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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3화)
1장. 사냥꾼과 학살자(3)


“흐흐흐흐. 자, 그럼 어디.”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징그러울 것만 같은 웃음을 매단 채 녀석의 훤히 드러난 배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곰을 잡았으면 응당 웅담을 드셔야 하지 않겠는가.
‘정력에 좋다는데 마다해선 안 되겠지.’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 팔자에 정력에 좋은 것을 먹어 봐야 뭐 하겠냐 싶지만은 혹시 아는가. 나중에 늙어서 과부라도 하나 데리고 살지. 스스로 생각해도 좀 우울하기는 하지만 현실이 그런 걸 어찌하리.
‘아, 괜히 짜증나네. 제길.’
결혼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이 뭐 같은 현실에 나는 한껏 저주를 퍼부으며 마침내 녀석의 배를 열었다.
그런데…….
“뭐, 뭐냐, 이건?”
드러난 녀석의 배 속을 본 나는 당황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뭔가 생김새부터 능력까지 여타 다른 곰과는 다른 녀석이란 걸까? 녀석의 몸 한가운데, 심장 옆에는 웬 구슬 하나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크기는 내 손바닥 반만 했는데 어찌 이런 게 녀석의 몸속에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길가에 떨어져 있는 것을 먹었다면 다시금 밑으로 나오는 게 정상일 텐데 심장 옆이라니. 이건 누가 일부러 집어넣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위치였다.
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조심스럽게 구슬을 꺼내 보았다. 녀석의 체액과 피로 인해 지저분한 것을 손수건으로 닦아 내자 전체적으로 푸른빛을 띠고 있는 구슬의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
‘우와, 이거 돈 좀 되겠는데?’
구슬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딱 봐도 예사 물건은 아닌 듯했다. 단순히 들고만 있었는데도 오늘 하루 녀석과의 일전으로 인해 피곤했던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이 뭔가 마법적인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녀석이 잔혹한 학살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이 구슬이 뭔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렇게 얻은 구슬을 행여 누가 볼세라 나는 조끼의 안쪽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귀한 것이라면 팔기도 어렵겠지만 어찌 되었든 팔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다음 나는 비로소 내가 목표로 했던 녀석의 웅담을 발견했다.
“어디 보자. 아, 여기 있네.”
나는 혹시나 해서 준비해 둔 드래곤 브레스라는 술을 가져왔다. 독하기로 유명한 술이라 거의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웅담이 좀 쓴가. 이거라도 같이 마셔야 그나마 괜찮을 것 같았다.
우물우물.
나는 피 묻은 웅담을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입에 넣었다. 몇 번 씹자 비릿한 냄새와 함께 역시나 내장이 뒤집어질 것만 같은 쓴물이 올라왔다. 나는 뱉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황급히 술병을 따고 술과 함께 입에 남은 웅담을 배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푸하!”
정말로 입에서 드래곤 브레스라도 나가는 듯 뜨거운 열기가 확 치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솟아났다.
“흐미, 독한 거. 에퉤퉤퉤!”
간신히 속을 진정시킨 뒤에야 나는 집으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녀석의 가죽을 말아 배낭에 집어넣고 녀석의 시체를 일별한 뒤 그렇게 길을 떠났다. 이제 녀석이 없어졌으니 마을 사람들도 편히 지낼 수 있겠지.
하지만 또 뭐랄까? 어딘지 모르게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에 의해 시작한 사냥꾼의 길. 하지만 복수가 성공한 지금, 갑자기 앞으로의 삶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짓을 해야 되나?’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비틀비틀.
“왜, 왜 이러지?”
집으로 향하는 내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눈앞이 빙글빙글 돌더니 세상이 뒤집어지듯 어지러웠다.
‘설마 그 술에 취한 건가?’ 하고 생각해 보지만 말도 안 된다. 내가 술이 얼마나 센데, 아무리 드래곤 브레스가 독해도 그렇지 그 한 모금에 취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다. 아니,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내 상태는 술에 취한 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하며 다리에 힘이 빠지고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드러누워 자고 싶었지만 숲의 위험성을 아는 나였기에 필사의 정신력으로 버텼다.
‘다, 다 왔다, 나의 스위트 홈!’
스위트 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통나무집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천신만고라고 해야 했다. 숲에서 몇 번을 구르고 자빠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금은 그냥 자고 싶다.
나는 씻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배낭을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는 그대로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서서히 감기는 눈꺼풀. 그 순간 나는 뭔가 푸른빛이 내 가슴 언저리에서 빛나고 있음을 보았지만 너무나도 지쳐 있었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잠의 나라로 빠져 버렸다.

꿈을 꾸었다. 그것이 꿈인지도 모를 만큼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나는 또다시 녀석과 마주 선 채였다.
온몸에 그을음을 뒤집어쓴 채 숨을 헐떡이는 녀석. 그리고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나.
‘뭘까, 이것은?’
이것이 정녕 꿈일까? 녀석의 가죽을 벗기고 웅담까지 먹었건만 어찌 된 일인지 그 모든 것이 환상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마치 이것이 진실인 양.
“흐아아아압!”
힘찬 기합과 함께 녀석에게로 몸을 던지는 나. 앞발이 휘둘러지고, 나는 녀석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졌다. 수컷의 그것이 없었기에 잠시 당황하는 나에게 녀석의 뒷발이 덮쳐 오고, 나는 들고 있던 숏소드를 녀석의 항문을 향해 찔러 넣었다.
여기까지는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똑같은 진행. 하지만 그 이후가 조금 달랐다.
막 숏소드가 녀석의 항문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뿌직.
어딘지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상큼한 음향과 함께 녀석의 항문을 비집고 짙은 갈색의 뭔가가 내게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나는 채 숏소드를 찔러 보지도 못하고 그 냄새의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쿠르륵. 크르르르.
마치 ‘네놈은 별수 없다’는 듯 날 향해 비웃음을 날리는 녀석. 그리고 망설임 없이 녀석의 앞발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크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눈을 뜬 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탄탄한 가슴에는 그 어떤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뭐야? 꾸, 꿈인가?”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마지막의 그 고통만큼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녀석의 거대한 앞발이 내 가슴을 후벼 팔 때의 끔찍한 느낌. 그것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확인 차 이번에는 앞섶을 벌리고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워낙 험하게 살아왔기에 여기저기 잔 상처가 많았지만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
“휴우, 다행이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만큼 꿈속의 고통이 대단했다는 뜻이다.
“별 재수도 없지. 쳇.”
작게 혀를 찬 나는 그냥 개꿈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그보다 사실 몸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냄새에 기억하고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되는 꿈 내용은 잊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맞을 거다.
“아우, 땀 냄새. 죽인다.”
스스로의 냄새였음에도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조끼를 벗고 윗옷을 차례대로 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뭔가 허전함을 느끼고는 벗어 둔 조끼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웅담을 먹으려고 녀석의 배를 가른 다음 그 뒤에 분명…….
“……!”
나는 황급히 조끼를 주워 들곤 그 안주머니를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어, 없다!”
없었다. 녀석의 몸속에서 나온 구슬이 어디로 갔는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나는 씻어야겠다는 생각도 잊은 채 온 집구석과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사실 찾는다는 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집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고 고꾸라졌다는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 사이에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모양이다.
“젠장! 역시 안 되는 놈은 뭘 해도 안 돼요!”
어쩜 이리도 허무한 인생일까. 나는 안타까웠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떨어뜨렸는지도 모를 물건을 찾으러 온 숲을 뒤지고 다닐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나도 먹고살아야지.
괜히 기분이 나빠진 나는 구슬을 잊어야겠단 생각에 찬물로 샤워를 하며 미련을 떨쳐 냈다. 그러곤 대충 식사를 때우고는 어제 벗겨 놓은 녀석의 가죽을 들고 마을로 내려갔다.
“여, 폴이군!”
마을을 둘러싼 목책 앞. 자경대원 중의 한 명이 날 알아보며 반갑다는 듯 인사를 해 왔다.
“뭐? 폴이라고?”
“이 자식! 도대체 그동안 뭘 했기에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자경대원들 역시 얼굴을 보이며 알은체를 해 주었다.
이들은 다들 나와 비슷한 또래로 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녀석들이다. 뭐, 속된 말로 불알친구라고 할 수 있지. 거기다 녀석들의 어머니와도 남다른 사연이 있는데, 내 젖동냥을 해 주셨던 분들이기도 했다.
이들 모두는 아버지가 학살자에게 돌아가신 뒤 사냥꾼이 되기로 결심한 나를 우려 섞인 목소리로 응원을 보내 주었던 착한 사람들이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가 괜한 목숨 버리려 하는 나를 걱정해 주고 아껴 주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큰일을 했으니 스스로도 조금 뿌듯했다.
“말해 봐라. 도대체 뭘 하다 온 거냐?”
개중 빨간 더벅머리의 미케가 날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행여 내가 다치기라도 했을까 그것을 살피는 것임을 모를 리가 없다. 난 괜찮다는 듯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설명은 좀 이따 해 줄 테니 일단 마을 사람들부터 불러 모아라.”
“그건 왜?”
“어허, 설명은 이따가 해 준다고 했지? 암튼 매우매우 중요하고도 기쁜 소식이니까 빨리 전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운을 띄우자 눈치 빠른 미케가 혹시 하며 되물었다.
“서, 설마 너?”
하지만 난 그저 미소로 답할 뿐이다. 어려서부터 날 잘 알고 있던 미케였기에 이것만으로도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히 전해진 듯 그는 영문을 몰라 하던 곁의 친구들에게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냐! 폴의 말 안 들려? 마을 사람들을 불러오라잖냐! 어서 서둘러!”
“아, 알았어!”
미케의 행동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느낀 듯 녀석들은 곧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내 말을 전했다.
그리고 잠시 뒤, 촌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어른들, 그리고 세 살배기 꼬마 아이들까지 광장에 모이게 되었다. 나는 그런 모두의 앞에 서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흠, 흠. 제가 이 바쁜 시간에 여러 어르신들과 마을 분들을 이렇게 모이도록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에, 그러니까.”
잠시 이렇게 뜸을 들이자 성질 급한 몇몇 아저씨가 소리쳤다.
“야, 답답하니까 빨리 말해!”
“우리 속 터져 죽는 꼴 보고 싶냐? 무슨 일인데 그래?”
‘킁. 아무튼 성질 머리 하고는.’
거칠지만 순박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실소를 흘리며 놀랄 만한 소식을 전했다.
“바로 어제 제가 잔혹한 학살자를 잡았습니다!”
“…….”
“…….”
그런데 어째 영 반응이 시원치가 않군. ‘다들 쟤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듯 멀뚱멀뚱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참, 사람 말 못 믿네. 나는 결국 증거를 보여 주기로 했다.
배낭을 연 나는 그곳에서 둘둘 말려 있는 녀석의 가죽을 꺼내 사람들을 향해 그것을 펼쳐 보였다.
촤르륵!
머리 위 태양을 가리며 넓게 펼쳐지는 녀석의 거대한 가죽. 그때서야 사람들의 시선은 나에게서 자신들의 머리 위를 가리고 있는 가죽으로 옮겨졌다.
시작은 누군가의 한마디.
“지, 진짜야. 이, 이것은 틀림없이 녀석의 가죽이다!”
“저, 정말이잖아!”
놀람은 순식간에 마을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런 놀람은 환희로, 그리고 기쁨으로 분출되어 솟아났다.
“와아아아아! 드디어 학살자가 죽었다!”
“폴 만세!”
기쁨에 만세를 부르는 사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하나만큼은 모두 똑같았다. 그것은 안도감. 이제는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마음이었다.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그날 밤, 마을엔 때 아닌 축제가 벌어졌다. 학살자가 죽었다는 기쁨에 너도나도 몰려 나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마을의 영웅을 위하여!”
“위하여!”
나는 어느새 마을의 영웅으로 둔갑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돌아가며 술잔을 받아야 했다. 초장부터 워낙에 마셨기 때문에 벌써부터 머리가 핑 하고 울렸지만 이런 공짜 술은 아무 때나 마실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냥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한데 신기한 건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빼면 아무리 술을 마셔도 깊게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주량이 좀 남다르긴 했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녀석을 잡고 집에 돌아왔을 때의 수상쩍었던 몸 상태도 그렇고, 뭔가 내 신체에 변화가 생긴 듯했다. 어쩌면 이게 녀석의 웅담을 먹고 정력에 세졌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무엇보다 슬슬 마을 처녀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는 이때에 괜히 머리 아프게 고민해 봐야 답도 안 나오는 문제를 갖고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칠 내가 아니다.
나는 마을 청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멜리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