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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5화)
제2화 부러진 검(3)
딜란을 향한 아린 공작의 미소,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황제가 급작스레 병든 지금, 조금 전 딜란이 그를 의심한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지어 그의 심복들까지 의심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로 아린 공작이 어린 황제를 제거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황제를 제거하기 위해 몇 번을 시도했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기회마저도 좀처럼 생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어린 황제가 병에 걸렸다. 이것은 아린 공작으로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토록 건강하던 황제가 갑자기 왜?
그리고 더욱더 그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황제의 칭병과 동시에 자신을 향하는 매서운 시선들, 차라리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당당히 권력을 차지하고자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대신해서 누군가가 뜻밖의 상황을 연출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연출한 자의 의도는 대체 무엇일까?
이런 의문이 왠지 무언가가 자신의 목을 죄는 듯 껄끄러운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생각지 못했지만 비로소 자신이 황제를 노리는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때문에 최근 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딜란이 등장한 것이 바로 이즈음이었다.
물론 딜란의 등장은 아린 공작에게 무척이나 껄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딜란은 아린 공작이 알기에도 분명 훌륭한 마법사였다.
황제가 실제로 병에 걸렸다면 아마도 딜란은 황제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황제에게 손을 쓴 것이라면 어쩌면 딜란이 범인을 잡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 그렇게 나쁜 결과가 아니었다.
딜란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린 공작이 움츠렸던 허리를 쫙 폈다.
“미친 늙은이, 정말 오래도 사는군.”
그리고 자신을 호위하는 자신의 심복, 그린 백작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즉시 황제의 주변을 지키는 근위병들을 침실에서 전부 철수시켜 버려.”
아린 공작의 말에 그린 백작의 안색이 굳어졌다.
“공작 전하, 근위대장 아르테미르를 잊으셨습니까?”
그린 백작의 말에 근위대장 아르테미르를 떠올린 아린 공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하긴 그 빌어먹을 위인이 어디 내 말을 듣기나 하겠는가? 어찌 되었건 빌어먹을 늙은이가 그렇게 명했다고 전하기나 하게,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그 늙은이가 알아서 해결을 하겠지.”
아린 공작의 말에 그린 백작이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공작님이십니다. 알겠습니다. 아르테미르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린 백작이 사라지자 아린 공작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쯧, 머저리 같은 놈. 내 밑에 저놈이 아니라 아르테미르 같은 놈이 한 명만 있었어도 내가 벌써 황제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순간 묘한 느낌이 아린 공작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아르테미르, 설마 놈이 혹시…… 놈이라면 아마도…… 음…….”
아린 공작의 머리가 복잡하고 요란하게 뒹굴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린 공작의 명을 받은 그린 백작이 근위대장 아르테미르 후작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마법사 딜란이 먼저 황제의 침전 앞에 도착했다.
황제가 병중이었기 때문일까?
황제의 침전 주변의 경계는 무척이나 삼엄했다.
침전으로 접근하는 딜란을 발견한 근위병이 재빨리 그를 향해 창끝을 겨눴다.
“누구냐?”
자신의 턱밑까지 다다른 창을 바라보면서 딜란이 껄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황실의 궁정 마법사 딜란이다.”
백발에 늘어진 수염, 그가 들고 있는 하얀 지팡이는 외관상으로 그가 범상치 않은 마법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딜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막아선 근위병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위병의 이런 반응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가디언 왕국과의 전쟁이 끝난 지 십 년, 하지만 아직까지 궁정 마법사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리고 그가 근위병으로 재직한 지 칠 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누가 궁정 마법사로 임용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근위병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딜란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에도 그의 창끝은 여전히 딜란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대치 장면을 확인한 또 다른 근위병들이 재빨리 그곳으로 달려와 딜란을 포위했다.
딜란은 일말의 당황함도 없이 차분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병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황실의 궁정 마법사 딜란이다. 지금 즉시 폐하를 뵐 것인즉 썩 길을 열어라.”
이렇게 말하는 딜란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또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더불어 다소 불쾌한 듯 보이는 그의 눈초리가 마치 근위병들을 위협하는 느낌을 던져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근위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노려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호, 제법이군.’
자신의 은근한 위협에 굴하지 않는 근위병들의 모습에 딜란은 내심 이렇게 감탄했다. 기실 황성의 외곽 경비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그의 눈에 비친 병사들의 모습들 중 가장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이내 딜란의 표정이 다소 부드러워졌고, 표정과 마찬가지로 다소 부드러운 어조로 근위병들을 향해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도록 하지, 나는 황실의 궁정 마법사 딜란이라고 하네. 일단 자네들의 책임자를 불러 주게.”
이런 딜란의 말에 그를 막아선 근위병들 중 하나가 흠칫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전설의 궁정 마법사이신 딜란 님이십니까?”
누가 있어 딜란의 이름을 모르겠는가?
대부분의 근위병들이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중반이었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근위병이 있었다. 이렇게 한 근위병이 자신을 알아보자 딜란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근위병은 황급히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근위병들 중 누구도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한 근위병의 발 빠른 대응과 자신이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병사들의 모습이 딜란을 더더욱 감탄하게 했다. 더구나 그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예기는 실로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들의 책임자가 궁금해졌다.
“이곳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딜란은 이렇게 눈앞의 근위병을 향해 물었다.
질문을 받은 근위병은 여전히 긴장을 끈을 늦추지 않은 상태에서 무례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근위대장, 아르테미르 후작님이십니다.”
딜란은 아르테미르를 언급하는 근위병의 눈에서 무한한 신뢰를 읽을 수 있었다.
대답한 근위병은 마치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아르테미르 후작님의 휘하 근위병이라고…….
용장 밑에 약졸이 없다고 했던가?
더구나 이런 강졸의 무한한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장수라면,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됨됨이를 능히 짐작할 만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딜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삼엄한 경계 속에서 어떻게 황제를 암습할 수 있었을까?’
자연스레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순간 딜란을 막아섰던 병사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이런 병사들의 움직임과 더불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상대를 확인한 딜란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딜란의 앞으로 한 명의 기사가 다가왔다.
이제 갓 서른은 넘겼을까?
딜란은 천천히 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검에 고정되었다.
‘설마, 성검 더글러스?’
딜란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검과 아르테미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르테미르의 손에 들린 것은 확실히 성검 더글러스였다.
그리고 그 성검 더글러스는 그레고리 1세의 검이자 대대로 황제를 상징하는 검이었다.
그 검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딜란은 이를 통해서 아르테미르 후작에 대한 어린 황제의 신뢰를 한눈에 간파할 수 있었다.
반대로 아르테미르 후작 역시 딜란에게 접근하면서 천천히 그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딜란과 마주함과 동시에 아르테미르 후작의 눈빛이 번뜩였다. 동시에 손에 쥔 검을 서서히 들어 보란 듯 딜란의 앞으로 내보였다.
“성검을 대하고 어찌 예를 표하지 않는가?”
대뜸 나오는 반말!
딜란은 그것이 성검의 권위를 확인시키려는 태도임을 알았다.
하지만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딜란은 최대한 부드럽게 아르테미르를 향해 설명하듯 말했다.
“젊은이, 이 늙은이는 과거 그레고리 1세의 궁정 마법사 딜란이라고 하네. 더불어 그레고리 2세가 이 늙은이에게 영원한 올란 제국의 궁정 마법사라는 지위와 함께 번거로운 예를 모두 생략할 권한까지도 주었다네.”
딜란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르테미르 후작은 검을 든 채로 일체의 미동이 없었다.
사실 아르테미르 역시 5년 전 늙은 궁정 마법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했었다. 그리고 가디언 왕국의 유적지에 처박혀 있다는 소식 역시 접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아르테미르는 딜란을 향해 다소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병환 중이시니 특별한 용무가 아니라면 다음 기회에 다시 찾아오시오.”
그러고는 자신의 용무가 모두 끝났다는 듯 등을 돌렸다.
“허면 지금 이 늙은이의 앞길을 막겠다는 것인가?”
아르테미르의 무례한 태도에 다소 진노한 듯 딜란의 언성이 높아졌다.
“Rkqnfausekclsl rlfdmf dusmsrjtdlwhgdmfRjf.”
딜란이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서서히 딜란의 주변에 오오라가 발생했다.
갑작스레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도 아르테미르는 일체의 당황함 없이 침착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는 와중에 그의 오른손은 성검 더글러스의 손잡이에 가 있었고, 동시에 ‘웅∼ 웅∼ 웅∼’ 성검 더글러스가 검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두 사람의 묘한 시선이 교차했다.
바로 그 순간 딜란의 가슴에서 묘한 기운이 일렁였다.
그것은 결코 딜란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딜란 역시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응시했다.
가슴에서 일어나는 검은 기운, 그리고 마치 여기에 대응이라도 하려는 듯 성검 더글러스의 검신에서 백색의 기운이 아롱거리기 시작했다.
딜란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주문을 멈췄다. 그리고 다급하게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병사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의 뒤로 다가섰다.
‘마검이 성검의 기운에 반응하는 것인가?’
딜란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아르테미르는 자신의 뒤에 선 병사들을 향해 검을 들어 수신호를 보냈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아르테미르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모두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아르테미르가 딜란을 향해 물었다.
“가슴에 그것은 무엇이오.”
아르테미르의 물음에 딜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는 알 필요 없네.”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올란 제국의 근위대장, 곧 폐하의 안위를 책임지는 사람이오. 폐하의 안위를 위해서 출입자들의 검문은 필수, 나는 반드시 그것을 확인해야겠소이다.”
아르테미르의 말에 딜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아르테미르의 말은 지극히 합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보여 주기도 난감했다.
지금 그의 가슴에는 가디언 왕국에서 발견한 부러진 검이 있었다. 비록 부러졌지만 품 안에 검을 숨기고 왔다는 것, 그것은 충분한 오해의 소지를 야기할 수 있는 문제였다.
딜란의 눈이 아르테미르에게 고정되었다.
아르테미르의 눈 역시 딜란의 눈에 고정되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는가?’
아르테미르가 전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딜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가슴속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런 딜란의 행동과 동시에 아르테미르가 다시 성검 더글러스의 손잡이에 자신의 오른손을 올려놓았다.
딜란이 천천히 천으로 휘감긴 물건을 풀어헤쳤다.
거무튀튀한 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 끝은 부러져 불완전한 형태였다.
하지만 그 짙은 마기는 한눈에 그것이 마검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딜란은 난감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한낱 후작 따위였다.
그런 상대에게 일일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황제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젊은 기사를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노마법사의 눈에는 이 젊은 기사가 앞으로 황제를 도와 제국을 이끌어 나갈 동량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해하지 마시게, 이것은 가디언 왕국의 유적에서 찾아낸 마검이네. 설명하자면 너무나 기니 자네는 거기까지만 알도록 하게나, 우선은 폐하를 알현해야겠네.”
검을 꺼내 들고 폐하를 뵌다?
다소 이상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노마법사 딜란은 당당한 눈으로 아르테미르를 응시했다.
한동안 딜란을 지켜보던 아르테미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제가 먼저 폐하께 아뢰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즉시 등을 돌려 황제의 침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