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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24화)
제6화 출정 준비(5)


밀실을 떠난 아르테미르가 귀빈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킹죠의 예상대로 페드로 공작을 포함한 4명의 공작들, 그리고 빅터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아르테미르가 들어오자 이들 5사람이 자리에 일어나 그를 맞았다.
“일전에 못난 자식이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렇게 인사말을 건네면서 페드로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자 아르테미르가 그런 페드로 공작의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헌데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페드로 공작의 손을 잡은 채로 아르테미르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아르테미르의 손을 놓으면서 자리에 앉는 페드로 공작을 비롯해 4명의 공작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리고 성미 급한 볼드릭 공작이 얼굴을 붉히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무례하다.”
그런 그의 손은 벌써부터 검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차분한 성격의 케론 공작이 그런 그의 손을 붙잡으며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단순히 페드로 공작 혼자서 이곳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황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그리고 어쩌면 적지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찾아오면서 이렇다 할 호위조차 대동하지 않은 채로 빅터와 4공작 모두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이것은 이들로서는 일종의 크나큰 모험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예의를 갖춘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테미르는 오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페드로 공작이 자리에 앉으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마치 ‘대체 언제까지 허세를 부릴 심산인가?’라는 표정이었다.
페드로 공작이 다소 느긋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 협상은 잘 진행되었습니까?”
아르테미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런 페드로 공작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페드로 공작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여우 같은 돼지 놈의 마차가 이곳에서 보이더군요.”
이런 페드로 공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이를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여우 같은 돼지라…… 확실히 적절한 표현이로군요.”
여우 같은 돼지는 킹죠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르테미르는 자신의 대답처럼 페드로 공작의 표현이 그야말로 적절하고 생각했다.
연이어 아르테미르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요. 아직은 그 돼지로부터 이렇다 할 확답은 받아 내지 못했습니다.”
이미 이를 예상했다는 듯 페드로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확실하지 않은 곳에는 좀처럼 투자를 꺼리는 놈이니까요.”
이것은 다분히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호손 제국과의 전쟁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르테미르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무척이나 소심한 놈이더군요.”
이렇게 아르테미르가 인정한 것은 전쟁에서의 승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우 같은 돼지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반면에 아르테미르가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전쟁에 대한 자신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킹죠가 소심하다는 것은 승산이 있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르테미르의 거만한 표정에도 페드로 공작은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말했다.
“아르테미르 공작, 이제 서로가 좀 더 솔직할 때가 되지 않았소.”
페드로 공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듯 아르테미르의 계속되는 허세가 눈에 거슬린 것일까?
결국 페드로 공작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요?”
아르테미르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원하는 것이라?”
페드로 공작은 더 이상은 아르테미르의 태도에 신경조차 쓰지 않겠다는 듯 그야말로 심각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그런 페드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고작 2만 5천의 오합지졸, 그것으로 호손 제국과의 전쟁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시오. 솔직히 경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소.”
아르테미르가 빙긋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아르테미르는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페드로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은 나보다도 경이 더 잘 알 터, 나를 도와준다면 황제의 자리를 제외하고 경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줄 의향이 있소.”
페드로 공작의 말에 귀빈실에 자리한 모든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은 비단 빅터나 3명의 공작들뿐만이 아니라 그린 후작과 자이 백작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가장 궁지에 몰린 것은 누구일까?
귀빈실의 모두가 같은 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르테미르였다.
어찌 보면 아르테미르는 지금 벼랑 끝까지 내몰린 상황이었다.
승산이 없는 전쟁이냐, 아니면 페드로 공작과 손을 잡느냐, 아르테미르에게는 이 두 가지 방법밖에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르테미르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3명의 공작들의 놀란 표정은 이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아르테미르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뜻이었다.
황제의 자리만 아니라면, 그 말은 곧 2인자의 자리를 내주겠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곧 계획대로 빅터가 황위에 오른다면 페드로 공작 자신보다도 더 우위의 자리, 즉 실권을 아르테미르에게 내어 주겠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에도 불구하고 아르테미르는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아르테미르가 여전히 딴청을 부리자 페드로 공작이 아르테미르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경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오. 진정 이번이 마지막 기회요.”
아르테미르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페드로 공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음, 마지막 기회라…….”
페드로 공작이 이런 아르테미르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테미르의 뒤에 서 있던 그린 후작이 작은 목소리로 아르테미르를 불렀다.
“전하.”
그린 후작은 감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것은 그린 후작뿐만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린 후작은 이곳의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지금 아르테미르가 페드로 공작과 손을 잡기를 바랐고, 지금 아르테미르를 부르는 그의 작은 목소리는 부디 페드로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그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순간, 아르테미르의 얼굴에도 여유가 사라졌다.
그리고 아르테미르는 똑바로 페드로 공작을 응시하며 말했다.
“원하는 모든 것이라, 허면 거기에 당신의 목숨도 포함되어 있소이까?”
다시 귀빈실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특히 그린 후작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빅터를 포함한 3명의 공작들의 얼굴에서는 살기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이곳이 적진의 한복판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단숨에 아르테미르의 목을 취했을지도 모른다. 그들 모두는 이런 생각으로 검을 움켜쥔 채로 저 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는 아르테미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뜻밖에 페드로 공작의 표정은 담담했고, 오히려 침착하게 손을 들어 동료들을 흥분을 가라앉혔다.
“진정 그대가 내 목을 원한다는 말이오.”
페드로 공작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르테미르는 여전히 페드로 공작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페드로 공작 역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원하신다면 드릴 수밖에요.”
페드로 공작의 말에 3명의 공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볼드릭 공작은 페드로 공작의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
“형님.”
그린 후작과 자이 백작 역시 이 뜻밖의 대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페드로 공작이 아르테미르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거사가 모두 끝나고 내 아들 빅터가 황위에 오르면 내 목을 그대에게 주겠소.”
페드로 공작의 말에 아르테미르 역시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그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페드로 공작이 확인하듯 물었다.
“허면 거사에 동참하시겠소.”
아르테미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 글쎄요. 거사가 끝난 다음이라…….”
아르테미르가 정말 고민스러운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음.”
그 순간 아르테미르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거사가 끝난 이후에 당신이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어떻게 믿겠는가?
페드로 공작이 고민하는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경은 황제가 원망스럽지 않소?”
페드로 공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망?”
페드로 공작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0년을 충성한 그대를 버리고, 늙은 마법사와 6명의 공작을 선택한 황제가 진정 원망스럽지 않단 말이오.”
아르테미르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글쎄요.”
이렇게 미적거리는 아르테미르의 태도에 페드로 공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아르테미르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면 적어도 조금의 속내는 드러낼 법도 했다.
아니, 페드로 공작의 생각에도 결과는 뻔했다.
이런 오합지졸의 병사들로 호손 제국과 전쟁을 할 바보는 없었다.
대체 무엇이 이자를 이토록 오만하게 만들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의 귀빈실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아르테미르도 페드로 공작도 아니었다.
나름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볼드릭 공작, 그가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마침내 울분을 터트렸다.
“형님, 이따위 말도 안 되는 협상을 저는 인정할 수 없소이다.”
옆에 있던 케론 공작이 애써 그를 말렸다.
하지만 볼드릭 공작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귀빈실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볼드릭 공작은 문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볼드릭 공작은 돌연 문 앞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놀란 자이 백작과 그린 후작이 황급히 검을 뽑았다.
동시에 빅터와 케론 공작, 에릭 공작이 검을 뽑았다.
모두의 시선이 일순간 볼드릭 공작에게로 향했다.
귀빈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볼드릭 공작은 천천히 뒤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볼드릭 공작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인물이 귀빈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르테미르가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그만, 그만. 모두 검을 거두시오.”
이런 아르테미르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상호 간의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페드로 공작이 손을 들어 동료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어서 검을 거두시게.”
페드로 공작의 말에 볼드릭이 다시 페드로 공작의 뒤로 물러나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볼드릭 공작을 시작으로 모두가 검을 거두자, 모두의 시선이 새롭게 등장한 한 인물을 향하고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인물, 그는 다름 아닌 황실의 근위대장 로이 백작이었다.
로이 백작 역시 귀빈실의 사람들을 확인하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황실 밖의 실권자들,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로이 백작은 공손히 이들을 향해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다섯 분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로이 백작의 인사에 4명의 공작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아르테미르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가 여기에는 어쩐 일인가?”
로이 백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전하께 폐하의 칙명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로이 백작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전하의 병사들이 수 삼 일 이내로 출병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르테미르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의 뜻은 잘 알겠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허면 자네는 이제 그만 돌아가 보시게.”
그러나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도 로이 백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테미르와 페드로 공작 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