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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8화)
제3화 친정 의례(3)
딜란의 외침을 신호로 대전을 막고 있던 3개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3개의 문을 통해 근위병들이 기세 좋게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포위하듯 대전의 사람들을 에워싼 근위병들, 그들은 앉아 있는 대신들과 기사들을 향해 한 명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제게 무기를 맡기시지요.”
표현은 공손했으나 어투는 다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어투와는 달리 허리를 숙인 채 두 손을 공손히 내미는 그들의 동작은 결코 무례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린 공작이 황급히 그린 백작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한쪽 옆에서 근위병에게 자신의 검을 건넨 그린 백작은 멀쑥한 표정으로 아린 공작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폐하의 명으로 아르테미르의 근위병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외곽의 수비로 돌렸습니다.”
그린 백작의 말에 아린 공작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이런, 병신 같은 놈.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라며 당장에라도 그린 백작에게 호통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대전의 분위기는 근위병에게 완벽하게 압도된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아린 공작이 감히 그런 행동을 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린 공작은 잔뜩 위축된 그린 백작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고, 내가 이런 놈을 믿고…….’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황제 일행이 대전으로 들어서면서 보여 준 위용을 봤을 때, 그린 백작이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또한 일단은 이 위기를 슬기롭게 넘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린 공작은 순순히 근위병에게 무기를 넘길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아린 공작이 무기를 넘기자 그때까지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그의 일파들이 앞다투어 근위병들에게 무기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0명의 공작들과 마법사들 역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무기를 근위병에게 건네줄 수밖에는 없었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딜란은 천천히 황제의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다시 대전의 현관을 제외한 두 개의 문이 모두 닫혔다.
‘이번에는 또 무슨?’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했고, 자연히 팽팽한 긴장감이 대전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이번에는 황제의 우측에 서 있던 아르테미르가 한 발짝 황제의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금 전 딜란이 지팡이를 내밀었던 것처럼 성검 더글러스를 앞으로 내밀었다.
황제의 권위가 담긴 제국의 명검, 이를 대하자 대전의 분위기가 사뭇 경건해졌다.
“지금부터 친정 의례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아르테미르의 선언으로 친정 의례가 시작되었다.
아르테미르는 곧장 휘하 근위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먼저 섭정이신 황태후 안드레아 님을 모시겠습니다.”
아르테미르와 눈이 마주친 근위병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허리를 숙이고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뒤이어 10여 명의 근위병들이 호위하듯 태후와 함께 대전으로 들어섰다.
태후의 손에 들린 거대한 인장, 모두가 한눈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제국의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황제의 인장, 이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그야말로 다채로웠다.
탐욕의 눈빛, 안타까움의 눈빛, 경외의 눈빛, 이런 각각의 시선들이 그렇게 교차하는 와중에 태후는 그런 사람들 사이로 인장을 들고 황제를 향해 한 발짝씩 발걸음을 옮겼다.
10년 전 가디언 왕국의 왕궁에서의 참사 이후 태후에게 맡겨졌던 바로 그 인장이 지금 황제의 손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안드레아 황태후의 시선은 힐끔힐끔 아린 공작에게로 향했다.
그런 태후의 시선을 느낀 아린 공작이 그녀를 향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는 조심스럽게 인장을 들고 황제의 앞으로 다가갔고, 황제는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모후인 안드레아 황태후를 맞았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황태후의 손에서 조심스레 황제의 손으로 인장이 건네졌다.
순간 딜란과 아르테미르가 동시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황제 폐하의 친정을 진심으로 앙축드립니다.”
두 사람의 함성이 쩌렁쩌렁 대전을 울리자, 포위하듯 대전을 에워싼 삼백 명의 근위병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황제 폐하의 친정을 진심으로 앙축드립니다. 앙축드립니다. 앙축드립니다.”
근위병들이 내지르는 함성은 대전이 떠나갈 듯 울렸고, 이에 압도된 아린 공작 역시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폐하의 친정을 진심으로 앙축드립니다.”
아린 공작을 따르는 일파들이 곧장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고, 연이어 10명의 공작들과 마법사들까지도 무릎을 꿇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폐하의 친정을 진심으로 앙축드립니다.”
그러나 실상 이들 중 진심으로 이를 축하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황제가 이에 호응하듯 인장을 높이 치켜 올렸다. 황제의 행동에 반응해 근위병들은 계속해서 함성을 지르고 있었고, 그 함성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황제가 가만히 인장을 아래로 내리자 마침내 함성이 잦아들었다.
그렇게 대전이 다시 고요해지자 황제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황태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모후와 함께 자신의 자리로 당당하게 올라갔다.
단상의 자신의 자리에 도착한 황제가 조심스럽게 안드레아의 손을 놓자, 아르테미르가 재빨리 황태후를 황제의 옆에 준비된 좌석으로 안내했다.
이렇게 황태후를 안내하면서, 아르테미르는 조심스럽게 안드레아 황태후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의 친정이 아니던가?
그녀의 10년 노력의 결실이 바로 오늘에서야 열매를 맺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르테미르의 눈에는 왠지 태후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 보였다.
그렇게 태후가 자리에 앉자, 황제는 조심스럽게 인장을 자신의 좌석 앞에 미리 준비된 금장식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면서 좌중을 향해 말했다.
“경들은 모두 이제 그만 일어나 자리에 앉으시오.”
인장을 돌려받아서였을까?
어린 황제의 목소리에는 또 다른 기백이 느껴졌다.
“짐이 오늘 제국의 11명의 공작들 앞에서 이렇듯 친정을 시작하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앞으로도 경들이 짐을 많이들 도와주길 바라오.”
황제의 말에 아린을 포함한 11명의 공작들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허리를 숙인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씁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다시 딜란이 황제의 옆으로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오늘같이 좋은 날 신이 폐하를 위해 가벼운 마법을 선보이고 싶습니다만.”
황제가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딜란이 좌중을 훑어보며 말했다.
“제국의 궁정 마법사 직을 맡고 있는 딜란입니다. 오늘 여러 대신들 앞에서 부족하나마 조금의 재주를 선보일까 합니다.”
알고 있는 사람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제국의 전설의 궁정 마법사라는 것을, 하지만 딜란이 모두의 앞에서 스스로 궁정 마법사라 칭한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선포였다.
앞으로 그가 황제를 돕겠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런 딜란을 바라보는 10명의 마법사들의 표정이 또한 묘하게 일그러졌다.
마법사 딜란, 그는 자신의 스승들인 선대 마법사의 스승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등장과, 황제의 지지는 이들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가고 있었다.
딜란은 천천히 단상 아래로 내려가면서 무언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한순간이지만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eowldp wltsnffls djenadmf rjenrh xodiddml rhkdgnlrk dl Ekddmf qlcnsl djenadldu wldhrdml wjvusdmfh tkfkwufk. Tjsfkdlxm.”
주문이 끝나자 딜란의 몸 주위가 일순간 불타오르는 태양처럼 붉어졌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의 몸에서 시작된 빛이 대전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그것은 이를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만큼 그야말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화려한 광경이 전부가 아니었다. 딜란에게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 딜란이 아닌 다른 두 사람에게 고정되기 시작했다.
그 두 사람은 다름 아닌 황태후와 아린 공작이었다.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우두둑, 우두둑’ 소리를 내면서 몸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날개였다. 거무튀튀한 빛깔의 음침한 기운을 내뿜는 날개,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 역시도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람들이 본 적이 없는 흉측한, 이른바 마물의 형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날개를 단 마물로 탈바꿈한 아린 공작의 입에서 듣기에 소름 끼치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미친 늙은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동시에 날개를 펄럭이며 그의 몸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한 표정으로, 음침한 목소리로 딜란을 향해 말했다.
“제법이군, 제법이야. 아직도 이 땅에 빛의 분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가 존재하고 있다니, 정말 놀랍군.”
딜란이 그런 마물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마계의 염탐꾼 게놈. 네 이놈.”
딜란의 호통에 게놈이 비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러자 그런 게놈의 비웃음을 딜란이 조롱으로 대응했다.
“마왕이 고작 너 따위를 선봉으로 내세웠더냐?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 그 인간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치졸한 마졸 따위에게?”
게놈은 계속해서 비웃음을 잃지 않았다.
“큭큭큭. 너 따위 인간의 마법사가 감히 위대한 마왕님을 언급할 자격이 있느냐? 어찌 하찮은 인간이 마왕님의 깊은 뜻을 알리요.”
그리고 황태후가 탈바꿈한 게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순간 황태후가 탈바꿈한 게놈의 시선이 황제를 향했다.
딜란이 아차 싶어 재빨리 지팡이를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다.
순간 대전에 한 줄기 빛이 번쩍였다.
빛과 동시에 황태후가 탈바꿈한 게놈이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추는가 싶더니 정확히 4등분으로 조각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진 4등분의 몸뚱이가 바닥에서 퍼덕거렸다.
이내 바닥에 떨어진 게놈의 몸에서 흘러나온 녹색의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이를 확인한 대전에 자리한 10명의 공작들의 얼굴에는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독히도 빠른 검. 아르테미르라고 했던가?’
그 순간, 아린 공작이 탈바꿈한 마물 게놈이 마기를 담은 함성을 터트렸다.
“아르테미르, 네 이노옴∼”
대전의 창문이 그 음파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네놈만 없었더라면…… 네놈만 없었더라면…….”
게놈이 증오에 찬 시선으로 아르테미르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게놈의 시선이 딜란에게 향했다.
“너희 하찮은 인간 따위 때문에 마왕님이 이곳에 나를 보내신 줄 아느냐, 어리석은 마법사여? 이미 오메가하임 대륙에서 인간의 역사는 끝이 났다. 이 어리석은 마법사야.”
게놈의 말에 딜란이 조심스레 품 안에서 한 개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네놈이 찾았던 것이 바로 이것이더냐?”
딜란의 가슴팍에서 나온 부러진 검, 그것을 대하자 게놈이 흥분하며 딜란을 향해 말했다.
“네놈이 기어이 유적에서 그것을 찾았느냐? 설마 놈을 만난 것이냐? 허면 놈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
게놈의 계속되는 질문에 딜란은 그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게놈은 허공에서 감히 내려오지 못하고 딜란의 표정에서 진위를 확인해 보려는 듯 부러진 검과 딜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큭큭큭, 너 역시 아직 그를 찾지 못했는가? 마법사여.”
게놈의 말에 딜란은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로 일관했다.
게놈이 그런 딜란을 향해 다시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긴 네놈이 그를 만났다면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겠지.”
이런 게놈의 말에 딜란이 되물었다.
“이 검의 주인은 누구인가?”
딜란의 질문에 게놈이 한동안 허공에 뜬 채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하긴 너희들도 아는 것이 좋겠지. 그는 이계의 지배자, 이 땅을 지배할 위대한 마왕님의 유일한 적수이자 마왕님과 함께 너희를 파괴할 위대한 파괴자인 것을.”
딜란이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일한 적수?”
딜란의 질문에 불쾌한 듯 게놈이 날개를 파닥거렸다.
“가디언 왕국의 마법사 헤론, 놈의 마법은 너무나 불완전했다. 때문에 차원의 문을 너무 크게 열었지, 결국 오지 말아야 할 이계의 지배자마저 이 땅에 오게 되었지. 그 모든 책임은 앞으로 너희 인간이 감수해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마법사여.”
게놈은 이렇게 끔찍한 저주를 퍼붓고 대전의 부서진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순간 무언가가 그의 발을 잡아챘다.
10명의 공작들과 동석한 10명의 마법사, 그들 모두가 게놈을 향해 손을 들고 있었고, 그들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뻗어 나와 그의 발을 옭아매고 있었다.
“꺄∼악∼”
게놈의 입에서 나온 끔찍한 음파가 다시 한 번 대전을 뒤흔들었다.
순간 게놈의 발을 옭아매던 흰 줄이 힘없이 끊어졌다. 그리고 게놈은 유유히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떠나면서도 그는 마법사들을 조롱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풋내기 마법사들 따위가 어디서 감히…… 큭큭큭.”
그렇게 게놈이 사라지자 대전에 모인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