수치상으로도 올란 제국의 전력의 10분지 1에 불과했다.
이것은 단순히 수적인 수치일 뿐 병력의 질 면에서도 가디언 왕국은 도저히 올란 제국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최초의 교전에서 반드시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이런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 3세는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기습으로 전쟁을 감행했다. 야심찬 젊은 황제는 그 첫걸음을 이렇게 배신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고, 배신은 오랜 친분을 한순간 옛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배신의 명분은 불필요한 희생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 속에 갑자기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가디언 왕국으로써는 이렇다 할 저항을 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올란 제국의 이런 부도덕에도 불구하고 시작은 충분히 좋아 보였다.
삽시간에 올란 제국의 깃발이 가디언 왕국의 곳곳에서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쟁이란 으레 그러하듯 파괴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가디언 왕국의 국토는 하루가 다르게 폐허로 변해 갔고, 이러한 파멸은 약소 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였다.
다급해진 가디언 왕국의 왕실은 황급히 주변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올란 제국의 경우에도 그러하듯 가디언 왕국은 이웃 국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때문에 내심 이웃 왕국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가디언 왕국의 기대는 그저 단순한 기대에 불과했다. 이웃 왕국이 보기에 이미 전쟁은 거의 끝난 상태였고, 이미 끝난 전쟁에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말이 전쟁이었지 실제로 그것은 전쟁도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 일방적인 학살, 거칠 것이 없이 맹렬하게 진군하는 올란 제국군의 그 힘찬 행보에 주변 국가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가디언 왕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승리를 확신한 그레고리 3세는 계속해서 각국에 사신을 보냈다.

사신이 가져간 서신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가디언 왕국의 32대 왕 이안은 은밀하게 대륙 정복을 꿈꿔 왔으며 그는 이를 위해 결코 해서는 안 될 마계의 마왕을 소환하려 했다. 이에 올란 제국은 이들의 음모를 사전에 간파하고 이를 막기 위해 부득이 전쟁을 치를 수밖에는 없었다.
앞으로 이들을 도우려는 어떠한 시도도 올란 제국은 그것을 악으로 간주할 것이며, 이에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세상에 천명하는 바이다.

서신의 논거는 다분히 협박을 담고 있었다.
또한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오만불손한 어조였다.
하지만 이 서신을 받아 든 주변 국가들은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안도하고 쾌재의 미소를 머금기까지 했다.
너무나 뻔뻔한 거짓말이었지만 그 대상이 자신은 아니었다.
더구나 고맙게도 그들에게 전쟁을 방관할 명분까지 주고 있지 않은가?
확실히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작금의 오메가하임 대륙을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이었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정의라는 것, 그것은 어차피 승자의 몫이었다.
전쟁 발발 칠 일 만에 올란 제국의 군대는 가디언 왕국을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올란 제국의 2만 병력이 가디언 왕국의 궁성을 완벽하게 포위했다.
고작 칠 일 만에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두 국가의 힘의 차이로만 설명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올란 제국의 배신이 얼마나 치밀하게 전개되었는지를 증명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디언 왕국의 천년 역사는 한순간 막을 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레고리 3세의 의도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했던가?
가디언 왕국의 왕성에서 제국의 군대를 기다리는 것은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가디언 왕국의 비장의 한 수였다.

천년 왕국 가디언에는 뛰어난 마법사가 한 명 존재하고 있었다.
왕성의 유일한 마법사이자 궁정 마법사인 헤론이었다.
헤론의 가문은 왕국의 천년 역사 속에서 꾸준히 왕국의 궁정 마법사 자리를 지켜 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헤론은 단연 역대 최고의 궁정 마법사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가디언 왕국의 비장의 한 수는 그런 헤론의 손에 의해서 준비되고 있었다.
적에게 왕궁이 포위되자 가디언 왕국의 32대 국왕인 이안은 황급히 궁정 마법사 헤론을 찾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다섯 명의 왕자와 다섯 명의 공주를 대동하고 왕궁의 지하로 향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왕궁의 지하에 있는 비밀의 방이었다.
궁성 지하에 위치한 비밀의 방은 헤론 가문의 모든 것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두가 비밀의 방에 들어서자 궁정 마법사 헤론이 착잡한 표정으로 이안 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이안 왕의 얼굴에는 비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전하, 진정 그들의 거짓을 진실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궁정 마법사 헤론의 말에 이안 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꽉 깨문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안 왕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보시오, 헤론. 저들이 도륙한 짐의 국민들을…… 대체 어디에 왕국의 미래가 남아 있단 말이오?”
절규하는 이안 왕에게 헤론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순간 이안 왕은 결연한 눈빛으로 헤론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이미 그의 결심이 확고하게 굳어졌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 왕국의 미래는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소. 아니, 설사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오욕의 역사, 짐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장렬한 죽음을 선택하겠소.”
결연한 이안 왕의 말에 헤론이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전하, 지금 그들의 말처럼 우리가 마왕을 소환한다면 그것은 왕국뿐만 아니라 대륙의 미래가 사라지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큭큭큭, 큭큭큭…….”
실성이라도 한 것일까?
헤론의 말에 이안 왕은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번지고 있었고, 그 미소 속에는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돌연 그 미소마저 사라지면서 이안 왕이 헤론을 향해 단언하듯 말했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소.”
이런 이안 왕의 말에 헤론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헤론의 낙심한 표정에 이안 왕이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헤론, 안타깝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구할 자비는 없소. 아마 그들은 우리 중 누구의 생존도 원하지 않을 것이오. 대륙의 미래라…… 흥, 그따위 개나 물어 가라고 하시오. 내가 죽고 우리 아이들이 죽고 우리 국민들이 모두 죽은 뒤의 대륙의 미래가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오.”
말하는 동안 이안 왕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분노가 극에 다다른 듯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왕 일이 이 지경이 된 것, 설사 죽을 때 죽더라도 곱게 혼자 죽을 수는 없지. 암, 혼자 죽을 수는 없고말고.”
이안 왕은 마치 스스로에게 재삼 다짐하듯 말했다.
“내 저들에게, 저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잘못을 범했는지를 모두의 죽음으로써 반드시 알려 주고야 말겠소. 무능한 왕을 따른 먼저 간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저들에게…….”
그러고는 마치 하늘에 맹세라도 하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몸의 떨림이 멈추고 다시 그의 시선이 헤론에게 옮겨졌다. 순간 이안은 그야말로 당당한 왕의 모습이었다.
“가디언 왕국의 32대 왕 이안이 왕국의 궁정 마법사 헤론에게 명하오.”
이안 왕의 말에 헤론이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대는 왕국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금지된 마법, 어둠의 마법 소환을 실행하시오.”
그와 동시에 이안 왕은 따라온 다섯 명의 왕자와 다섯 명의 공주를 쓱 둘러보았다.
“그 대가로 짐은 여기 짐의 혈족 열 명을 제물로 바치니 이로써 그대와 그대 가문의 마지막 충성을 증명하시오.”
왕의 말에 왕자와 공주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제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그들 역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 하나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죽음이라는 것을, 아니 어쩌면 그들에게는 죽음보다 더 가혹한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저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싶었다.
헤론이 다시 한 번 간절한 표정으로 이안 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안 왕의 눈에는 여전히 그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결심을 끝낸 듯 이제는 입가에 살포시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헤론은 마침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바닥에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가디언 왕국의 궁정 마법사 헤론, 왕국이 멸망의 위기에 처한 지금 국왕으로부터 봉인 된 마법 시행을 명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레 한쪽 옆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