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방인 1권(9화)
제3화 친정 의례(4)
딜란은 자신의 손에 든 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계의 지배자란 말인가?’
마왕을 압도하고 마왕에게 공포를 심어 준 존재. 그런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것이 실재하는 것을, 그것이 이계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딜란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마왕만으로도 벅차거늘…… 마왕에 비견 되는 또 다른 마왕이 이 땅 어디에선가 인간을 아니, 오메가하임 대륙의 모든 생명체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 확실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2명의 마왕이라. 2명의 마왕이라.”
딜란은 연방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게놈이 떠나간 대전은 완전히 공황 상태였다.
갑작스런 마물의 출현은 그렇게 모든 이들의 얼을 빼놓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린 백작이었다. 아린 공작은 그가 모시던 상관이었다. 언제나 그의 오른팔임을 자처해 왔던 그린 백작은 멍한 시선으로 게놈이 사라져 버린 창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닥쳐올 후폭풍을 떠올리자니 자연히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대신들은 들으시오.”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딜란이 좌중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여러분들이 눈으로 확인하신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모든 폭정은 마물들의 소행이었소. 제장들은 이런 사실을 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고 이제는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제국의 안녕을 도모하시오.”
이런 딜란의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묘하게 교차했다.
특히 10명의 공작들과 마법사들의 눈빛이 서로 묘하게 교차했다.
순간 황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테미르 후작.”
황제의 부름에 아르테미르가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그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황제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부터 경이 아린 공작의 자리를 맡아 주시오.”
아르테미르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황공하옵니다.”
황제가 그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진 황태후가 탈바꿈한 게놈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비록 마물의 제물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녀는 분명 짐의 모후, 경이 국장으로 그녀의 시신을 처리해 주시오.”
아르테미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네, 폐하.”
황제가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대전에서 이처럼 불민한 사태가 벌어진 만큼 짐은 여기서 친정 의례를 마칠까 하오.”
황제의 말에 모두가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르테미르가 주변의 근위병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아르테미르의 신호에 따라 일단의 근위병들이 일사불란하게 황제의 주변을 에워쌌다.
“그대들은 폐하를 모시어라.”
아르테미르의 말에 근위병들이 고개를 숙였고,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단상에서 내려가 당당하게 대전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대전을 벗어나는 황제의 두 손에는 제국의 인장이 소중하게 쥐어져 있었다.
그렇게 황제가 그 자리를 벗어나자 아르테미르가 다시 남아 있는 근위병들과 눈짓을 교환했다. 근위병들은 곧장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들을 대전에 있는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모두가 자신의 무기를 손에 쥐자, 또다시 각기 묘한 눈빛이 오고 갔다.
다시 대전 전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미 모두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재삼 확인하듯 아르테미르가 단상 아래로 내려서면서 말했다.
“오늘은 폐하의 모후께서 돌아가신 날, 행사는 여기서 그만두시겠다는 것이 폐하의 어의이십니다. 허니 대신들께서는 이대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르테미르의 말끝의 뉘앙스가 다소 모호했다.
살기를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도발을 하려고 한다고 할까?
하지만 그런 아르테미르의 말끝의 뉘앙스는 지금 대전의 묘한 분위기와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듯했다.
순간 아르테미르가 그린 백작을 바라보았다.
‘결국 올 것이 온 것인가?’
그린 백작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건네받은 자신의 무기를 다시 근위병에게 건네주고 아르테미르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뜻밖에도 아르테미르는 그를 향해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린 백작이 자신의 옆에 도착하자 아르테미르는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제 풀에 놀란 그린 백작이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아르테미르는 여전히 그를 향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자네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해 주게, 그리고 황궁을 벗어나는 그때까지 손님들의 안내는 자네가 맡아 주게.”
아르테미르의 말에 사색이 되었던 그린 백작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살았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바로 이 한 단어였다.
그리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라는 것, 그것은 어쩌면 앞으로도 자신이 지금까지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린 백작은 재빨리 아르테미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펴는 순간 그의 모습은 또 달라져 있었다.
당당한 걸음걸이, 그린 백작은 조금 전 자신의 무기를 받아 든 근위병에게 다가가 다시 자신의 무기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정중하게 대신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저를 따르시지요.”
덩달아 아린 공작의 편에 섰던 대신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들은 그린 백작의 행동에 비로소 안도하며 재빨리 그의 지시를 따르기 시작했다.
딜란이 아르테미르의 곁으로 다가와 가벼운 눈짓을 교환했다.
‘이래도 되겠는가?’
딜란은 눈짓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고, 아르테미르는 그런 딜란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딜란 역시 아르테미르의 뜻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아르테미르의 행동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아린 공작을 따르던 모든 이들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그들을 다시 이용하는 길뿐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의 중심에는 그린 백작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아린 공작의 명령 대부분은 그린 백작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때문에 다른 대신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그린 백작의 행보만 주시하면 되는 일이었다. 단지 그 정점이 아린 공작을 대신해서 아르테미르 공작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입장이 정해진 일단의 무리들이 먼저 대전을 벗어났다.
그리고 대전에는 10명의 공작들과 마법사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들 역시 계속해서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위글 공작이 먼저 아르테미르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취했다.
그리고 위글 공작이 앞장서서 자리를 벗어나자 그의 뒤를 2명의 공작과 3명의 마법사가 따랐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자, 뒤이어 알렌 공작이 아르테미르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취하고 그의 뒤를 쫓아 다시 2명의 공작과 3명의 마법사가 뒤따랐다. 그리고 나머지 4명의 공작 역시도 그들이 떠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마법사들과 함께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들어올 때는 분명히 함께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따로 무리를 지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르테미르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재미있군.”
이런 아르테미르의 중얼거림에 딜란이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르테미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태연한 표정으로 대전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아르테미르를 바라보는 딜란의 표정이 그다지 곱지만은 않았다.
“재미라…….”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나온 말치고는 확실히 조금 파격적이었다.
밖으로 나간 아르테미르의 뒷모습을 떠올리면서 딜란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전 밖으로 나갔다.
제4화 황실 풍운(1)
황제의 친정 그리고 아르테미르의 내정, 그 시작은 과중한 세율을 낮추는 것이었다.
우선 이를 위해서 아르테미르는 아린 공작을 추종했던 그린 백작을 후작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를 적극적으로 중용하기 시작했다.
정치란 혼자서 할 수 없는 법이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 아무런 세력이 없는 아르테미르로서는 그린 후작을 중용함으로써 과거 그린 후작의 지시를 따르던 아린 공작의 추종자들을 흡수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정의로운, 그리고 합당한 조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현 시점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만큼 지금 황실에는 이렇다 할 인물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10명의 공작들이 황실을 지지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아린 공작의 추종자들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누가 있어 세율을 인하하고 영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일시에 모든 귀족들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아르테미르는 과거 아린 공작을 추종했던 귀족들을 중심으로 10명의 공작들의 영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지에 세율 인하를 단행했다.
급작스런 개혁에 반감을 품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자 아르테미르는 보란 듯이 아린 공작의 개인 자산을 모두 압류했고, 이것으로 세금 인하로 부족한 황실의 재정을 보충했다.
이것은 단순히 황실의 재정을 보충한 것만이 아니었다.
아린 공작을 추종했던 자들에게 ‘너희들도 이렇게 될 수 있었다.’라는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아린 공작을 따랐던 사람들 대부분이 시류에 편승한 자들이었다.
때문에 그들 대부분이 자신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세율 인하에 대한 귀족들의 반감은 아린 공작의 자산을 몰수하는 순간 사라지고 있었다.
황제와 아르테미르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율 인하의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각지에서의 벌어지는 소요 사태는 여전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가장 큰 요인은 10년간 지속된 폭정으로 인한 국민들의 황실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리고 아린 공작이라는 중심축을 잃어버린 귀족들, 그들 모두가 그린 후작의 지시에 따라 아르테미르의 휘하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중 일부가 10명의 공작들의 편에 서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또한 그들 중 일부는 일단 사세를 살피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결국 황실을 중심으로 단행한 일단의 조치가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그만큼 황실의 권위 또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결국 문제는 10명의 공작들이었다.
황실과 10명의 공작들의 대립, 이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대립 속에서 힘의 저울추는 명백히 10명의 공작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황제와 딜란, 그리고 아르테미르는 이 같은 상황에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연일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뾰족한 해답은 좀처럼 나오지 않고 있었다.
“궁정 마법사는 혹시 무슨 좋은 복안이 없소?”
황제의 물음에 딜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러자 황제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아르테미르 역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벌써 이런 대화가 오간 지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딱히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제는 오늘도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딜란과 아르테미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특히 황제는 딜란보다는 아르테미르에게 더더욱 실망감이 컸다.
그것은 지금까지 회의를 하면서 아르테미르가 딱히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뚜렷한 대안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황제는 그런 아르테미르에게서 그다지 고심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황제가 답답하다는 듯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말을 좀 해 보세요. 작금의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진정 단 하나도 없단 말이요?”
이렇게 말하는 황제의 언성은 다소 높아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