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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2화)
제1화 소환(2)
그곳에는 한 개의 탁자 위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헤론은 선 채로 그 책에 천천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비밀의 방을 가득 메운 수만 권의 책들, 그 모두가 마법에 관련된 책은 아니었다.
그중 절반은 왕국의 역사에 관한 책들이었다.
가디언 왕국의 궁정 마법사의 또 다른 역할, 그것은 왕국의 역사를 글로써 후세에 남기는 것이었다. 헤론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듯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왕국의 마지막 역사가 책 속에 담기자, 헤론은 가만히 자신의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주문을 웅얼거리면서 지팡이로 바닥에 무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곳곳에 이안 왕으로서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마법진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헤론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마침내 헤론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헤론은 한쪽 옆의 서재 깊숙한 곳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그 책 속에는 헤론이 그린 마법진의 도면이 그려져 있었고, 헤론은 다시 한 시간여를 마법서의 도면과 마법진을 면밀하게 대조하기 시작했다.
다시 몇 번의 수정이 이어졌고, 마침내 지팡이를 든 그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레 왕자와 공주의 옆으로 다가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헤론은 한 왕자에게 공손히 손을 내밀었고, 왕자는 그의 손에 이끌려 마법진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한 명씩, 한 명씩 왕자와 공주들은 헤론의 손에 이끌려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모두의 배치가 끝난 듯 헤론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서재의 벽면으로 다가갔다.
벽을 쓰다듬으면서 헤론이 무언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duffufk ckaRo.”
헤론의 주문에 벽에서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하나의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헤론이 금고를 열자 그곳에서 가죽으로 싸인 한 개의 꾸러미가 모습을 나타냈다. 헤론은 그 꾸러미를 조심스럽게 밖으로 꺼냈다.
꾸러미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죽을 풀어헤치자 날카로운 10개의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검의 검날에는 악마의 흉상이 그려져 있었지만 설사 그 악마의 흉상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단검은 충분히 소름 끼치도록 검붉은 빛깔을 밖으로 토해 내고 있었다.
헤론은 그 10개의 단검을 왕자와 공주에게 각각 하나씩 나눠 주었다.
왕자와 공주가 단검을 하나씩 손에 쥐자 마치 제 임무를 모두 끝마쳤다는 듯 단검을 감싸고 있었던 가죽이 불꽃으로 화했다. 그와 동시에 왕자와 공주들은 알 수 없는 전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헤론이 힐끔 이안 왕을 쳐다보았다.
자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언뜻언뜻 광기가 내비치고 있었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를 비밀의 방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벌써 근처까지 치고 내려왔는가?’
아마도 적들이 지하의 비밀의 방 근처까지 밀고 내려온 듯했다.
그리고 물론 그들의 목표는 이안 왕과 헤론, 그리고 사라진 왕자들과 공주들일 것이다.
위기가 다가오자 이안이 다급한 시선으로 헤론을 채근하듯 바라보았다.
헤론이 그런 이안의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dkfldkflehdehd tmfltmflehdehd.”
헤론의 주문과 동시에 서서히 검붉은 빛이 마법진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그 빛에 취한 듯 왕자들과 공주들의 눈빛이 몽롱해졌고, 검을 든 그들의 손이 점차 그들의 머리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법진 주변을 밝히던 검붉은 빛이 점차 짙어지는가 싶더니 한순간 왕자들과 공주들의 손에 쥔 검으로 모여들었다. 동시에 왕자들과 공주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정수리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단검이 정수리를 관통했음에도 고통은 없는 듯했다.
그리고 여전히 몽롱한 눈빛으로 천천히 자신들의 정수리를 관통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의 시선은 단검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단검이 내뿜는 검붉은 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내 그들의 정수리에서 피가 밖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피는 그들의 시선을 좇아 단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단검은 그런 그들의 피를 머금고 더더욱 짙은 검붉은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순간 단검은 자신이 머금었던 검붉은 빛을 마치 피를 뿌리듯 허공으로 토해 내기 시작했다.
단검이 뿜어낸 검붉은 빛이 사방으로 피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라 하나의 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는 이안 왕의 눈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헤론은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는 듯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상태였고, 그의 백색의 로브는 검붉게 변해 가고 있었다.
헤론의 입에서 갑자기 고통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으아∼”
헤론의 외침과 동시에 검붉은 빛무리는 마치 비를 뿌리는 먹구름처럼 머금었던 피를 밖으로 토해 내기 시작했다.
일순간 마법진이 그려진 지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원형의 검붉은 빛무리가 토해 낸 피는 마법진의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고, 그 핏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꿈틀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sjgmlemfdl skfmf dlrhtdmfh dlsehgoTsmsrk?”
마법진 위로 형체를 드러낸 존재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이안과 헤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안 왕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궁정 마법사 헤론은 이를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왕이 자신의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성공했는가?’
이렇듯 이안 왕은 성공을 확신했고, 상대가 마왕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안 왕의 얼굴에 광기가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왔다.
“위대한 어둠의 마왕이시여, 약속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헤론이 이렇게 외쳤으나 상대는 그저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상대의 몸에서 마기가 걷히는가 싶더니 잠깐 그 본연의 모습이 드러났다. 드러난 상대를 확인한 이안 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
뜻밖에도 드러난 상대의 모습은 인간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런 상대의 모습에 궁정 마법사 헤론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헤론은 그가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조금 전 보여 주었던 엄청난 마기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기에 마왕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시 상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헤론을 바라보았다.
“rmeork dnjsgksms rjtdms andjtdlsrk?”
이런 상대의 질문에 비로소 헤론은 안도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보지도, 시도된 적도 없는 금지된 마법, 그 성공 여부를 딱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마법서에 의하면 소환된 마왕의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이어야 했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질문이 나오자 헤론은 자신의 소환 마법이 성공했음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이안 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이안 왕의 의사를 재차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안 왕 역시 그런 헤론의 눈빛에서 그가 묻는 질문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안 왕이 편안한 표정으로 헤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 안에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켜 주시오.”
상대는 이안 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헤론이 이를 통역 마법을 통해서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순간 상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끔찍한 악마의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고 이안 왕은 오히려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반면 헤론은 표정은 다소 착잡해 보였다.
이로써 오랜 세월 왕실의 궁정 마법사로서 그의 모든 임무는 끝이 났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과연 자신이 한 일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인지는 의문이었고, 이런 갈등이 그를 착잡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dirthrdms wlzuwlf rjtdlek.”
상대는 이렇게 말함과 동시에 천천히 그의 손을 이안 왕과 헤론을 향해 내밀었다.
강렬한 힘이 이안 왕과 헤론을 끌어당겼고, 두 사람은 굳이 이 힘에 반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 힘에 몸을 맡겼다. 한순간 몸 안의 모든 것이 상대의 손끝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두 사람을 감쌌다.
‘완전한 소멸이란 이런 것일까?’
그런 느낌이 두 사람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 느낌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몸은 백골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왕은 천천히 자신의 등에 매달린 마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마치 감상이라도 하는 듯 자신의 검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웅∼ 웅∼ 웅∼
검이 주인의 부름에 화답하듯 검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마치 앞으로 다가올 피의 제전을 예고하는 듯했다.
이내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의 일 검에 석실의 문이 부서지고, 다시 일 검에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달려들던 병사들이 두 조각의 고깃덩어리로 화했다. 그리고 그가 한 발짝씩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그의 검이 검붉은 빛을 번쩍였다. 그리고 그 빛이 번쩍이는 순간 사방으로 피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지하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헤론의 마법진에서 또다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조금 전 인간의 형체를 한 존재보다 더 음산한 눈빛을 번뜩였다.
“대체 저놈은 뭐지?”
마법진에서 새로이 등장한 존재, 그 역시도 먼저 간 마왕(?)의 뒤를 쫓아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지하에서 시작된 굉음, 그 굉음은 빠르게 지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무적을 자랑하던 올란 제국의 병사들이 튕기듯 지상으로 날아올랐다.
지상으로 날아오른 그들의 몸은 피를 뿌리며 여지없이 두 조각으로 분해되어 있었다.
그들의 시체를 쫓아 모습을 드러낸 붉은 존재, 이를 확인한 그레고리 3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아니, 그를 대하는 모든 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온몸에 피를 두르고, 한껏 강렬한 기운을 외부로 뿜어내는 존재,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한눈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그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마왕 현신, 바로 그 공포의 현장이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말들이었다.
말들은 미친 듯이 포효하며 광란을 일으켰고, 그 말에 타고 있던 기사들이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말들은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몇몇 기사들이 억지로 말고삐를 잡고 말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은 기사들 역시 계속해서 버둥거리는 말들의 움직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두가 말에서 내려야만 했다.
말에서 떨어진 혹은 말에서 내린 모든 기사들과 마법사들, 그리고 그들의 전면에 선 올란 제국 최강의 열 명의 기사와 열 명의 백색의 마법사들 모두가 처음 느낀 감정은 바로 공포였다.
말에서 떨어진 그레고리 3세의 얼굴에도 역시 두려움이 가득했다.
“서, 서, 서, 설마 저, 저, 저, 저것이 마, 마왕이란 말인가?”
그레고리 3세는 이렇게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 어디에도 지금까지 그토록 당당하던 황제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는 단지 23세의 한 젊은이, 그저 무력하고 어리석은 한 젊은이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젊은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황급히 열 명의 기사와 열 명의 백색의 마법사가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이미 병사들은 겁에 질려 하나둘씩 달아나기 시작했다.
몇몇 기사들이 이런 병사들을 제지했지만 용맹한 제국의 병사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마왕은 달아나는 병사들조차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이 성벽을 넘기도 전에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그들을 빨아들였고, 그 힘에 이끌려 바닥으로 떨어진 병사들은 이내 백골이 되었다. 순간 황제를 호위하던 열 명의 기사들과 열 명의 마법사들이 하나가 되어 거대한 오오라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이에 화답하듯 마왕의 음산한 목소리가 주위를 음침하게 울렸다.
“dlrhtdp tnatnlsms rm djEjsrjtemfeh tkfdkskawl ahtgkflfk.”
동시에 거대한 암흑의 힘이 주위의 공기를 팽팽하게 팽창시키기 시작했다.
서둘러 백색의 마법사 중의 최고의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미 상대가 단순한 존재가 아님을 알았고, 단순한 마법으로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는 자신과 동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진을 지상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가 그 마법진을 완성할 시간을 벌기 위해 상대를 경계하고 있었다.
마법진을 그리는 사람도, 상대를 경계하는 사람도,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