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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6화)
제2화 부러진 검(4)


이런 아르테미르의 행동은 딜란으로서도 뜻밖의 반응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완고한 태도로 보건대 결코 이렇듯 쉽게 통과를 허락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딜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아르테미르에 대한 만족의 미소였다.
자신을 대하고도 굴하지 않는 젊은이의 기백, 그리고 그 기백에 못지않은 실력까지 겸비했다는 것을 조금 전 기(氣) 싸움을 통해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조금 전 눈싸움이 상대를 확인하는 격자인 셈이었다.
잠시 후 아르테미르가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중히 그에게 길을 안내했다.
딜란은 그런 아르테미르의 뒤를 따라 침실로 향했다.
침실 안에서 어린 소년 황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정장을 차려입은 소년 황제, 황제의 위엄이라고 해야 할까?
다소 앳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나이답지 않은 기백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 어디에도 아픈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딜란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였다.
“늙은이가 폐하를 뵙습니다.”
어린 황제 그레고리 4세가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증조할아버지의 궁정 마법사였던 딜란인가요?”
딜란이 이를 인정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르테미르와 황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딜란의 의중을 알았음인가?
그레고리 4세가 아르테미르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테미르 역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밖으로 나가는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제3화 친정 의례(1)


아르테미르가 밖으로 나가자 딜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병환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만.”
딜란의 말에 황제가 다소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딜란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찬찬히 황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보기에 이렇다 할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만 대체 어디가 불편하신지?”
딜란의 물음에 황제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가만히 일어나 딜란의 옆으로 다가와 그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모두가 마음의 병이지요.”
황제의 말에 딜란이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의 병이라?”
그러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침전에서마저 이렇듯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 정도인가?’
황제는 이제 고작 15세의 소년이었다.
그런 어린 황제의 너무나 조심스러운 모습이 보기에 무척 안쓰러웠다.
딜란이 천천히 자신의 눈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그의 두 눈에 새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딜란은 광채를 내뿜는 눈으로 쓱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내 딜란의 눈에서 광채가 사라지고 딜란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저와 대화를 하실 때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감히 장담하건대 제 이목을 속이고 이곳을 엿보거나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딜란의 말에 황제가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딜란의 신기한 행동에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일까?
그제야 황제는 딜란의 앞에 놓여 있는 의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단 앉으시지요.”
황제의 태도는 어느새 차분해져 있었다.
한순간에 평정심을 되찾는 어린 황제, 고작 15살 소년의 모습이라고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역경이란 인간을 이토록 빠르게 성장시키는 것인가?’
딜란은 이렇게 생각하며 대견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한 묘한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딜란이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황제의 눈빛이 번뜩였다.
“노마법사께서는 작금의 정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상 밖의 황제의 질문에 딜란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린 황제의 첫 질문치고는 너무나 대담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작금의 정세라…… 제가 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다지 말씀드릴 것은 없습니다만 폐하께서는 작금의 정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딜란의 물음에 황제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망해 가는 황조의 표본이지요.”
이런 황제의 대답에 딜란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어찌하여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황제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딜란의 표정이 순간 심각해졌다.
그리고 얼마 전 보았던 아린 공작을 떠올렸다.
“설마 아린 공작이 그토록 폐하께 위협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딜란이 직설적으로 아린 공작을 지칭하자 소년 황제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글쎄요. 아린 공작이라, 하긴 그도 문제는 문제지요.”
황제의 말끝에서 풍기는 묘한 뉘앙스에 딜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라…….’
미소를 머금은 소년 황제는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둘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소년 황제는 그렇게 한동안 노마법사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이 선 것인가?
황제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황실에 기생하는 승냥이 한 마리가 뭐 그리 큰 문제겠습니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황실 밖에 웅크린 10마리의 호랑이들이지요.”
‘10마리의 호랑이?’
황제의 말에 딜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의 뇌리에 언뜻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었다.
10마리의 호랑이, 그것은 아마도 10명의 공작들을 비유한 듯했다.
황궁 밖의 10명의 공작들, 그들은 바로 가디언 왕국의 공략 당시 유명을 달리했던 제국 최고의 기사 10명의 후예인 것이다.
딜란이 이를 확인하려는 듯 황제를 향해 물었다.
“10마리의 호랑이라 하심은?”
내친걸음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했다.
“황실 밖의 10명의 공작들이지요.”
딜란은 다소 당황스런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폐하, 어이해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요.”
이렇듯 딜란이 놀라는 이면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가 가디언 왕국의 유적지를 조사하는 동안 그에게 제국의 정보를 알려 준 사람들이 있었다. 이른바 딜란의 정보책, 그들은 바로 과거 가디언 왕국을 공략할 당시 제국 최고의 마법사였던 10명의 마법사들의 후예였다.
그들은 제국의 미래를 우려하면서 아린 공작의 폭정과 황실의 위기에 대해서 그에게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그들은 10명의 공작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
딜란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무언가 또 다른 연결 고리가 연상되었다.
과거 제국의 건국 당시 그레고리 1세에게는 딜란이 있었다면 10명의 공작들의 가문에는 역시 그에 상응하는 각기 한 명의 마법사가 있었다.
그 마법사들은 다름 아닌 딜란의 10명의 제자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제자인 10명의 마법사들 역시 10명의 공작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대륙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10명의 공작들의 가문에 보낸 것이 이런 상황을 가져왔던 것이다.
딜란은 자신의 제자의 제자들이었기에 어느 정도 그들의 말을 신뢰해 왔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실제로 지금까지 그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반면, 지난 세월 그들과 10명의 공작들과의 친분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10명의 공작들의 이야기를 그에게 따로 전하지 않은 것도 이해는 될 법한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황제의 의견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지 황제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었다. 이렇게 의구심에 가득한 딜란을 향해, 소년 황제는 앳된 음성으로 또박또박 설명을 시작했다.
“비록 아린 공작을 모후께서 등용하고 있다고는 하나 어찌 그 하나의 힘이 저들 열에 비하겠습니까? 제가 황위에 오른 지 벌써 10년, 모후께서 수렴청정을 하고 계시다고는 하나 저는 아직 그들의 얼굴조차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 누구 하나도, 단 한 번도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 저에게 귀띔해 주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딜란은 무심코 황제의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그런 저들이 과연 짐의 신하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린 공작의 폭정으로 국민들이 황실에 등을 돌리고 있음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저들을 어찌 짐의 신하라 지칭할 수 있겠습니까?”
딜란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린 공작의 폭정으로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 그것은 10명의 마법사들이 누차 그에게 이야기해 왔던 것이었다. 황제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다소나마 위안이 되고 있었다.
소년 황제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노마법사께서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제국의 곳곳에서 폭동과 기아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평화로운 곳이 있지요.”
딜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딜란의 반응에 황제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물론 국민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곳이 모두 10명의 공작들의 영지임을 아십니까? 때문에 여타 다른 지역의 국민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영지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올란 제국의 모든 힘이 자연스레 그들에게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황제의 말에 딜란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이 두려우신 것입니까?”
딜란의 말에 황제가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딜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그들 역시 폐하의 신하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힘이 곧 폐하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딜란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정 노마법사께서는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에게 질문하는 어린 황제의 눈빛이 실로 예사롭지 않았다.
“음.”
딜란이 잠시 침묵하자 황제가 힘주어 말했다.
“허면 그만한 힘을 가진 그들 중 누구도 아린의 폭정을 막지 않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제의 논리 정연한 물음에 딜란이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딜란을 향해 황제가 힘주어 말했다.
“짐의 생각으로는 그들은 아린 공작의 폭정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황제의 말에 딜란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설마 그렀게까지야. 지나친 우려가 아닐는지요.”
다소 흥분한 듯 황제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모습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는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딜란을 향해 말했다.
“얼마 후면 짐이 친정을 하게 됩니다.”
황제의 말에 딜란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짐의 곁에 누가 있어 짐이 그들과 정사를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짐이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기다리고 있겠지요. 짐이 친정을 하고도 민심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분연히 일어설 것이 자명하지 않습니까?”
계속되는 황제의 말에 딜란은 굳이 반박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황제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그런 딜란을 향해 힘주어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짐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딜란이 비로소 심각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병을 칭한 것입니까? 일부러 친정의 시기를 늦추기 위해서?”
황제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딜란이 생각건대 황제의 말처럼 황제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황궁에는 모두가 아린 공작의 사람이었다.
또한 황제의 말이 옳든 그르든 10명의 공작들은 황제를 찾아오지도 않고 있었다.
있다면 고작 아르테미르, 이제 갓 서른을 넘겼을까?
분명 실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과연 제국을 운영할 경륜이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더구나 황제가 고작 한 사람에게 의존해 제국을 운영한다는 것은 분명 어폐가 있었다.
딜란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허면 폐하의 뜻은?”
소년 황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친정을 피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황제가 말끝을 흐리자 딜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딜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딜란의 손을 부여잡았다.
“노마법사께서 오셨으니 이제 짐을 좀 도와주실 수 없으십니까?”
딜란의 손을 잡은 황제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간절함이 배어 있었고, 그것은 그대로 그의 두 눈동자에서 표출되고 있었다.
딜란이 다소 동요하는 듯하자 황제가 부여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누가 있어 짐을 지켜 주겠습니까? 아르테미르 후작? 그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입니다. 노마법사께서 황궁에 계시기만 하셔도 아마 저들이 쉽게 다른 마음을 먹지는 못할 것입니다. 허니 부디 노마법사께서 제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딜란은 황제의 작은 손을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어린 소년 황제의 마음의 무게가 그대로 자신의 손을 짓눌러 왔기 때문이었다.
부지중에 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실에 웅크리고 있는 황제, 이 어린 황제가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이렇듯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일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르테미르 후작, 그는 이 정도의 인물인가?’
그를 떠올리면서 다시 황제를 바라보았다.
비록 아직은 어렸다.
하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성군의 자질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이대로 10년만 성장한다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마왕의 부활,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막으려면 언젠가는 올란 제국의 힘이 반드시 필요한 날이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지금의 황제를 보호하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딜란은 자신의 손을 부여잡은 고사리 같은 황제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폐하께서 그토록 원하신다면 미력하나마 소신이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딜란의 말에 황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무엇보다도 황제가 기뻐한 것은 딜란이 스스로를 칭한 호칭이었다.
소신, 그것은 사뭇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였다.
지금껏 대화 도중 딜란은 한 번도 자신이 제국의 신하임을 칭한 적이 없었다.
비록 그가 궁정 마법사라고는 하나 그것 역시도 과거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며 소신이라 칭했던 것이다. 이는 이제야 비로소 그가 황제의 신하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황제가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면서도 스스로 딜란에게 공대를 한 것은 제국을 건국한 딜란에게 예를 갖춤과 동시에 그가 신하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황제의 눈가에 기쁨의 눈물이 일렁거렸다.
‘어린것이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딜란은 그 눈물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