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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2화)
1장. 사냥꾼과 학살자(2)
쿠르르르르!
쿠워어어어!
그와 함께 갑자기 멀쩡했던 땅이 꺼지며 그 속으로 녀석이 사라졌다. 나는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 새도 없이 재빨리 녀석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달려갔다.
무려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 홀로 삽질을 한 끝에 완성한 함정이었다. 깊이만 7미터가 넘는, 그야말로 내 피와 땀이 스며든 곳이었다. 아무리 거대한 녀석일지라도 이 깊이라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
“헤헤! 어떠냐, 이 곰 새끼야! 설마 이런 함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어디 빠져나올 수 있으면 해 보시지.”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잠시 어리둥절한 듯 주위를 살피던 녀석이 그런 내 목소리를 듣더니 갑자기 미친 듯 발광하기 시작했다.
쾅! 쾅!
마구 벽을 때리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녀석의 앞발에 의해 흙덩어리가 계속해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녀석이 빠져나올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서둘러 준비해 놓은 것을 사용했다.
공터 옆에 쌓아 둔 오크통으로 간 나는 그중 한 개를 꺼내 마개를 열고 그 안의 내용물을 녀석을 향해 붓기 시작했다.
알싸하면서도 뭔가 이상야릇한 냄새를 풍기는 검은 액체. 그것은 그동안 모아 온 전 재산을 털어 산 공성용 기름이었다. 군수 물품이라 구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 못 구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한 통을 녀석을 향해 부은 나는 준비해 둔 횃불을 들고 비장하게 소리쳤다.
“곰 새끼, 그간 네놈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복수다. 그만 뒈져라!”
그러고는 난 들고 있던 횃불을 망설임 없이 녀석을 향해 던졌다.
화르르르륵!
과연 비싼 돈 주고 산 기름답게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 녀석은 그 뜨거움에 곧 자지러지듯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크워어어어어!
하지만 과연 기사들의 검을 막았던 무적의 가죽이었다. 불은 기름만을 연료로 타오를 뿐, 결코 녀석에게로 옮겨 붙지는 않았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최악의 가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가정에는 이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녀석을 죽이려는 방법은 결코 불에 태워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녀석을 속에서부터 익히려 했다.
“네깟 놈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 봐야 결국에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물일 뿐이지. 훗.”
가죽이 아무리 두껍고 질겨 봐야 뼈 속까지 치미는 열기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녀석이 직접 몸소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기름은 많다. 통돼지, 아니 통곰새끼 바비큐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익혀 주마.
무려 반나절 동안이었다. 나는 준비해 둔 기름을 모두 쏟아 부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불이 더 잘 타오르도록 하기 위해 모아 놓은 돼지비계까지 집어넣었다.
불은 그야말로 활활 타올랐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살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열기였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아무리 녀석이 대단하다고 해도 저 속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비단 치미는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일 내가 저 속에 있었다면 불에 익기도 전에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
그런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몇 시간 전부터 미친 듯 요동치던 녀석에게선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숲 속에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타오르는 불꽃에 의해 요동치는 바람소리뿐.
“다 익었나?”
서서히 불꽃이 사그라질 때쯤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마음으로는 녀석이 죽었다는 것을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워낙 대단했던 녀석이었기에 설마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열기에 바짝 타 버린 마른땅 위에 조심스럽게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그을음을 뒤집어쓴 은빛의 거대한 동체가 잔뜩 웅크린 채 미동도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조차 없이 녀석은 그대로 죽어 버린 듯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크르르르르르.
나는 들려오는 소리에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뭐야!’
그것은 잔뜩 억눌린 신음 소리와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간 자신을 궁지에 몰아 놓은 누군가를 향한 매서운 분노인지도 몰랐다.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녀석을 황망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 살아 있다니!”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할 말을 잃어야 했다. 그 질식할 것만 같은 열기 속에서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저게 과연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물은 맞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거대한 동체를 일으키자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흙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무너지는 흙더미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마치 땅 밑에서 솟아오르듯 떡하니 모습을 드러내는 그 가공할 만한 녀석의 앞발을 바라보아야 했다. 녀석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천천히 땅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드드드득!
마치 개의 그것과 같이 온몸을 떨며 묻어 있는 그을음을 털어 버리는 녀석.
“하?”
나는 그 모습에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입을 쩍 벌려야 했다. 그을음을 털어 버린 녀석의 모습이 전과 거의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실패……라는 것일까?
암담함이 밀려왔다.
‘짧았던 20년의 삶. 여기서 마감하는구나, 폴.’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털썩.
삶을 포기하던 내 귀로 광명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줄로만 알았던 녀석이 갑자기 휘청거리며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나는 다시금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과연 대단해, 그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니. 하지만 네 녀석이라도 아주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군.”
이것은 기회였다. 비록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일이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녀석이 많은 데미지를 입은 이때가 어쩌면 녀석을 없앨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몰랐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숏소드를 꺼냈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그 이후는 없어.’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아무리 녀석이 상처 입고 빌빌거린다고는 하지만 그 앞발에 스치기만 해도 나는 최소 중상이었다. 저번과 같은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녀석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녀석의 약점은 눈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녀석의 눈을 노리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녀석 역시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는 이상 그곳은 필사적으로 방비할 터였다.
‘뭔가 다른 곳이 없을까?’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도 너무나 아까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새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듯 녀석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 눈에 녀석의 어느 한 부분이 마치 클로즈업되듯 들어왔다.
‘아차! 과연 그렇군. 그곳이었어!’
나는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곳이라면 녀석도 별수 없으리라.
“흐아아아압!”
나는 그 순간 숏소드를 들고 녀석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기회는 단 한 번! 결코 실수란 있을 수 없다!
크아아아아아아!
녀석 역시 그간 쌓인 분노를 털어 내듯 엄청난 굉음을 지르며 날 향해 그 거대한 앞발을 휘둘러 왔다. 하지만 과연 영리한 녀석이었기에 남은 한 발로 자신의 얼굴을 방어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네놈은 내가 눈을 노릴 거라 생각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어림없다!’
나는 녀석의 앞발이 짓쳐 드는 순간, 등허리로 바닥을 향해 미끄러지듯 몸을 던졌다.
치지지지직!
“크윽!”
바닥의 자갈들이 등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가는 짜릿한 고통에 나는 절로 신음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나는 비로소 목적한 곳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곳은 바로 녀석의 다리와 다리 사이!
나는 지체 없이 녀석의 사타구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아뿔싸!’
그러나 무엇을 본 나는 두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충격에 휩싸여야 했다.
‘없다! 없어!’
수컷이라면 종을 가리지 않고 응당 있어야 할 그 무언가…… 자식을 낳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필요한 두 개의 알주머니가 녀석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랬다. 녀석은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었던 것이다.
‘이런 실수를!’
당연히 나는 녀석이 여태껏 수컷이라 생각해 왔다. 그 누구도 녀석이 암컷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포악한 녀석을 누가 암컷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다못해 새끼라도 있었다면 눈치 챘을 것을…….
크르르르.
마치 ‘너 뭐 하냐?’라는 식으로 날 내려다보는 녀석. 곰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지금 내 눈에는 녀석의 얼굴이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 고정관념이 무서운 걸까?
“하하, 하하하.”
나는 그저 허탈한 웃음을 내뱉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날 향해 곧 녀석의 그 무지막지한 뒷발이 덮쳐 왔다.
‘이대로 수박 깨지듯 터져 죽는구나.’
거의 체념하는 나. 한데 그때였다. 나의 눈은 죽음을 떠올리면서도 뭔가를 찾은 듯 빛이 번뜩였다.
‘어쩌면?’
내 시선이 향한 곳. 그곳은 바로 녀석의 앙증맞은 꼬리에 가려진 그 어떤 은밀한 곳이었다. 마치 수줍은 새색시처럼 핑크빛 꽃잎을 살짝 오므리고 있는 그곳. 어떤 생물이든, 남자든 여자든 할 것 없이 먹는 입이 있다면 반드시 필요한 그곳.
나는 지체할 것 없이 그곳을 향해 내 숏소드를 찔러 넣었다.
푸욱!
귀가 청아해질 정도로 무척이나 명쾌한 소리와 함께 마치 그곳이 자신의 본래 자리였다는 듯 거침없이 쏙 들어가는 숏소드.
“…….”
“…….”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나도, 또한 녀석도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거 너무 쉽게 들어가는 거 아니야?’
마지막 구명의 동아줄이라 생각했건만 너무나도 쉽게 빨려 들어가 버린 숏소드를 보며 난 뭐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만 했다. 그리하여 잡고 있던 손잡이를 나사못 돌리듯 비틀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녀석이 직접 몸소 표현해 주었다.
크오오오오오!
크기가 5미터가 넘는 곰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보았는가. 나는 곰이 저토록 높이 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겨를도 없이 중력의 법칙에 의해 다시금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녀석을 보며 황급히 자리를 피해야 했다.
쿠과과과과!
쿠워! 쿠워어어어!
녀석은 땅으로 떨어지자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녀석. 앞발톱이 다 닳도록 미친 듯 바닥을 긁어 댔다.
그 모습에 괜스레 마음 약해지는 나였다.
“너, 너무 심했나? 하하하.”
머쓱하게 웃어 보지만 그것으로 녀석의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은 그렇게 한동안 발광을 해 댔다. 숏소드가 녀석의 항문에 박혀도 제대로 박혔는지 그 요란 법석을 떨어도 결코 빠져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지막의 확인 사살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크워어어어.
이렇게 억울하게 죽는다는 게 한이 된 것일까? 녀석은 구슬픈 울음을 끝으로 한 줄기 눈물방울과 함께 그 거대한 동체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쿵!
항문에 숏소드를 꽂은 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던 잔혹한 학살자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드디어 아버지의 원수를 없앴습니다! 기뻐하십시오, 아버지!’
그러나 비록 웃고 있으나 내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아버지였기에. 복수를 했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 기쁨. 하지만 후회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나는 한동안 녀석의 시체를 곁에 두고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나도 참 청승이군. 뭐 하는 짓인지.”
한참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마음을 정리한 나는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일찍 결혼했으면 애 아빠가 될 나인데 이런 곳에 주저앉아 울기나 하고 있으니 스스로도 무안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 녀석을 어떻게 한담?”
나는 거대한 녀석의 시체를 바라보며 잠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걸 옮길 수도 없고. 천생 나 혼자 가죽을 벗겨야 하나?’
하지만 녀석의 가죽은 기사들의 검에도, 그 뜨거운 열기에도 멀쩡할 정도로 질긴 가죽. 제대로 벗겨질지도 의문이었다. 물론 그 가죽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긴 했지만.
한데 이게 웬걸? 막상 녀석의 가죽을 벗기려 드니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질기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생각보다’라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저번에 녀석을 잡기 전 연습 삼아 오우거 한 마리를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잡은 적이 있었는데 녀석의 가죽은 당연 오우거보다는 훨씬 질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열기 속에서 버틸 정도는 아닌 듯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혹시 죽어서 그런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추측을 해 보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의구심을 묻어 둔 채 그렇게 몇 시간을 낑낑댄 후에야 가까스로 녀석의 가죽을 다 벗겨 낼 수 있었다. 그러곤 발톱과 이빨을 마저 챙겼다.
그렇게 하니 해는 지고 달은 벌써 중천에 떠올랐다. 그때서야 밀려든 피로감에 슬슬 눈이 감겨 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