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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4화)
제2화 부러진 검(2)
한 시간여가 지났을까?
딜란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미친 듯이 혼자서 발작하고 혼자서 쓰러지는 그의 모습, 아마도 누군가 그를 보았다면 실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딜란은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상념이 그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딜란은 조심스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것을 확인했다.
부러진 한 자루의 검, 딜란은 조심스레 검을 손에 들었다.
천천히 검을 덮은 먼지를 털어 내자 검이 검신을 드러내며 섬뜩한 마기를 뿜어냈다.
딜란은 검을 들고 다시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부러진 검의 나머지 부분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부러진 검, 딜란은 그것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두려움, 공포, 경악, 혼돈……. 대체 마왕은 무엇을 본 것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법진 위에서의 추적 마법, 그것은 딜란이 마왕의 눈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마왕의 눈을 통해서 딜란은 마왕의 감정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마왕의 감정, 그것은 도무지 마왕이 느꼈다고 생각하기에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 단어들이었다.
딜란은 다시 한 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10년의 세월 때문인가?
더구나 사방이 탁 트인 공간에서 더 이상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순간 딜란은 그의 손에 들린 부러진 검이 내뿜는 스산한 기운을 느꼈다.
딜란은 조심스럽게 품 안에서 천을 꺼내 검을 감쌌다. 그리고 그 검을 다시 자신의 품에 소중이 갈무리했다.
그렇게 딜란의 가디언 왕국 유적의 조사는 모두 끝이 났다.
딜란은 그 길로 황궁으로 향했다. 물론 그 길은 황제를 위한 길이 아니었다.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문점, 그것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황궁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황궁으로 가는 동안 과거의 상념이 딜란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는 젊은 그레고리 1세와 함께 대륙의 많은 사람들을 이곳 카잔으로 이끌었다.
계속되는 인류의 팽창, 그것은 언제나 세상에 위험이 되어 왔다.
딜란이 이런 현상을 내심 두려워하던 차에 가뭄과 기근이 전 대륙을 뒤덮었다.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고, 폭동과 살인, 약탈이 끊이지 않았으며 도시는 파괴되고 인간의 질서는 무너져 갔다.
그것은 비단 인간의 문제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인류의 불균형, 그것이 결국 대륙 전체의 불균형과 파괴를 가져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언뜻 떠오르는 방법은 전쟁이었다.
이 혼란의 끝이 반드시 전쟁으로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인류의 숫자를 자연스럽게 줄여 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도 새로운 균형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딜란은 그것이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인류가 살아갈 새로운 풍요로운 장소였다.
그 또한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 또한 아니었다. 그는 그 길로 엘프의 수장 카림을 찾았다.
대륙의 균형을 위해 엘프에게 그들의 땅을 양보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약속의 땅 카잔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올란 제국이었다.
그레고리 1세를 앞세워 많은 사람들과 함께 대지에 씨를 뿌렸고, 그렇게 제국의 기틀은 다져졌다. 제국은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제국의 안정은 곧 대륙의 안정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대륙에는 다시 새로운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자 그는 미련 없이 제국을 떠났다.
제국의 궁정 마법사라는 지위도, 세상의 부귀영화도 그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주어진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일에 만족했고, 유유자적 세월을 즐겼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건대 자신이 세상의 일에 관여한 것이 그다지 현명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최초의 후회는 바로 5년 전이었다.
5년 전, 그는 엘프의 대지 위아낭에서 카림을 만났다.
엘프의 대지를 인간에게 양보했던 엘프의 수장 카림, 그와는 근 70여 년 만의 재회였다.
하지만 과거의 친구 카림은 그와의 재회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바로 올란 제국의 가디언 왕국 침략 때문이었다.
한 개의 대륙에 존재하는 너무나 많은 인간, 그리고 끊이지 않는 욕망. 전쟁은 그런 인간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을 통한 인류의 균형, 비록 인간의 희생은 있을지언정 결국에는 새로운 균형을 이뤄 냈기에, 어찌 보면 엘프에게 있어서 단순히 인간의 전쟁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 딜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카림 역시도 전쟁 그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니었다.
딜란과 만난 카림은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양보로 인간에게 내어 준 거대한 땅덩어리, 그곳에서 일어난 인간의 제국이 거대한 악을 소환한 것 때문이었다.
대지의 균형을 중시하는 엘프는 이 땅에 등장한 거대한 악을 가장 먼저 인식했고, 그렇게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은 선택, 마왕의 강림, 카림은 그것에 분노하여 맹렬하게 딜란을 비난했다.
‘그때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비록 인간의 희생은 있었을지언정 작금의 위기는 없었을 것인데…….’라고…….
딜란은 아무런 반박의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카림의 분노를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비난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엘프의 대지를 양보해 준 엘프의 수장, 엘프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영역을 그렇게 쉽게 양보할 만큼 나약한 종족은 아니었다.
자신의 끈질긴 설득, 그 설득 때문에 양보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대륙의 새로운 균형을 위해, 모든 생명체들의 새로운 균형을 위해서라고 얼마나 입에서 침을 튀기며 역설했던가?
하지만 그 결과로 돌아온 것이 거대한 악의 등장이었다.
카림은 딜란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소환된 악은 대륙을 삼킬 만큼 강성하오, 위대한 당신의 힘으로도 그 악을 결코 쉽게 잠재울 수 없을 것이오.”
그렇게 딜란은 카림에게서 대륙의 위기를 경고받았다.
더불어 카림은 딜란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당신이 건설한 제국으로 인해 발생한 대륙의 위기, 그것을 당신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길로 딜란은 위아낭에서 올란 제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올란 제국으로 향하는 동안 딜란은 내심 카림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지의 신 아이모의 축복을 받은 엘프, 그들의 위기 감지 능력은 대륙의 그 어떤 생명체들보다 뛰어났다.
가디언 왕국에서 발견한 빛의 결계, 그것만으로도 딜란은 카림의 말이 사실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올란 제국의 10명의 마법사들, 그들은 다름 아닌 자신의 제자들이었고, 그들이 펼친 결계는 생명을 도외시한 그들의 혼신의 힘이 담겨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디언 왕궁을 조사하던 딜란은 그 ‘혹시나’가 ‘역시나’였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뚜렷이 남아 있는 인간의 손에 의해 소환된 마왕의 흔적. 헌데 그곳에서 발견된 것은 단지 그 흔적, 그것이 전부였다.
또다시 의문이 시작되었다.
마왕 부활 10년, 대체 마왕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륙 전체는 너무나 고요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인가?
결계는 분명 그 무엇도 구속하지 못했다.
대체 마왕은 어디로 갔는가?
무엇보다도 의문스러운 것은 바로 마왕의 공포였다.
추적 마법을 통해 느낀 마왕의 공포, 그 실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딜란이 생각건대 마왕은 바로 그 공포의 실체 때문에 어쩌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 실체는 어째서 아직 침묵하고 있는가?
마왕조차 두려워하는 그 존재, 그 존재는 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가?
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렇듯 제어하고 있는 것인가?
유일한 흔적은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부러진 검이 전부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가슴에 품고 있는 부러진 검을 움켜쥐었다.
천으로 둘러싸인 검은 마치 그런 그의 마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그의 손을 통해 은은한 마기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황궁에서는 뜻밖의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황궁에 도착한 그를 맞이한 것은 황제가 아닌 아린 공작이었다.
딜란의 이동을 보고받은 아린 공작은 황궁의 성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아린 공작을 확인한 딜란은 그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이렇게 딜란은 자신을 마중 나온 아린 공작을 무시한 채 서둘러 황제부터 찾았다.
아무런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황제,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이룩한 제국의 황제였기에 딜란은 그런 황제에게만은 나름대로 예를 갖추고 싶었다.
이런 딜란의 무례한 태도에 아린 공작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불쾌함을 참아내며 공손히 딜란을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침전에 계십니다.”
아린 공작의 말에 딜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각에 침전에?”
지금은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한낮이었다.
한창 뛰어다녀야 할 나이의 황제가 침전에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낮잠이라도 주무시는가?”
딜란의 말에 아린 공작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것이, 폐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지라.”
아린 공작의 말에 딜란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지금 폐하께서 병환 중이시란 말인가?”
딜란의 말에 아린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아린 공작을 바라보는 딜란의 표정이 더욱더 묘하게 일그러졌다.
고작 한 달 뒤면 황제의 15번째 생일이었다.
그것은 곧 황제가 직접 정사를 운영하는, 이른바 친정을 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친정이 고작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상황, 하필이면 이런 때에 황제가 병에 걸렸다는 것, 거기에는 왠지 짙은 음모의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5년 전 딜란이 처음 제국에 도착할 당시, 어린 황제는 발굴 작업을 격려차 직접 딜란을 만나기 위해 가디언 왕국의 궁성을 찾은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분명 건강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소식통을 통해 황제가 건강하다는 소식을 접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확실히 이상하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린 공작의 안내로 황제의 침전으로 향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던 딜란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아린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린이라고 했는가?”
아린 공작은 껄끄러운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딜란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딜란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내 부탁 하나 해도 되겠는가?”
아린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부탁이라니요. 당치 않으십니다. 분부만 내리십시오.”
딜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연이어 딜란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금일 이후 폐하의 침전에는 나를 제외한 누구의 출입도 삼가도록 해 주게. 내 친히 폐하를 치료해야겠네.”
딜란의 말에 아린 공작이 조금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면 그곳을 지키는 근위병들은?”
딜란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도 당분간은 성 주변의 수비로 돌려 주시게.”
근위병을 외곽으로 돌리라는 딜란의 요청에 아린 공작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심지어 살짝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딜란 님.”
그렇게 미소 짓는 아린 공작의 모습에 딜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딜란은 이내 그를 무시하고 곧장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