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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25화)
제6화 출정 준비(6)
“외람되오나 전하, 대체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로이 백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빅터와 나머지 3명의 공작들, 그리고 자이 백작과 그린 후작은 조심스럽게 그들의 손을 검으로 옮기고 있었다. 아르테미르의 대답 여하에 따라서 여차하면 로이 백작을 베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이 백작은 여전히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아르테미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는 반드시 전하의 의중을 알아야겠습니다.”
다시 모두의 시선이 아르테미르에게 쏠렸다.
순간 아르테미르가 페드로 공작을 향해 말했다.
“황제가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물었습니까?”
페드로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르테미르가 곧장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나를 황궁이라는 좁은 울타리 밖으로 보내 준 황제에게 오히려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페드로 공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아르테미르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르테미르의 표정에서 한 줌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심인가? 그렇다면 협상은 결렬이라는 뜻인가?”
아르테미르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외람되지만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미 협상은 끝난 마당이었다.
달리 더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것인가?
페드로 공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런 페드로 공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정중히 말했다.
“공작께서는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페드로 공작은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페드로 공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말했다.
“르안 왕국은 어떠십니까?”
페드로 공작의 얼굴에 가벼운 비웃음이 흘렀다.
그제야 아르테미르의 의도를 파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황제의 충견인가?”
페드로 공작이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아르테미르는 오히려 그런 페드로 공작을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페드로 공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예상 밖의 말을 내뱉었다.
“아직도 제가 황제를 위해 호손 제국과 전쟁을 치르러 간다고 믿고 있습니까?”
페드로 공작이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허면 아니라고 할 참인가?”
큭큭큭……. 하하하…….
처음에는 비웃음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르테미르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아르테미르가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이놈이든 저놈이든 모두가 자신들의 잣대로만 사람을 판단하는군.”
이렇게 말하는 아르테미르에게서 페드로 공작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박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내 아르테미르가 건방진 표정으로 페드로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이보시오, 페드로 공작. 황제는 내게 병력을 모을 기회를 주었고, 황제는 내게 명분을 주었으며, 거기다가 덤으로 점령하는 지역을 모두 내게 주었소. 생각해 보시오. 만일 호손 제국과의 전쟁에서 내가 승리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일순간 페드로 공작이 멍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결국 지금까지 페드로 공작이 보아 왔던 아르테미르의 행동은 허세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아르테미르의 기백은 결코 패배를 위해 전쟁에 뛰어드는 사람이 내비칠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아르테미르의 말처럼 아르테미르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가 차지할 영토는 지금 제국의 영토보다 오히려 더 넓었다. 페드로 공작이 당황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이런 미친…….”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다.
하지만 아르테미르의 얼굴에는 거짓이 없었다.
있다면 지금 자신마저 압도하는 기백뿐이었다.
‘설마 이 정도의 야심을 가진 인물이었는가?’
페드로 공작은 마치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르테미르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 위축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 페드로 공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자격이 없어. 자격이…….”
이렇게 무례한 아르테미르의 태도에 발끈할 법도 하건만, 볼드릭 공작마저도 놀란 나머지 눈을 부릅뜬 채 이렇다 할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 아르테미르가 페드로 공작을 향해 말했다.
“저와 협상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렇다면 적어도 르안 왕국 정도는 점령하셔야 저와 협상할 자격이 생기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아르테미르의 행동이 페드로 공작의 눈에는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동안 결례가 많았소.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페드로는 그저 아르테미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르테미르와 협상을 시도한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한 마치 둔탁한 흉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페드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귀빈실의 문 쪽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빅터와 나머지 3명의 공작들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런 페드로 공작의 뒤를 따랐다.
페드로 공작이 별실의 문을 나서기 직전 아르테미르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충고를 해도 될까요?”
막 문을 벗어나려던 페드로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런 페드로 공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진심으로 충고하듯 말했다.
“황실에 웅크린 그 늙은이를 조심하시오. 제가 보건대 당신은 아직 그 늙은이의 적수가 되지 못할 테니.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자신에게 이렇듯 마지막까지 충고를 잃지 않는 아르테미르를 향해 페드로 공작이 입을 악다물면서 말했다.
“참고하도록 하지. 자네도 부디 건승하시기를, 그럼 이만.”
그 길로 페드로 공작은 황급히 아르테미르의 저택을 벗어났다. 그리고 저택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빠르게 말을 몰았다. 이렇게 페드로 공작이 서두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협상은 이미 결렬되었다.
또한 로이 백작이 자신을 확인했으니 결코 안전한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위험지역을 벗어나야 했기에 이렇듯 길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런 페드로 공작의 뒤에서 빅터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님, 정말 이대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빅터는 아직도 아르테미르와의 협상에 미련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모든 아르테미르의 행동을 아직도 허세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페드로 공작이 그런 아들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사태가 파악되지 않느냐. 놈의 의중에는 애초에 우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어. 어쩌면 놈은 황제마저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을지도……. 세상이라고, 고작 서른도 넘지 않은 애송이가 감히 드넓은 세상을 보고 싶지 않느냐고? 놈은 미쳤어. 마치 과거의 그레고리 3세처럼…….”
페드로 공작은 이렇게 애써 아르테미르를 미친놈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말과 달리 그의 표정은 무언가를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실의 늙은이를 조심하라고, 궁정 마법사 딜란을 말하는 것인가? 그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내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페드로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르안 왕국이라…….”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페드로 공작은 그렇게 혼자서 많은 것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페드로 공작의 일행이 떠나 버린 귀빈실에 남아 있는 3사람은 한동안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일단의 아르테미르의 발언들, 그들에게 있어서도 놀랍고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르테미르가 멍청하게 서 있는 로이 백작을 향해 피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네도 이제 그만 가 보시게. 폐하께서 기다리지 않으시겠는가?”
로이 백작이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로이 백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담담하게 말했다.
“출병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네. 노마법사께도 그렇게 전해 주시게. 그리고 말일세. 이 말도 꼭 전해 주시게. 시작은 당신의 뜻대로 될지 모르지만 결과까지는 결코 당신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로이 백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르테미르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렇게 전하면 아마 그 늙은이가 알아들을 걸세.”
로이 백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그렇게 로이 백작마저 귀빈실을 떠나자 아르테미르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린 후작과 자이 백작은 아직도 비몽사몽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테미르가 멍청하게 서 있는 그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네들도 그만 나가서 병사들의 훈련에 열중해 주게, 나는 마지막 손님과 이야기를 마저 끝내고 나가겠네.”
이렇게 귀빈실에 두 사람만을 남겨 둔 채 아르테미르가 먼저 귀빈실을 떠났다.
충격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음인가?
그린 후작과 자이 백작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따라 먼저 나가는 아르테미르의 등이 유난히 넓어 보였다.
아르테미르가 밀실에 들어서자, 킹죠와 타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특히 킹죠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대단하시군요.”
갑작스런 킹죠의 칭찬에 아르테미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킹죠가 감탄하듯 말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계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킹죠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타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르테미르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귀빈실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들렸나 보군요.”
아르테미르는 이렇게 말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아르테미르의 언성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귀빈실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결코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밀실은 방음이 잘되어 있는 방이었기에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이를 듣기 위해 문을 열어 두었다면, 그리고 특별히 귀가 밝다면 충분히 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르테미르도 이들이 그 말을 들어 주기를 내심 바랐기에 굳이 이들의 행동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었다.
킹죠가 이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귀가 좀 밝은 편이지요. 그건 그렇고 정말 놀라운 생각을 가지고 계시군요.”
확실히 이들의 놀라움 역시 작지는 않았다.
그리고 킹죠는 이런 놀라움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 역시도 저들처럼 전쟁에 일말의 승산조차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킹죠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셨겠지요. 그런데 이제는 슬슬 구미가 당기기는 하시나 봅니다.”
킹죠가 솔직하게 이를 시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조건이 저희에게 그다지 좋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르테미르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 그 말은 로랜 성의 전리품의 절반으로도 양에 차시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킹죠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시에 아르테미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순간 킹죠가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말했다.
“솔직히 공작께서는 9할의 승산을 장담하셨지만 제가 공작님의 능력을 아무리 높게 평가한다고 할지라도 3할을 넘지 않아 보입니다.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제가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만큼 돌아오는 대가가 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르테미르가 정색을 하며 킹죠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요?”
킹죠가 꿀꺽 침을 삼키며 말했다.
“공작님께서 로랜 성을 점령하시면 로랜 성 일대의 15개 마을이 공작님의 수중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 15개 마을의 전리품 절반까지 모두 제게 주신다면 원하시는 물품을 확실히 지원해드리도록 하지요.”
순간 아르테미르의 표정이 더더욱 굳어졌다.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하대와 다소 위협적인 어투였다.
하지만 킹죠는 이런 아르테미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글쎄요. 어차피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번뜩이며 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아르테미르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대단한 장사꾼이군. 좋소, 하지만 거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더 있소.”
킹죠 역시 당연하다는 듯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세부적인 이야기들이 차례차례 오고 갔다.
한 시간여가 지난 후 킹죠는 타고 온 마차를 몰고 저택을 떠났다. 하지만 왔을 때처럼 타고 온 마차에는 흑마법사 타냐가 타고 있지 않았다.
킹죠를 배웅하는 아르테미르의 뒤에서 타냐가 떠나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테미르가 돌아서서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감시자라, 그다지 내키지 않는군.”
타냐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아르테미르는 그녀를 지나쳐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 와중에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인가?”
아르테미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오른손을 지그시 움켜쥐고 있었다.
<『이방인』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