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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dage & Marriage 1권




Bondage & Marriage 1화
01. 노아 프로스트, 이안 밀러 (1)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베타.
세상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로도 부족해 세 가지의 성(性)으로 다시 나뉘었다. 두 가지 구분에 더해 세 가지 구분으로 다시 나누어지니 얼핏 복잡해 보일 법도 하지만 실상은 간단했다. 남자와 여자로만 나눠지는 베타, 누구에게나 제 씨를 뿌릴 수 있는 알파, 누구에게나 씨를 받을 수 있는 오메가. 베타와 달리 나머지 두 인종은 임신에 있어서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아서, 알파란 존재는 여자조차 상대방을 임신시킬 수 있는 반면 오메가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이들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특징 또한 몹시 차이가 두드러졌다. 알파가 대개 강인하고 맹렬하면서도 상대를 찍어 누르려 하는, 한마디로 정복자나 짐승 따위와도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오메가는 부드럽고 말랑하며, 사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본능적으로 알파의 사나운 성미를 쉽게 누그러트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베타와 달리 이 두 인종은 애초에 서로에게 이끌리도록 설계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들이었다.
그러나 각 종의 이런 독특한 육체적 특징은 자연스럽게 알파로 하여금 오메가의 위에 군림하게 하는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 내었고,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지역에서 오메가란 이따금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곤 하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특히나 남자 오메가면 보통 그 취급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이른바 인권이란 것이 보편적인 개념이자 상식이 된 현대 사회에 와서도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오메가에 대한 편견은 강력했기에 고의이든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든 아직도 수많은 오메가들이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직도 자신이 오메가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이들이 많은 나라가 상당수였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노아 프로스트는 자신이 오메가로 태어난 것을 반기는 사람이었다. 타고난 배경에 긍정적인 성격까지 더불어 그는 단 한순간도 자신이 오메가임을 불평해 본 적도, 원망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오메가임을 반기다 못해 다행이자 행운이며, 자신의 매력으로 여겼다.
이 노아 프로스트란 사람은 누구인가. 올해로 나이 25살의 사랑스럽고 얌전하며 순종적인 오메가였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이 나라 구석구석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권세를 가진 프로스트 일가의 온 사랑을 독차지하는 막내아들이 아니던가.
거기에 취미는 고상하게도 바이올린과 피아노였으며, 반짝거리는 금발과 순한 파란 눈동자를 가진 전형적인 금발 미인으로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온갖 집안으로부터 러브 콜―이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 사랑을 듬뿍 담은 콜을 말하는 것이다.―을 받은 그 노아 프로스트였다. 순하고 얌전한 외모에 항시 단정한 옷차림까지, 어딜 보나 온실 속에서 온갖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고이 자란 오메가 도련님으로밖에 안 보이는 노아에게는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모습이 있었다.
아니, 노아와 어렸을 때부터 죽마고우나 다름없이 같이 자라 온 친구인 제임스는 그 모습을 알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전혀, 꿈에도 상상 못 할 모습이니 충분히 그 누구도 모른다고 할 법했다.
“키티, 제대로 안 빨래? 응? 고양이는 싫어? 우리가 암캐 취급을 꼭 해 줘야겠어?”
“흐읏, 우웅…….”
알렉스가 머리카락을 아프게 쥐어 흔들자 연신 콜록거리던 노아가 파란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며 제 입술과 뺨을 툭툭 치고 있는 성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알렉스는 나지막한 신음을 뱉으며 다리를 편하게 벌렸고, 노아는 고개를 열심히 움직여 가며 남자의 성기가 마치 맛있는 것이라도 되는 양 빨았다.
키티라는 호칭에 걸맞게 노아의 머리에는 고양이 귀가 씌워져 있었는데, 벌거벗은 몸은 부드럽고 희었지만, 상대적으로 깨끗한 상체에 비해 하체로 내려올수록 피부가 끈적끈적하게 말라 가는 정액이나 젤 따위로 반들거렸다. 특히나 엉덩이는 매 자국으로 붉어 흰 부분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노아에게 음담패설을 던지고 있는 여러 남자들까지 합하자 영락없이 여럿이서 한 명을 억지로 범하는 범죄 현장이었다.
“고양아, 뒷입도 소홀히 하면 안 되지. 헐렁거리잖아.”
“우, 흐읍……!”
노아의 뒤에서 허리를 꽉 붙잡고 거칠게 움직여 대던 남자가 붉게 부어 오른 엉덩이를 손으로 내려치며 윽박질렀다. 안 그래도 추삽질을 할 때마다 남자의 피부에 쓸려 쓰라리던 엉덩이를 세차게 맞자 노아가 움찔하며 뒤를 꽉 조였다. 그에 남자가 욕설을 뱉으며 더욱 세게 속도를 올려 박다가 잠시 멈추고는 이내 제 것을 빼냈다. 몇 명이나 뒤에 박아 댔는지 엉덩이 사이로 희멀건 액체가 뚝뚝 흐를 정도로 흥건했다. 룸 안에 있는 남자들이 대여섯 명에다, 그중 반은 일반인보다 사정량이 월등히 많은 알파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윽, 흐으……. 컥, 콜록…….”
알렉스의 성기를 거의 끝까지 삼켜 내다가 못내 괴로워 붉어진 얼굴로 뱉으면서 노아가 기침을 했다. 그러나 낄낄거리는 소리만 높아질 뿐, 룸 안의 그 누구도 노아를 전혀 불쌍하거나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들의 가학심만 부추겼다.
“키티, 정말 이럴 거야? 실망인데…….”
“이젠 구멍도 헐렁해서 박을 맛도 안 난다고.”
“뭐? 그럼 안 되지, 큰일이잖아.”
알렉스가 아직도 콜록거리고 있는 노아의 턱을 잡아 올렸다. 알렉스의 것을 빠느라 부은 입가가 침인지 뭔지 모를 액체로 번들거렸고, 발간 혀가 야하게 입안에서 조금 움직였다. 알렉스가 손가락으로 혀를 짓누르면서 짐짓 상냥한 말투로 윽박질렀다.
“어떻게 할 거야? 제대로 빨지도 못하고 뒤는 벌써 헐렁해. 난 아직 네 뒤에 박아 보지도 못했다고.”
“잘못, 잘못했……어요.”
“사과는 필요 없어. 내가 말했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암캐 취급 한다고…….”
점차 위협적으로 낮아지는 목소리에 노아가 헐떡거리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몹시 흥분하다 못해 발씬거리는 뒤에서는 정액과는 성질이 다른 말간 액이 스멀스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개처럼 박혀 보고 싶어? 아니 정말 문자 그대로, 개랑 하고 싶은 거야? 말만 해. 이 클럽에는 네가 좋아하는 큰 좆을 가진 개들이 있거든. 당장 말해서 네 헐렁한 구멍에 박게 만들 수도 있어. 알렉스의 말에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 싫어……. 그러나 싫다는 말과는 달리 그 상황을 상상이라도 하듯 뒤는 아까보다 더 젖어 가고 있었다.
“싫어? 어쩔 수 없네. 그럼 헐렁해진 구멍을 책임져 줘야지.”
알렉스가 고갯짓을 하자 노아가 범해지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던 남자 중 한 명이 룸 안에 있던 상자에서 딜도를 꺼내 들었다. 색상에 핏줄 묘사까지 아주 사실적인 물건이었다. 알렉스가 노아의 머리를 잡아 눌러 엉덩이를 높게 들게 만들자 여러 남자들이 보는 가운데 노아의 엉덩이 사이로 딜도가 밀어 넣어졌다. 헐렁해졌다는 말이 사실이기도 한 듯 별 무리 없이 살색의 물건이 거의 끝까지 밀려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노아는 숨을 헐떡이며 알렉스의 바짓단을 잡아당겼지만 몸을 버둥거릴수록 뒤를 들락거리는 딜도의 움직임이 빨라질 뿐이었다. 한참을 딜도를 가지고 놀다가 마침내 한 남자가 지퍼를 내리며 잔뜩 단단해진 제 것을 엉덩이에 비볐다. 아직 노아의 엉덩이에는 딜도가 물린 상태였건만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고 노아는 귀두가 문질러질 때마다 몸을 떨었다.
“키티, 좋지?”
“하으, 으…….”
“너도 뒤가 헐렁하니까 하나 더 넣어 줬으면 좋겠지?”
응? 하고 채근하며 알렉스가 노아의 머리카락을 쥐어 마구 흔들었다. 뒤에서는 남자가 엉덩이를 꽉 쥐어 벌리면서 금방이라도 삽입할 듯 제 것을 세게 문지르고 있었다. 얼른 대답하지 못해? 알렉스가 윽박지르자 노아가 발간 입을 열었다.
“네, 네에……. 흐윽, 하나 더, 넣어 주세요…….”
“말하는 거 봐라. 하나 더 뭘 넣어 달라는 건데?”
집요하게 캐물으며 뒤에 있던 남자가 억지로 손가락을 하나 밀어 넣자 노아가 나지막이 비명을 질렀다. 딜도의 끝을 잡아 벌리자 뒤가 열리며 발간 속살이 드러났고, 제 것을 주무르며 관전하던 남자 한 명이 휘파람을 불었다. 손가락을 넣은 채로 딜도를 쑤석거리자 바들거리는 손가락이 괴롭게 바닥을 긁었다. 마침내 노아가 남자들도, 그리고 자신도 원하는 야한 말을 다시 뱉기 위해 입을 열 때였다.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잔뜩 후끈한 분위기를 깨트리며 갑자기 어디선가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엉덩이를 흔들던 노아가 고개를 들었는데 노아를 조롱하던 남자들까지 벨 소리에 조용해졌다. 노아에게 펠라를 강요하던 남자, 알렉스가 소파 옆에 있던 테이블 위에서 핸드폰을 들어 건넸다.
액정에 뜬 ‘아버지’라는 이름에 노아가 안타까운 한숨을 쉬며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범하고 희롱하던 주위 남자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노아가 핸드폰을 받았다.
“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아까까지만 해도 남자의 성기를 빨면서 동시에 한꺼번에 두 개의 물건을 받아들이려던 야하고 선정적인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굉장히 얌전하고 순한 목소리로 노아가 대답했다. 네, 아뇨……. 네, 지금 대학교 친구들과 놀고 있었어요. 그럼요. 네, 금방 들어갈게요. 이따가 뵐게요. 전화로는 방긋방긋 잘도 웃으면서 대답한 노아가 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통화를 마쳤다. 무슨 내용의 통화인지 짐작한 알렉스가 시무룩하게 물었다. 아까 노아를 강압적으로 대하던 태도와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뭐야, 벌써 가 봐야 해?”
“응……. 오늘 일 있다고 하시더니 취소되셨나 봐. 같이 생일 기념 겸 저녁을, 으읏, 먹자고 하시네.”
엉덩이 사이에 박혀 있던 딜도를 빼내면서 잠시 신음한 노아가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타까운 건 노아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엎드린 노아가 범해지는 모습에 침만 꼴깍거리며 제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남자들도 몹시 실망하여 투덜거렸다.
“이게 뭐야. 오늘 생일 기념으로 갱뱅 파티 한번 하자고 해서 다른 사람들 약속도 취소하고 온 건데.”
“미안, 대신 오늘 술값은 내가 다 낼게.”
“그렇다면야, 뭐…….”
그들이 투덜거리면서도 노아에게 짜증을 내거나 더 이상 손을 대지 않는 이유는 이 클럽 ‘Tear’에서 강제적인 관계를 엄격하게 금하는 데다가 노아가 클럽의 VVIP이자 거의 아이돌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인기 많은 오메가라서기도 했지만, 같이 놀 때면 노아가 돈을 자주 내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아의 가족과 친구들이 이런 노아의 모습을 상상도 못 하는 것처럼 이 클럽의 지인들도 노아의 다른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들이 노아에 대해 아는 것은 단지 돈이 많고 얼굴이 반반하며 즐길 만한 가치가 있는 오메가라는 것 정도였다.
오랫동안 노아의 섹스 파트너로 같이 지내 왔던 알렉스가 내내 엎드려 있느라 약간 비틀거리는 노아가 일어나는 걸 돕는 동안, 내심 아쉬웠던 노아는 룸에 딸려 있는 욕실로 향하기 전에 살짝 눈을 내리깔면서 물었다. 알렉스랑 나는 샤워하러 갈 건데, 누구 한 사람 더 갈 사람 없어? 아무래도 영 부족해서…….
비싼 회원비,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지만 그만큼 못 들어가서 안달인 사람들이 차고 넘칠 만큼 물 좋은 이 SM 클럽의 인기 많은 오메가, 그것이 그 대단한 프로스트의 고명한 막내아들 노아 프로스트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 * *

욕실에서 한 탕 뛰고 난 뒤 클럽 ‘Tear’를 나온 노아는 알렉스와 함께 지하철을 향해 걸었다. 알렉스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노아는 지하철 보관함과 화장실에 볼일이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외모의 청년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모습은 제법 볼 만한 것이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시선을 던졌다.
지하철역에 도착해 노아가 알렉스의 뺨에 살짝 키스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알렉스는 아쉬움이 그득 담긴 손길로 네크라인이 시원하게 드러난 흰 목덜미며 어깨를 지분거리면서 노아를 놓아주질 않았다.
“나 늦어, 진짜로 가 봐야 해.”
“언제 또 만날 수 있어?”
“클럽에 올 때 되면 꼭 연락할게.”
보통은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은 알파였지만 노아에게 있어서는 달랐다. 알렉스는 노아가 거느리다시피 하는 많은 파트너 중 그저 유독 친하고 자주 만나는 한 명일 뿐이었고, 노아처럼 돈도 많고 외모도 예쁘장한 오메가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달라붙는 알파들은 하늘의 별처럼 수도 없이 많았다. 알렉스가 노아가 가장 자주 찾는 파트너인 건 그저 그가 노아의 취향을 아주 잘 맞춰 주기 때문이었다.
“꼭 연락해야 해.”
마지막까지 아쉬움 그득 담긴 인사를 남기는 알렉스에게 답변으로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한 뒤 노아는 그와 헤어져 지하철 보관함으로 향했다. 보관함 안에서 익숙하게 커다란 가방 하나를 꺼낸 노아가 화장실로 향했다. 반짝반짝하게 바닥을 닦고 있는 안드로이드형 청소 로봇을 지나 노아는 화장실 칸 중 하나 안으로 들어선 뒤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먼저 노아는 쇄골까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노출이 심한 상의와 화려한 은 목걸이를 벗은 뒤 잘 개고 정리해 가방 안에 넣었다. 다리에 찰싹 달라붙다시피 하는 검은 스키니 진이며 신고 있던 반질거리는 신발 역시 차례대로 벗었다. 그런 뒤 익숙하게 가방에서 아까 입은 옷과 비교하자면 매우 단정한 축에 속하는 바지와 와이셔츠, 그리고 니트를 꺼내 입었다. 마지막으로 세면대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가발과 귀걸이를 떼어 내고 나자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화사한 금발의 청년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변신에 가까운 탈의를 마친 뒤 가방을 싹 잠그고 다시 화장실을 나와 지하철 보관함으로 향한 노아가 가방을 넣은 뒤 대신 보관함 안에서 책이 두 세권 들어 조금 묵직한 가방을 둘러메고 다시 지하철역을 나왔다. 오메가 특유의 달콤한 냄새까지 추스르자 클럽에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순진하니 오로지 공부만 했을 것만 같은 도련님 같은 모습만이 남았다. 아까와는 달리 사람들이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게 그 증거였다.
역에서 나와 얼마간 걸어가니 조금 떨어진 곳에 익숙한 차가 보여, 노아가 미소 지으며 다가가자 얼른 차에서 운전기사가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노아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테일러.”
“별 말씀을요.”
나이가 좀 지긋한 운전기사가 막내 도련님에게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며 저택을 향해 차를 움직였다. 프로스트가의 저택까지는 고작 길어 봤자 20분 정도의 거리일 뿐이지만 테일러는 20분이 아닌 5분 거리라도 기꺼이 노아를 위해 운전할 용의가 있었다.
“참, 이번에 엠마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면서요? 축하해요.”
“허허, 감사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르던지 겨우 기어 다니던 게 어제 일 같은데 벌써 학교에 갈 나이더군요.”
서로 오랫동안 알아 온 사이라 이런저런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차가 저택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화려하니 잘 꾸며진 정원 가운데를 차로 지나, 저택 앞 넓은 앞뜰에서 내린 노아는 테일러에게 태워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마중 나온 자신의 고용인에게 가방을 넘겨주었다. 고마워요, 리사. 이번에도 노아는 상냥하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들어가 보니 테너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테너 대신 제임스가 마치 제 집인 양 편안하게 응접실 소파에 누워 노닥거리고 있었다.
“어서 와.”
“언제부터 제임스 프레넷이 제임스 프로스트가 된 거야?”
노아가 농담을 던졌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아와 친구였던 제임스는 완고하고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 집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프로스트가에서 보내곤 했는데 이제는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로 집을 들락거리고 있을 정도였다. 노아의 아버지인 테너 프로스트도 그런 제임스를 많이 아꼈다.
노아가 소파에 앉자 제임스가 아까부터 무슨 자료를 찾는지 열심히 뒤적이고 있던 책을 맹렬하게 넘겼다. 파라락 넘어가는 페이지 사이로 언뜻언뜻 기린이나 재규어 따위의 사진이 보였다. 노아가 옆에서 무슨 책인가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제임스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제임스는 유일하게 제 친구의 성적 취향과 더불어 노아가 매주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가는 곳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클럽 다녀왔어? 알파 냄새가 좀 나는데.”
“앗, 그래?”
알파와 오메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페로몬을 감지하지 못하는 베타인 제임스까지 냄새를 맡을 정도면 분명 제 아버지와 형들도 맡을 수 있을 게 뻔했다. 아마 아까 지하철역에서 알렉스와 헤어질 때 묻은 모양이다. 제임스가 마침내 책을 마구 넘기다 말고 헤 하고 입을 벌리며 밀림 오지의 야생동물들에 대한 페이지를 바라보는 동안 노아는 다시 샤워를 하기 위해 제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한 번 더 깨끗하게 샤워하고 향이 강한 샴푸를 사용해 혹시나 모를 알파 냄새를 완전히 지운 뒤 다시 응접실에 나오자 제임스는 아까 그 동물도감 책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워낙 자유로이 집을 드나드는 친구였기 때문에 갑자기 사라져도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저 제임스가 어디 갔나 보다 하며 노아가 좀 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마침 곧 가족들이 저택에 도착했기에 노아는 식사를 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버지, 오랜만에 뵈어요.”
요즘 테너가 바빠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터라 노아가 마지막으로 제 아버지를 본 게 2주 전이었다. 두 형들과 뭔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노아의 아버지, 테너 프로스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끼는 막내아들을 보고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노아도 활짝 웃으며 다가와 테너를 다정하게 포옹했다. 이 포옹은 테너가 알파인 두 아들과는 거의 하지 않는 방식의 인사였다. 곧 다른 가족들로부터 축하 인사가 건네졌다.
“노아, 어서 오렴. 생일 축하한단다.”
“생일 선물은 잘 받아 봤니?”
“생일 축하해요, 노아.”
노아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제 형들과 형수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선물 고마워, 윌. 형수님에게 임신 축하한다고 전해 줘, 윌. 그런데 나한테 아직 요트는 이르지 않을까……. 무슨 소리니, 너도 요트 하나쯤은 가질 때 되었지. 차 고마워, 베니. 그래, 운전은 꼭 테일러에게 맡기렴. 리비, 바이올린 감사해요. 이거 구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별말을요, 노아. 몹시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고 갔다.
첫째 형인 윌리엄과 둘째 형인 벤자민, 그리고 둘째 형의 아내인 올리비아에게 생일 선물 인사까지 일일이 마친 뒤에서야 노아는 겨우 자신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가족들과 앉아 있는 노아의 외모는 조금 튀는 구석이 있었다.
온통 검은 머리카락과 청회색 눈동자뿐인 프로스트 가문의 남자들 중 노아만이 유일하게 화사한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 외모는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어릴 적,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였다. 심지어 둘째 형인 벤자민과 결혼한 올리비아까지도 갈색 머리라 가족 중 노아의 외모는 유독 튀었다. 이렇듯 어머니처럼 오메가인 데다가 외모까지 쏙 빼다 닮았으니 알파인 아버지와 형들이 막내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로는 몹시 충분하고도 차고 넘쳤다.
자신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와 두 형이 심각하게 나누던 사업 이야기를 그만두었지만 노아는 딱히 그런 차별적인 행동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테너는 알파인 두 형과 오메가인 자신의 교육을 완전히 차별해 왔다. 알파인 두 형에게만 집중적으로 경영 수업을 가르친 것부터가 그랬다. 물론 노아도 어느 정도 관련 용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수업을 듣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교양으로 알아 두는 수준이다.
게다가 노아는 대학마저도 비즈니스와는 거의 상관없는 음대를 나왔다. 현재 벤자민의 부인 올리비아도 노아가 다니던 음대의 조교수로, 노아를 데리러 왔던 둘째 벤자민이 우연히 보고는 한눈에 반해 결혼한 케이스였다.
보통 상류층에서는 베타면 모를까 오메가인 자식에게는 사업을 잘 물려주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테너는 그 경우가 유독 심했다. 노아야 자신의 아버지를 몹시 사랑했으므로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테너는 굉장히……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얼마나 그 수준이 심각한고 하니, 노아가 1년 전에 대학교 졸업을 했는데도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제 막내아들을 집 안에만 머무르게 하는 정도였다. 테너에게 있어서 오메가란 집 안에서 얌전히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테너의 사랑이 각별했기에, 만약 노아가 테너의 지극히 ‘알파다운’ 교육 지침에 반발해 자신도 형들처럼 경영 수업을 받겠다느니 자신도 아버지 사업을 운영하겠다니 했다면 테너는 썩 내켜 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에게 작은 사업체 하나라도 물려주었을 터다. 그러나 노아는 형들처럼 매일매일 바쁘게 일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아버지에게서 일주일에 한 번씩 다 쓰지도 못할 금액의 용돈을 받아 빈둥거리면서 노는 한량 백수 생활이 몹시 마음에 들었기에 고분고분하게 테너의 말을 따랐다.
이내 시작된 저녁 식사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테너가 노아의 25번째 생일을 축하하면서 덕담을 나누었다. 참고로 테너가 노아에게 선물한 것은 아주 전망이 좋은 여름 별장 한 채로, 노아는 나중에 아주 요긴하게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별장에서 하는 것도 즐겁지 않겠는가. 중간에 올리비아가 자신의 두 번째 임신 사실까지 알리면서 즐거운 분위기가 아주 고조되었을 무렵, 테너가 목을 가다듬으며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음을 표현했다.
“노아. 너도 이제 벌써 스물다섯 살이 되었구나. 물론 내가 보기에 넌 아직도 어린아이 같다만…….”
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테너가 몹시 관대하고도 너그러운 미소를 보냈고 노아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테너는 종종 노아를 알파와 키스는커녕 손도 못 잡아 본 아이처럼 대하곤 했다. 아마 테너가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대학교 동창 모임’의 실상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절대 놀라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으리란 걸 노아는 매우 확신할 수 있었다. 잠시간 노아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테너가 느닷없이 거대한 폭탄을 날렸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 주 월요일에 네 약혼자인 이안 밀러와 약속을 잡았단다. 약속이 있다면 취소해 놓거라.”
테너의 말에 노아는 수줍은 미소를 지은 그대로 얼어붙었고, 벤자민은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다가 놀라 흰 테이블보에 커다란 보라색 자국을 남길 정도로 거나하게 뿜었다. 윌리엄은 어린 송아지의 가장 연한 육질로 만든 스테이크를 썰다가 품위 없이 나이프로 접시를 삑 소리가 나게 긁었으며 올리비아는 입덧 때문에 음식 대신 과일을 씹다 사레가 들어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전에 아무 언질도 없이 갑자기 노아의 약혼자라니요?”
테너를 닮아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가 없는 편인 윌리엄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점잖게 따졌다. 테너는 가족들의 반응이 오히려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
“스물다섯 살이면 결혼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노아도 이제 믿음직한 알파와 가정을 꾸려야지.”
“하지만 노아의 의사는 어쩌고요?”
“일단 만나 보면 노아도 마음에 들어 할 거다. 내가 본 젊은 녀석 중에 그나마 알파다운 알파였어.”
제 아버지의 폭거에 벤자민이 매우 어이가 없어 기절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딱 벌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노아는 발끈 성이 올라 아버지에게 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결정을 따지려는 둘째 형의 발을 밟아 입을 막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의 25번째 생일 파티에서 열 받은 아버지가 둘째 형에게 골프채를 휘두르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 게다가 제 아버지는 이미 주치의에게 혈압을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은 상태였다.
“약……혼자요……?”
말이 약혼자지, 이쪽 세계에서 약혼했다는 건 집안 사이에 이미 말이 다 오고 가 결혼할 사람이 정해졌다는 걸 의미했다. 벤자민이야 원래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올리비아와 연애해 결혼까지 이르렀지만, 윌리엄이 순순히 테너가 정해 준 짝과 결혼했으니 노아 자신도 윌리엄처럼 정략결혼을 하게 되리란 건 뻔했다. 프로스트가처럼 권세가 대단한 집안에서 연애결혼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 걸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전혀 예상치 못한 통보는 몹시 충격적이었다. 그 시기가 예상보다 너무 일렀다.
물론, 참고로 말하자면 벤자민의 결혼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첫째인 윌리엄보다도 먼저 결혼한 것도 테너에게는 못마땅한 일인데 거기에 더해서 결혼도 전에 올리비아를 임신시켜 버린 탓에 벤자민은 완전히 뚜껑 열린 테너에게서 도망치다가 계단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져 결혼식에는 목발을 짚고 들어가야 했다.
결혼식 내내 테너의 표정이 얼마나 험악했던지, 프로스트 사장의 성격이 매우 다혈질임을 잘 아는 하객들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들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패 놓은 거냐며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윌리엄이 벤자민과는 다르게 테너가 주선한 집안의 장녀 이자벨라와 차근차근히 ‘프로스트식’ 정식 절차를 밟아 결혼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테너는 한 1년은 계속 화가 나 있었을 것이었다.
“이안 밀러라면 이번에 새 사업 협약을 체결한 그 밀러 말씀입니까? 설마 그 터무니없이 불공평한 협약 조건의 이유가 노아와의 약혼은 아니겠지요?”
“맞다. 여간 강단이 있는 게 아니라 약혼을 하게 구슬리느라 좀 힘들었지.”
“아버지, 그건…….”
어디로 들어도 결혼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다가 약혼을 맺게 만든 것으로 들려 평소에는 테너의 말에 별말 없이 따르는 윌리엄조차 반발하려 했지만 노아가 먼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제 약혼자의 이름이 이안 밀러인가요? 어떤 사람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 노력 덕분에 테너는 이안 밀러가 얼마나 훌륭한 알파인지 설명하느라 두 아들이 감히 반항하려는 모습을 아슬아슬하게 놓쳤다. 윌리엄과 벤자민도 뒤늦게 막내의 생일 파티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 뒤로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테너에게만 즐겁고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노아는 당사자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성사된 약혼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두 형들에게 즉시 둘러싸였다. 올리비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노아에게 보내고는 입덧이 심해진 탓에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에게 독단적인 면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어. 최소한 약혼을 맺기 전에 노아에게 좋다 싫다 이야기는 먼저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냐?”
와인도 들어가고 열도 받아 얼굴이 완전히 벌겋게 변한 벤자민이 따지고 들었다. 보통은 테너의 말에 묵묵히 따르는 편인 윌리엄 역시 이건 아니라며 노아를 설득하려 들었다.
“막내야, 네가 싫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단다. 나도 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보마.”
“난 괜찮아. 아버지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러나 그 말에 오히려 벤자민은 더욱 화가 나 씩씩거렸고 윌리엄은 자신의 막내 형제에게 근심 어린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노아는 본인보다도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형들을 잘 도닥이고 타일러서 방으로 돌려보냈다. 일단 한 번 만나는 것쯤이야 큰일도 아니라는 노아의 말에도 벤자민과 윌리엄은 몇 번이고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노아의 편을 들어 주겠다며 못내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약혼자라니…….”
형들에게는 잘 둘러댔지만 그래도 나름 충격을 받은 탓에 자신의 방에 돌아온 노아가 털썩 침대에 누웠다. 이안 밀러. 몇 번 아버지가 그거 참 괜찮은 녀석이라고 언급한 걸 스치듯이 들은 기억은 있지만 정말 그뿐이다. 게다가 자고로 아버지의 입장에서 괜찮은 사람과 다른 사람 입장에서 괜찮은 사람은 많은 차이가 있지 않은가. 머리가 복잡하기도 했고, 또 갑자기 하루아침에 생긴 제 약혼자가 궁금해진 노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터넷에 접속했다.
노아가 밑도 끝도 없이 약혼자를 마련해 두었으니 만나라고 하는 테너의 말에 반발하지 않은 것은 단지 시끄럽고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어서였다. 항상 벤자민은 노아에게 그렇게 아버지 말대로 얌전히 살 필요 없다고, 지금 시대가 언제인데 네가 이렇게 지내야 하냐며 너도 대들라고 안타깝게 말하곤 했지만 그건 노아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노아는 정말로 지금의 백수 한량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이따금씩 테너가 노아조차도 갑갑하게 느껴지는 행동을 할 때도 있었다. 노아도 테너에게 아주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아와 달리 벤자민이나 윌리엄이 잘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테너는 강하게 나가면 나갈수록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반발하는 사람이란 점이었다.
아버지의 처사가 좀 심하다 싶을 때마다 노아는 일단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테너 옆에 앉아 매우 시무룩하고 풀이 죽은 얼굴로 그 말 거두어 주시면 안 되느냐고, 혹은 이렇게 해 주시면 안 되느냐고 조곤조곤하게 말하기만 하면 테너가 엄했던 마음이 풀려 ‘그런가……? 이건 내가 좀 심했나? 하긴 요즘 젊은이들은 내 때와는 다르긴 하지’ 하며 푸딩처럼 말랑해지시는 걸 뭣 하러 굳이 들이박아 성나게 하나 이 말이지…….
“사진이 없네…….”
검색 결과를 죽 살펴보면서 노아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신문 기사를 살펴보아도 이안 밀러가 운영하는 회사가 얼마나 잘나가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글들뿐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밀러의 기업이 프로스트 소유의 기업과 꽤 규모가 큰 협약을 맺어 주가가 급상승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윌이 언급한 ‘터무니없는 협약 조건’이 바로 이거구나.
“일단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만나 보고 마음에 들면 좋은 것이고,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속 해 왔던 것처럼 이 결혼 하지 않으면 안 되냐고 테너에게 눈물로 호소하면 될 일이다.
슬슬 졸려 하품을 하면서 노아가 인터넷을 껐다. 이안 밀러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다 보니 어느덧 잘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기껏 알렉스가 자신을 위해 ‘파티’도 열어 줬는데 너무 급작스럽게 집에 가게 된 일도 있고 해서 노아가 알렉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아! 저녁 식사는 잘 했어?
“응, 너는?”
―난 뭐 대충 때웠지.
피곤한지 알렉스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알렉스는 오후에는 ‘Tear’에서 지냈고, 오전 시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곤 했던지라 슬슬 잠잘 시간이 가까워지는 지금에서는 조금 졸린 모양이었다.
“파티 준비해 줬는데 중간에 그렇게 나가게 돼서 미안해.”
―미안할 게 뭐 있어? 사정 있으면 그만두고 갈 수도 있는 거지. 술값 내줘서 애들이 되게 좋아했어. 걱정 마.
알렉스는 노아의 섹스 파트너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집안 단위로 친한 제임스 프레넷이나 혹은 같은 학교 출신의 친구들과는 여러 가지 의미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친구다. 다른 사람과는 쉬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도 했고, 성격이나 섹스 취향 등 여러 가지로 잘 맞았기 때문에 노아는 알렉스가 퍽 좋았다.
알렉스와 잡담을 나누면서 노아는 잠시 약혼에 대한 이야기를 알렉스에게 할까, 고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뭐, 아직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노아는 알렉스에게 굿나잇 인사를 하고 정말로 잠을 자기 위해 꾸물꾸물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