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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
이웃집 영웅 폴 1(1화)
프롤로그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영웅이 되셨습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다. 별 이유는 없었다. 정말로 어떻게 하다 보니까 난 어느새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도시마다 내 동상이 세워지고 음유시인은 내 이름을 노래했다.
하늘이 내린 소명?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한낱 사냥꾼이던 내가 만인의 영웅으로 불리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누군가의 교훈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도 신기해 이렇게 기록을 남기려 하는 것이다. 혹 뭔가 깨닫는 것이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읽는 사람의 몫일 뿐.
그럼 지금부터 내가 걸어왔던 발자취를 더듬어 보겠다.
―만인으로부터 영웅이란 과분한 칭호를 받는
한낱 평범한 사람, 폴
1장. 사냥꾼과 학살자(1)
작은 풀벌레조차 숨죽인 침묵. 긴장으로 인해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풀숲에 숨은 채 연신 사위를 살피는 나. 자칫 긴장의 끈이라도 놓치면 큰일이다. 이곳은 이 일대에서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 녀석의 영역.
녀석을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잔혹한 학살자.
이름을 들어 보면 뭔가 대단한 몬스터라도 하나 있을까 착각하기 쉽지만 녀석은 한낱 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곰 한 마리 때문에 마을은 지금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지금으로부터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녀석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곳 바르데인 산맥의 주인은 바로 오크 무리였다.
단순, 무식, 과격의 대표 주자인 오크. 인간을 잡아먹고 때로는 여인을 납치해 종족 번식에 사용하는, 인간으로서는 씨를 말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치를 떠는 몬스터였지만 이곳의 오크는 그런 일반적인 오크와는 달랐다. 그리고 그중 오크 족장은 어른들의 말을 빌리자면 웬만한 사람 뺨치게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어디서 그런 돌연변이가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마을은 평화로웠다. 족장은 무리하게 마을을 공격하려 하지 않고 일정한 식량을 상납 받는 대신 다른 몬스터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켜 주었다.
하지만 그러던 것이 20년 전 갑작스럽게 오크들이 없어지더니 10년 전부터는 그 자리를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곰 한 마리가 떡하니 차지해 버린 것이다.
이전의 오크와는 달리 그야말로 단순, 무식, 과격한 그놈은 닥치는 대로 마을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였다. 많은 사냥꾼이 녀석을 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 마찬가지로 사냥꾼이었던 우리 아버지까지 녀석을 잡으려다 돌아가셨다.
이제는 내가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녀석을 잡으려 한다.
빠드득!
저절로 이가 갈렸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비록 남들이 말하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하나뿐인 아버지였다. 나를 낳고 바로 돌아가셨기에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핏덩이를 안고 젖동냥까지 다니며 나를 키우셨던 아버지. 언제나 넉넉지 못한 살림에 굶는 일도 다반사였지만 그래도 나에게 있어서는 누구보다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셨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녀석에게 당하셨을 때, 난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난 무모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녀석의 가죽을 벗기고 그 살을 씹어 먹고 싶었지만 이대로 녀석을 만나면 죽음뿐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나는 필사의 각오를 다졌다. 사냥꾼이 되기를 누구보다 싫어했던 나는 자진해서 사냥꾼이 되었다. 아버지의 당부를 잊었다.
아버지는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냥꾼은 되지 말라고.
아버지는 늘 후회하셨다. 자신이 사냥꾼이 된 것을 말이다. 언제나 밖에 나가서 생활을 해야 하는 만큼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냥꾼이란 직업이었다. 비록 그러한 직업 때문에 숲에서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었지만, 결국 그러한 직업 때문에 어머니는 나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여 동안 집을 비워야 할 때가 많았기에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을 땐 어머니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고, 나 역시 거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고 했다. 결혼했을 당시부터 깊은 상처로 인하여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던 어머니였기에 아버지는 그녀의 약값을 벌기 위해 더더욱 열심히 일을 한 것이었지만, 결국 그로 인해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술이 들어갈 때면 늘 그때를 회상하셨던 아버지.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다짐했었다. 나는 결코 사냥꾼이 되지 않겠다고.
훗. 하지만 역시 사람 일은 모른다고, 내 스스로 사냥꾼의 길을 가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때문에 이 잘생긴 얼굴을 갖고도 여태 여자 친구 하나 못 만든 것이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던 어머니를 닮아 나 역시 얼굴 하나는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았지만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역시 이대로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야 할 팔자인가 보다. 뭐니 뭐니 해도 여자들에게 남자란 얼굴뿐만이 아니라 안정된 직장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는가. 거기다 정시 출퇴근에 퇴직금, 연금까지 있다면 두말할 나위 없는 신랑감. 하지만 난 그것들 중 속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쓸데없는 미련을 버렸기 때문일까? 나는 이미 마을이 인정한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냥꾼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활쏘기부터 함정까지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빠른 속도로 익혔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필사적으로 익혔다.
그리고 1년 전, 나는 녀석을 잡기 위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은 등에 남은 네 줄의 긴 흉터뿐. 만일 녀석이 배가 부르지 않았던들 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당시의 난 녀석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녀석은 이미 일반적인 곰이 아니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상처를 입고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마을로 돌아온 지 한 달 후, 계속되는 인명 피해에 어쩔 수 없었는지 이곳의 영주인 밀자크 남작은 기사들을 보내왔다. 무려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청원에 드디어 답을 보내 준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그것은 영지민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속되는 인구 감소에 세금이 줄어든 것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돼지 같은 새끼라면 영지민들의 목숨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을 테지.
아무튼 그렇게 파견 나온 기사들. 거들먹거리는 꼴이 정말이지 아니꼬웠지만 그래도 기사였기에 우리들은 그들이 녀석을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녀석을 잡기는커녕 살아 돌아온 기사는 한 명뿐이었다. 그나마도 거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모습으로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결국 숨을 거두었다.
마을은 충격에 휩싸였다. 기사들까지도 당해 낼 수 없다면 이제는 영영 녀석의 눈치만 살피며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난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래도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녔기에 어지간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기사들이 일반인과 다른 점 역시도 잘 알았다. 기사들의 검은 마나인지 뭔지에 의해 두꺼운 나무도 한칼에 잘라 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 그럼에도 기사들은 녀석에게 맥없이 목숨을 잃었다.
녀석의 가죽이 그런 기사들의 검에도 뚫리지 않을 정도란 말인가.
그때부터 난 철저한 준비를 했다. 전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녀석을 벨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녀석을 죽여야만 했다.
몇 달을 꼬박 지새우며 나는 숲에다 온갖 함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녀석을 잡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일부러 녀석의 영역에 내 흔적을 남겼다. 자신의 영역에 그 누구라도 침입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 녀석이라면 금방 발견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생각을 마치기가 무섭게 온 숲이 떠나가라 울리는 녀석의 괴성이 들려왔다.
쿠오오오오오!
놀란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고, 나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이제부터가 진짜다. 여기서 한 치의 어긋남이라도 생긴다면 내 목숨 역시 무사하지 못하리라.
쿵! 쿵! 쿵!
내가 남긴 흔적을 따라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녀석의 움직임이 발바닥을 통해 느껴진다. 이 거대한 울림. 과연 잔혹한 학살자라 부를 만큼 엄청나다.
녀석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벌써부터 숨이 가빠 오고 절로 다리가 떨려 왔다. 그만큼 녀석이 주는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녀석이 날 보고 날 추격해야만 했다. 영리한 녀석인 만큼 어지간한 함정으로는 어림도 없다. 내가 미끼가 되지 않고선 함정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찰나가 찰나가 아닌 듯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
우지끈!
크워어어어어!
눈앞에 있는 내 몸통만 한 나무를 그대로 박살 내며 녀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5미터가 넘는 몸길이. 내 머리통보다 더 커다란 앞발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발톱이 햇빛을 받으며 날카로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보통 곰과는 달리 은빛의 털을 가진 녀석. 바로 저것이 기사들의 검도 막아 내는 그 가죽일 것이다.
이어진 흔적을 따라 이곳까지 도착했지만 내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곧바로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는 녀석. 녀석을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이유 중 하나였다. 녀석은 힘만 센 무식한 놈이 아니라 이토록 영리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너는 곰 새끼다!’
나는 녀석을 보자 괜스레 등에 난 상처가 욱신거림을 느꼈다.
‘이 상처의 대가는 네놈의 가죽이다!’
나는 녀석의 모습에 지체하지 않고 활시위에 화살을 메긴 뒤 그대로 녀석의 눈을 향해 발사했다. 아무리 가죽이 두껍고 질기다 해도 눈은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저 영리한 놈 역시도 알고 있었나 보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가려진 녀석의 앞발에 맞고 튕겨 나오는 화살. 나는 녀석에게 한 방 먹여 주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이내 망설일 것 없이 그대로 뒤돌아 달려 나갔다.
크워어어!
그리고 그런 내 뒤를 녀석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쿠과과과과!
아무리 내가 날쌔다고는 하지만 사람과 곰의 달리기는 비교할 것이 못 됐다. 보통 곰이 느리다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곰이 전력 질주를 하면 사람을 따라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아슬아슬하게 녀석과의 거리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곳은 드넓은 평지가 아닌 숲 속. 나무가 촘촘히 서 있었기에 녀석은 그런 나무를 일일이 부러뜨리면서 달려와야만 했다.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닐 게다. 하지만 그 박력만큼은 엄청나, 나는 예상했음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달리는 루트는 이미 내가 전부터 함정을 설치해 놓은 곳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쫓기는 도중에도 침착하게 함정을 작동시켰고, 녀석은 화살 세례부터 시작해 올가미, 또는 통나무 등에 수도 없이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결코 녀석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녀석의 화만 더 돋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훗, 멍청한 곰 새끼. 그렇게 화내면 화낼수록 네놈의 죽음도 가까워지는 거다.’
나는 미친 듯 발광하며 날 잡기 위해 돌진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리 영리하다고 해도 결국은 곰이다. 한번 꼭지가 돌면 영리함이고 뭐고 필시 어떻게든 날 잡으려 할 것이다. 내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
나는 준비해 둔 클라이맥스가 있는 곳으로 녀석을 유인했다.
그곳은 숲 속에 위치한 작은 공터였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 멈춰 선 채로 녀석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크르르르르!
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녀석 역시 낮은 소리와 함께 천천히 다가왔다. 하지만 그간 쌓인 분노는 녀석을 더는 신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잠시 날 살피는 듯하더니 그대로 날 향해 달려들었다.
“……!”
나는 자세를 한껏 낮추며 달려드는 녀석에 맞설 준비를 하는 척했다. 짐짓 의연한 듯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지만 사실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날 후려칠 것만 같은 저 무시무시한 앞발을 보니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섣불리 움직여서는 녀석을 끌어들일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는 마음속으로 외치며 열심히 거리를 계산했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이 날 덮치려는 순간, 나는 있는 힘껏 그 자리를 박차고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