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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7화)
제3화 친정 의례(2)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황제와 딜란 사이에 오고 가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딜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이만.”
황제가 일어서는 그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당분간은 황궁에 머무르도록 하오, 과거 그대가 머무르던 처소는 이미 짐이 사람들을 시켜 정리해 두었소.”
황제의 말에 딜란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향해 하대를 하는 황제의 모습이 왠지 뿌듯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실로 나이에 비해 심계가 깊구나.’
딜란은 이렇게 황제의 행동에 감탄하면서 황제의 침전을 벗어났다. 그리고 황제의 침전을 벗어나면서 한 가지 당부 또한 잊지 않았다.
“친정 의례는 예정대로 진행하시지요. 그리고 모든 준비는 아르테미르 후작에게 맡겨도 좋을 듯합니다.”
딜란의 말에 황제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침전을 나선 딜란은 황제가 붙여 준 근위병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홀로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30여 년 전까지 자신이 머물던 처소, 그리고 40여 년 동안 자신이 머물었던 처소, 어찌 그곳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정작 그곳에 도착한 순간 딜란은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딜란의 처소는 과거 그가 떠날 때와 다름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도 과거 자신이 머물 당시와 거의 유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복원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준비를 한 것일까? 설마 내가 제국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이런 준비를 했던 것일까?’
황제의 정성이 새삼 피부에 와 닿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르테미르의 모습이 스치듯 지나갔다.
5년 전이라면 황제의 보령이 고작 10살, 황제가 이런 준비를 했을 리가 만무했다.
그는 7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르테미르 후작, 그리고 어린 황제라…….”
그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다.
환경이 과거와 너무나 비슷해서였을까?
그의 상념 속에는 그레고리 1세와 함께 지내던 시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왠지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포근함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딜란이 떠나기가 무섭게 아르테미르가 황제를 접견했다.
아르테미르를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수심이 가득했다.
“과연 그를 믿을 수 있을까?”
황제의 물음에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조차 믿을 수 없다면 앞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황제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아르테미르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가 적이라면?”
황제의 물음에 아르테미르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비록 어리다고는 하지만 황제의 앞에서 다소 무례한 태도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아직도 더 잃을 것이 남아 있으십니까?”
아르테미르의 말에 황제가 입술을 꽉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짐은 경만 믿겠소.”
이렇게 말하는 어린 황제의 눈빛에는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런 신뢰의 눈빛을 받으면서 아르테미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럼, 신은 이만.”
그렇게 아르테미르가 침실을 나서자 황제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단순한 신뢰의 눈빛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온 아르테미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난을 많이 겪어서인가? 어린 나이에 제법이군. 아니, 정말 대단해…….”
조금 전 황제의 마지막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하긴 세상에 믿을 사람이 있기는 하겠는가? 세상에…….”
아르테미르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그리고 다소 측은한 시선으로 황제의 침실을 바라보았다.

***

마침내 황제의 15번째 생일이 돌아왔다.
그것은 단순한 생일 이상으로,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바로 황제가 직접 정사를 관장하는 즉, 친정을 실시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궁내의 모든 사람들이 황제의 생일잔치와 더불어, 그의 친정 의례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의 대전에는 잔치를 위한 산해진미가 차곡차곡 자리를 차지했고, 해가 뜨기 시작하기가 무섭게 대신들이 하나, 둘 대전으로 들어와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은 아린 공작이었다.
딜란의 지시로 그가 준비를 총괄하고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 마음 한구석에 떨떠름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친정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그의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친정 의례에 뜻밖의 불청객들까지 궁을 찾았기에 아린 공작의 심기는 더더욱 불편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 뜻밖의 불청객은 바로 아린 공작과 더불어 공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 바로 과거 제국 최고의 기사 10명의 후예였다. 또한 이들 10명의 공작들은 각기 한 명의 마법사를 대동하고 있었으니 그 마법사들 역시도 과거 가디언 왕국을 공략했던 마법사들의 후예였다.
이렇듯 이들이 함께 등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의 탄생 당시부터 이들 공작의 가문은 마법사의 보필을 받아 왔다.
그리고 선대가 모두 유명을 달리한 지금도 역시 그 유대는 단절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의 작위와 영지 역시도 선대의 죽음으로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어쩌면 황제를 음해한 것도 저들의 짓이 아닐까?’
아린 공작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황실의 대소사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던 그들이 이렇게 갑작스레 등장했기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10명의 공작들이 대전의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자 아린 공작은 그의 심복인 그린 백작을 찾았다.
아린 공작의 앞에 도착한 그린 백작은 무언가에 놀란 듯 다소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린 공작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린 백작의 이야기를 듣던 아린 공작의 얼굴이 한순간 다소 창백해졌다.
“음, 그렇단 말이지. 알았네, 일단 자네는 아르테미르에게 가서 폐하를 모셔 오게.”
아린 공작의 말에 그린 백작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대전을 떠났다.
순간 아린 공작이 무서운 표정으로 10명의 공작들과 그들이 대동한 마법사들을 훑어보았다.
‘빌어먹을.’
갑작스레 찾아온 공작들과 마법사들,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 각각이 그들 휘하의 정예 100명을 대동하고 황궁을 찾았던 것이다.
황궁의 성문을 지키던 그린 백작이 일단 공작들과 마법사들만을 궁으로 들이고 나머지는 궁밖에 머무르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그린 백작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을 따라온 이천의 병력의 위용이 자못 대단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무력시위라도 하려는 듯 황궁의 정문 앞에 진을 쳤고, 그들 모두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중무장을 한 상태라고 했다.
단순히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린 백작이 보기에는 그들의 기세가 마치 여차하면 황궁을 덮치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단 그들의 명목은 공작들과 마법사들을 호위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린 공작은 그린 백작의 말을 모두 신뢰하지는 않았다.
먼저 겁을 먹은 나머지 다소 과장된 보고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확실히 그 규모나 지나친 무장 상태가 단순한 호위를 위해서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임은 확신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곳은 황궁이었다. 평시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고, 이는 자칫 역모로 오인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상대가 어느 정도 결심을 굳히고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황궁을 방위하는 병력은 오천에 육박했다.
하지만 그린 백작의 말에 다소 과장이 있다 치더라도, 저들이 데려온 이천의 정예를 막기는 다소 버거운 느낌이 들었다.
‘기어이 무력시위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가?’
그제야 아린 공작은 그동안 병사들의 훈련을 소홀히 했던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란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덕분에 대전에서의 기세 역시 보기 좋게 저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긴장하는 자신과는 달리 그들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번지고 있다는 것이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아린 공작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식적으로나마 저들의 자리를 마련했고 역시 형식적으로 저들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진실로 저들이 그것도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가 참석할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지금까지 저들의 존재 자체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황궁을 장악하고 있으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그 모든 것이 대체로 아린 공작의 뜻대로 순조로웠던 것이 또한 사실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아린 공작이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대전의 문이 활짝 열렸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 폐하 납시오∼”
도처에서 황제의 도착을 알리는 근위병들의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고, 그런 와중에 황제가 대전 현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
곳곳에 터지는 탄성,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교차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가 병중이라는 소문은 이미 제국 전역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병중이라던 황제는 그야말로 보무도 당당하게 대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대전으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에서 일말의 아픈 기색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당당한 그의 발걸음에서 아직 어리지만 황제다운 기품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양옆을 두 사람이 호위하듯 나란히 걸어왔다.
우선 황제의 왼편에 자리한 사람은 바로 전설의 마법사 딜란이었다.
백색의 로브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마법사를 본 적이 있는가?
그런 백색의 로브와 함께 그의 흰 수염과 지팡이가 한껏 그의 신비감을 고조시켰고, 자연스레 사람들을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딜란은 다소 의도적으로 찬연한 백색의 광채를 흩뿌리면서 황제와 동행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신비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오른편에 자리한 사람은 근위대장 아르테미르 후작이었다.
동화 속 그림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사의 모습이랄까?
깔끔한 기사 복장에 오른손을 가볍게 검의 손잡이에 올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지금이라도 당장 단숨에 적을 베어 버릴 것 같은 그런 기백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들이 완전히 대전의 한가운데에 들어서자, 근위병들이 조심스럽게 대전의 문을 닫았다.
황제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야말로 당당하게 대전 상단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이런 일련의 광경에 모두가 감탄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가 상단에 마련된 의자에 앉자 딜란과 아르테미르가 황제를 호위하듯 자연스레 황제의 후미에 공손히 시립했다. 황제는 여유 있게 한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면서 좌중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참석한 대신들은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
그런 황제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확실히 나이답지 않은 침착함을 느낄 수 있었다.
대전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들은 그제야 서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가 어느 틈엔가 자리에서 서 있었다.
물론 황제가 입장하면 일어서서 그를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를 인식하지 못한 듯한 눈치였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그들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딜란이 한 발짝 황제의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치 좌중을 위협하듯 자신의 지팡이를 앞으로 쭉 내밀면서 말했다.
“누가 감히 대전에 허락도 없이 검을 차고 들어왔는가?”
쩌렁쩌렁하게 대전을 울리는 딜란의 목소리,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백색의 기운이 요동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