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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3화)
제1화 소환(3)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었을까?
상대는 그런 그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의 상대를 대신해서 그의 뒤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며 외쳤다.
“어리석은 놈, 저 늙은 마법사가 지금 결계를 치려 하잖아.”
갑작스럽게 등장한 검은 그림자에 모두가 경악했다.
지금은 눈앞의 상대조차 버거운 상황, 더구나 새로이 등장한 존재는 자신들의 의도까지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당혹스러움과 놀라움, 동시에 사람들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는가?’
더구나 새로이 등장한, 조금 전 마왕의 동료로 생각되는 그의 말투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그가 사람들의 눈앞에 선 상대보다 낮은 위치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사람들의 착각에 불과했다.
최초에 등장한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검이 검은 기운을 폭발시켰다.
“뭐냐, 이건.”
당황한 것은 뒤늦게 나타난 검은 기운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마검이 뿜어낸 강렬한 기운에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한 듯 그가 피한 자리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그것은 꿈틀꿈틀 계속해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먼저 등장했던 마왕이 그 꿈틀거리는 것에 다가가 그것을 발로 잘근잘근 밟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결계의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그 마법진 속에서 백색의 기운이 은은하게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순간, 마왕의 시선이 다시 마법사와 황제, 그리고 기사들의 방향으로 돌아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법진으로 향했다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어찌 되었건 뜻밖의 존재 덕분에 결계는 무사히 완성되었다.
기사들의 열 개의 검과 마법사들의 열 개의 지팡이가 연이어 성호를 그리면서 마법진 위를 수놓았고, 동시에 거대한 백색의 기운이 주변을 찬연하게 빛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마왕의 거대한 암흑의 기운을 향해 달려들었고, 두 명의 마왕의 몸에서도 검붉은 기운이 동시에 밖으로 뻗어 나왔다.
뒤이어 궁성 전체가 거대한 굉음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누구도 그 여파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올란 제국의 자랑이었던 1만의 병사들도, 제국의 위대한 10인의 기사도, 위대한 10인의 백색의 마법사도, 그리고 황제 그레고리 3세마저도 그곳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누구의 승리도, 누구의 패배라고도 말할 수 없는 종결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올란 제국에는 새로운 황제 그레고리 4세가 즉위했다.
그레고리 4세가 즉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저주받은 가디언 왕국의 궁성을 외부와 완벽하게 격리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한 번의 전쟁으로 올란 제국은 예전의 올란 제국이 아니었다.
새로이 즉위한 그레고리 4세의 나이는 고작 5살이었고, 그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펼치는 황후 안드레아마저도 고작 25세의 젊은 미망인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올란 제국을 기다리는 것은 쇠퇴의 일로였다.
그리고 실제로 아무것도 끝난 것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적어도 당시에는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제2화 부러진 검(1)


25세의 미망인 안드레아, 그녀에게 섭정의 무게는 너무나 버거웠다.
더욱이 지금은 제국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시기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가디언 왕국과의 전쟁의 여파는 실로 심각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주력군을 그곳에서 잃어버린 올란 제국은 이제 반대로 다른 국가들의 침략을 걱정해야 할 형편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권력은 황제를 대신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 강력한 권력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어린 아들, 이름뿐인 황제를 지켜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확실히 그것조차도 그녀에게는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전쟁의 패배 이후 전쟁을 주도한 황실의 권위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다.
더구나 권력을 쥔 황후마저도 정치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어린 여인이고 보니 대신들의 눈에 그녀가 미더워 보일 리가 없었다.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는 혼란한 정국을 더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때문에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대신들은 자신들 사이의 갈등은 물론 황후의 의견에도 곧잘 반대했고, 그런 대신들의 반대는 황후에게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까지 인식되고 있었다. 결국 황후는 누구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 것인지, 그야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막막한 지경에 내몰리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그녀에게 접근한 것이 아린이라는 야심찬 젊은 백작이었다.
그의 외모는 준수했고, 그의 외모만큼이나 부드러운 매너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위협하는 듯 보이는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항상 부드러운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해 주었고, 언제나 그녀의 의견에 공감하며 그녀를 지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한 무엇보다도 황후가 그를 신뢰하도록 만든 계기는 그의 빛나는(?) 외교적인 식견이었다. 아린 백작의 외교적인 시각은 완벽하게 황후와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후 안드레아에게 있어서 그녀와 아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외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이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여타 대신들은 그런 그녀의 의견에 쉽게 따라 주지 않았다. 아니, 결코 따라서도, 따를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후는 자연히 그런 아린 백작을 신뢰하며 의지하기 시작했고,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밖에는 없었다.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아린 백작을 전권대사로 하여 올란 제국을 위협하는 다른 나라와의 협상을 벌였던 것이다. 그 결과 안드레아 황후의 생각처럼 아린 백작은 그 일을 훌륭하게(?) 매듭지었다.
황후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아린 백작이 다른 나라와의 평화조약을 무사히 체결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올란 제국의 많은 영토가 이웃 나라의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제국의 영토와 맞바꾼 몇 장의 종이 쪼가리, 황후는 이런 어이없는 결과에 만족하며 아린 백작에게 아낌없는 신뢰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아린은 백작에서 공작으로…… 황후의 연인으로…….
아린 공작의 폭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또다시 대지는 황폐해지고, 지나친 세율은 국민들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점차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거리에는 굶어 죽는 아이들이 넘쳐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는 만큼 황실의 재정은 넉넉해졌고, 황실은 평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이에 염증을 느낀 대신들은 하나둘씩 황실에 등을 돌리고 떠나기 시작했고, 그들이 떠난 빈자리가 아린 공작의 심복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황실은 아린 공작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완벽하게 황실을 장악한 아린 공작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바로 전쟁 후 격리시켰던 저주받은 땅, 가디언 왕국의 궁성이었다.
그곳은 제국 최고의 기사 10인과 최고의 마법사 10인이 죽음으로 완성시킨 빛의 결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린 공작은 이 결계의 해체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린 공작은 이 작업을 시작하면서 황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는 제국을 이끌었던 10명의 기사와 10명의 마법사들의 유물이 잠자고 있습니다. 이를 발굴한다면 다시 제국을 일으킬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황후는 이런 아린 공작의 말을 그대로 믿었고, 계속해서 자신과 아들의, 그리고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결계를 해체하기 위해서 수많은 마법사들이 초빙되었다.
그리고 주변의 땅을 파헤치기 위해 수많은 국민들이 동원되었다.
이렇게 땅을 파는 것이 제국의 국책이 되었고, 그곳에 천문학적인 자금과 인력이 동원되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쓸데없는 땅파기만이 계속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런 와중에 뜻밖의 인물이 제국으로 돌아왔다.
제국의 궁정 마법사 딜란이 돌아온 것이었다.
갑작스런 그의 귀환은 아린 공작에게는 그야말로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누구였던가?
그는 초대 황제 그레고리 1세와 함께 올란 제국을 건설했던 마법사였다.
제국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자 홀연히 제국을 떠났던 마법사, 누구도 그를 일컬어 단순히 제국의 궁정 마법사라고 칭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칭할 때면 언제나 그의 호칭 앞에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전설의 마법사 딜란, 그것은 비단 제국 내에서만 불리는 호칭이 아니었다.
대륙에 숨 쉬는 모든 인간들에게 그는 대륙의 위기를 종식시킨 위대한 마법사였고, 그런 그에게 존경의 뜻을 담아 모두가 전설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등장은 결코 아린 공작이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아린 공작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히 드러내 놓고 그를 제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제국의 영역으로 들어온 그의 발길이 황궁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발굴 작업이 지지부진해진 과거 가디언 왕국의 궁성이었다.
딜란의 등장과 동시에 지금까지 아린 공작이 주도했던 발굴 작업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린 공작은 굳이 이런 움직임을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딜란이 나서는 것을 반기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를 딜란이 주도하기 시작하자 5년 동안 온갖 노력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결계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해체되고 말았다.
그렇게 마침내 결계로 막혀 있었던 가디언 왕국의 궁성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궁성 곳곳에는 당시 격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죽어 간 사람들의 유골, 그리고 그 사람들의 유물이 5년의 세월의 풍상 속에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비록 결계의 내부라고는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딜란의 손에 발굴된 유물과 유골은 고스란히 황궁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옮겨진 유물들, 그 유물들의 가치는 아린 공작의 주장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그저 죽은 자들의 물건일 뿐, 제국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그 어떤 힘도 들어 있지 않았다. 녹슨 보검과 녹슨 지팡이, 그 이상의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유물과 유골이 발굴되자 발굴 작업에 대한 지원은 거기서 멈췄다.
하지만 딜란은 여전히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목표는 이런 유물과 유골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있는 듯했다.
발굴이 끝났음에도 딜란이 황궁으로 향하지 않는 것은 아린 공작에게도 그야말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5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아린 공작의 그에 대한 경계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무관심의 5년, 그 5년의 시간 동안 딜란은 가디언 왕국의 궁성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사소한 흔적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는 왕성의 각방을 하나하나 자세히 조사하고 있었다.
각방에 남아 있는 먼지가 자욱한 책들은 물론, 그곳에 남아 있는 모든 물건들이 한 번씩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더불어 올란 제국의 황성으로 옮겨진 과거 제국군의 유골과는 달리 매정하게 이곳에 남겨진 가디언 왕국 궁성의 사람들의 유골들 역시 그의 손으로 모두 매장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궁성 지하의 비밀의 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그의 목표는 바로 이것을 찾는 것인 듯했다.
1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비밀의 방에는 당시의 참상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바닥에 적힌 알 수 없는 마법진의 흔적, 천장을 바라보는 열 구의 해골들, 그리고 열 구의 해골들과는 달리 그저 바닥에 누워 있는 두 구의 해골, 최초 열 구의 해골 옆 바닥을 뒹구는 10개의 단검, 이를 확인한 딜란이 돌연 몸을 부르르 떨었다.
1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은은하게 감도는 마기, 그 마기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딜란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이내 딜란의 시선이 탁자 위에 펼쳐진 한 권의 책에 멈췄다.
딜란은 조심스럽게 책의 먼지를 제거했다.
그것은 헤론이 마지막 순간 글을 남겼던 바로 그 역사서였다. 헤론의 글을 읽은 딜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진정 그의 말대로 마왕이 부활했단 말인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딜란은 다시 한 번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기와 해골 그리고 단검, 그 이상 아무것도 그 자리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설마 결계는 실패한 것인가?”
5년 동안의 발굴, 아니 조사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만약 결계가 성공했다면 마왕은 결계 속에서 생을 마감했어야 했다.
그러나 결계 속에서 마왕의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책에는 마왕의 부활이 적혀 있었다.
책대로 마왕의 부활이 확실하다면, 그리고 결계의 실패로 마왕이 살아서 밖으로 나갔다면 세상은 지금쯤 커다란 재앙에 휩싸여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껏 세상은 조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상은 너무나 조용했다.
대륙 어디에도 마왕으로 인한 재앙의 징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딜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말했다.
“허면 대체 마왕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천천히 열 구의 해골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바로 마법진의 중심이기도 했다.
“tndrmflekdekd tndekdekd tnrntnrnekdekd tndekdekd.”
주문과 동시에 점차 그의 얼굴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이내 그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는가 싶더니 검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곳곳에 쓰러지는 병사들, 무언가에 튕겨 허공으로 날아간 병사들, 그리고 거대한 백색의 광체와 검은 그림자, 두려움, 공포, 경악, 혼돈…….
“으아아아악…….”
딜란은 갑작스레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몸을 뉘었다.
마치 간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바닥을 뒹굴면서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의식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