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웃집 영웅 폴 1(4화)
1장. 사냥꾼과 학살자(4)


“어머나, 폴이 오늘은 왜 이리 멋있게 보일까?”
“그러게 말이야. 사냥꾼이라고 해서 별 볼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술도 잘 마시고 진짜 멋있다, 얘.”
“그뿐만이 아니야. 학살자를 잡을 힘이면 분명 밤일도 끝내 줄 거야. 아, 너무 부럽다.”
마지막 말은 미케의 부인이자 멜리사의 친구인 시멜의 말이었다. 미케, 아무래도 웅담은 너한테 줄걸 그랬나 보다. 미안하다, 친구.
갑작스러운 마을 처녀들의 태도 돌변에 많은 친구들로부터 시기 어린 눈빛을 받기는 했지만 나는 그저 어떻게 하면 여기서 더 멋있게 보일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하기도 바빴다. 결국 뭔가를 결심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잠시 여기를 주목해 주십시오.”
그런 내 목소리에 흥겹게 춤을 추던 사람들,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아졌다.
평소 때라면 뭔 개가 짓나 하며 듣지도 않았겠지만, 오늘 축제의 주인공이 나였기에 내 한마디 한마디에도 반응은 그 즉시였다. 왠지 정말로 영웅이 된 듯한 짜릿함을 느끼며 나는 마을 광장 중앙에 전시하듯 펼쳐 놓은 녀석의 가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우리 마을을 위협하고 많은 목숨을 앗아 갔던 학살자가 오늘 비로소 죽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서는 모르시겠지만 학살자를 죽인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그럼 누가 죽였다는 거야?”
“맞아. 조금 전까지와 말이 다르잖아?”
어리둥절한 듯 소리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는 진정하라는 손짓을 해 보인 뒤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제가 비록 운이 좋게 녀석의 가죽을 벗겨 이 영광스런 자리에 설 수 있었지만, 저는 그 영광이 있기까지 우리 마을이 흘려야 했던 눈물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제가 학살자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학살자가 사라지기만을 바랐던, 그리고 어설픈 실력으로나마 녀석에게 대항하고자 했던 저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신 여러분들의 마음, 그 염원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학살자는 결코 저 혼자서 잡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없었다면 저 역시 결코 녀석을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녀석의 가죽 역시 저 혼자만의 소유가 아닙니다. 녀석의 가죽은 이곳에 있는 마을 여러분 모두의 것입니다.”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그럴싸한 연설이었다. 과연 내 생각대로 마을은 또다시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 갔다.
“폴, 멋지다!”
“넌 역시 남자야!”
이런 마을 청년부터 시작해,
“까아아아악! 폴, 너무 멋져!”
“녹아 버릴 것 같아!”
이런 마을 처녀들의 반응까지.
겉으로는 당찬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득의에 찬 미소를 흘리는 나였다.
‘아버지, 저 잘하면 올해로 장가갈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흥분에 휩싸인 마을을 정리한 것은 마을 촌장님이셨다. 촌장님은 모두를 진정시킨 뒤 나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정말인 게냐, 폴? 아깝지 않겠느냐?”
“아니요. 정말 아까워 미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나는 녀석의 가죽에 대한 미련을 일찌감치 버렸다. 이미 모두에게 밝혔듯 녀석은 결코 나 혼자만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녀석에 의해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의 염원이 없었다면 나 역시 결코 이렇게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으리라.
나는 대답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나를 촌장님은 자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시더니 이윽고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폴의 결정대로 가죽은 마을 공동의 소유로 하겠네. 마을 회관에 걸어 둘 터이니 그 가죽을 보며 지난날의 아픔은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했으면 좋겠네.”
지금까지의 삶이 억압받는 삶이었다면 이 앞으로는 밝은 미래만이 있을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나뿐만이 아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제는 마음 놓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2장. 사냥꾼이 용병이 된 까닭(1)


키루루룩!
기분 나쁜 목소리와 함께 녹슨 칼이 내 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것을 간신히 허리를 젖혀 피한 나는 그 반동을 이용해 텀블링을 하듯 발차기를 날렸다.
빠악!
쿠에에엑!
듣는 것만으로도 명쾌한 타격음과 함께 예의 그 기분 나쁜 목소리가 비명을 질렀다. 속으로 나이스를 외쳐 보지만 그럴 틈도 없이 나는 뒤에서 찔러 오는 도끼를 피해 몸을 굴려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어느새 허리춤에 꽂아 놓은 단검을 빼 든 나는 몸을 일으킨 것과 동시에 도끼를 휘두른 녀석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콰직!
크으윽!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억눌린 신음을 끝으로 즉사.
주춤주춤.
그렇게 녀석을 없애고 나니 내 발차기에 얻어맞았던 녀석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물러날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곧 뒤돌아 열심히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흥! 어딜?”
감히 날 공격하고 살기를 바랐단 말이냐. 어림도 없지.
나는 그 즉시 바닥에 떨어져 있던 활로 녀석을 조준했다.
팅!
맑은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 그간 무던히도 연습했던 궁술 실력을 보여 주듯 화살은 정확히 달려가던 녀석의 등에 명중했다.
“휴, 드디어 끝났군.”
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주위로는 10여 구의 시체가 조금 전의 치열했던 전투를 말해 주듯 다양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다행히도 사람은 아니었다. 녹색의 피부에 내 허리 반밖에 오지 않는 이것들은 바로 고블린이었다.
몬스터 중에서 최약체로 평가받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 혼자서 10마리나 상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 굉장히 위험했다. 아마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 조끼가 아니었다면 지금 여기서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것은 바로 나였을 것이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투박한 느낌만큼이나 겉모습 역시 형편없었지만 이것이 오늘 내 목숨을 살려 준 일등 공신이었다. 고블린이 쏜 독화살을 이 조끼는 너무나도 쉬이 막아 주었다.
“그때 이걸 받지 않았더라면, 휘유!”
나는 바로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간만에 마을에 들른 나에게 촌장님께서는 이 조끼를 내어 놓으셨다. 뭐냐고 묻는 나에게 촌장님은 학살자의 가죽 중에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 이 조끼를 만드셨다고 했다.
투박한 모습이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나 역시 녀석의 가죽을 벗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걸 이 정도의 형태로 다듬는 일 역시 쉽진 않았으리라.
처음에는 이 귀한 것을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원한 일이라 꼭 받아 주었으면 한다는 촌장님의 끈질긴 권유에 나는 결국 조끼를 받았다.
‘촌장님이 무슨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게지.’
아무튼 덕분에 목숨을 구한 나는 기쁨도 잠시, 곧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찌푸려야만 했다.
“그나저나 이것들이 갑자기 어디서 기어들어 온 거지?”
고블린. 흔하다면 흔한 몬스터지만 여태껏 마을 주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놈들이었다. 20년 전에는 오크, 그리고 지금까지는 학살자가 버티고 있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이 부근은 몬스터의 출몰이 잦은 지역이 아니었다. 남쪽으로 바르데인 산맥이 접해 있음에도 굳이 이 벽촌에 마을이 생긴 이유이기도 했다.
가끔 산맥을 넘어 몬스터가 내려오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거의 드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들어 자꾸 주위에서 몬스터가 눈에 띄었다.
‘정말로 학살자를 잡았기 때문일까?’
만의 하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묵과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오크를 잡기 위해 오우거를 끌어들인다는 옛말도 있었으니 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날 일단 나는 마을에 들러 조사를 위해 필요한 여러 물품을 구입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 미케를 만났다.
술집에서 술 한 잔을 걸치며 나는 몇 주일 동안 이 주변을 둘러볼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녀석은 주제에 자기가 내 보호자라도 되는 양 생각을 하는 터라 내가 자리를 비우면 꽤나 걱정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괜찮겠냐?”
“뭐, 최대한 조심해 봐야지. 바르데인 산맥이 몬스터가 그리 많은 지역도 아니고, 더구나 이게 있잖냐.”
나는 내 목숨을 살려 준 일등 공신인 조끼를 한차례 두드리며 말했다.
“사실 오늘도 이게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지 뭐냐. 아무튼 뭔가 이 주변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해.”
조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내 직감은 뭔가가 있을 거라 말해 주고 있었다. 나라도 나서서 그 원인을 조사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큰일이 닥쳐도 대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내 태도에 미케는 뭔가 고심하는 표정으로 술잔을 마저 기울이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휴우, 나라도 같이 가 주고 싶다만 요새 주변 분위기가 수상해서 쉽게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미안하다.”
“자식, 미안할 게 뭐 있냐? 조심하면 괜찮아. 내가 누구냐? 이 마을 최고의 사냥꾼 아니겠냐? 걱정 마라. 그보다 주변 분위기가 이상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이 벽촌에 수상한 일이라니? 수상하다고 말할 일이란 것도 있나? 하나 가볍게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정말로 심각한 일인 듯 미케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엊그제 하일에서 상인이 왔었거든. 그가 하는 말이…….”
하일이라면 이곳 하인스 왕국의 수도다. 그곳에서 흘러나왔다면 필시 가볍게 흘려들을 만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
“뭔데 그래?”
나 역시 심각한 분위기가 전염된 듯 나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자 미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가 그러더군. 전쟁이 일어났다고.”
“뭐어?”
깜짝 놀란 나는 술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왜 이리 소란이야?”
그런 내 행동 때문에 덩달아 놀란 마을 사람들이 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아하하. 아,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멋쩍은 웃음으로 얼버무린 뒤 겨우겨우 사태를 수습하고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미케를 향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이야?”
“그래.”
“근데 누구랑 누구랑 전쟁을 한다는 거냐? 아니, 그것보다 우리 하인스 왕국이 그럴 여력이나 되냐?”
아,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우리 하인스 왕국은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올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책으로 써 내려가면 족히 10권은 넘을 정도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그 10권 분량의 역사가 전부 침략과 수탈, 오욕의 역사라는 게 문제.
말하자면 길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무려 천 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에는 대륙을 마탑에서 지배를 하고 있었다. 일명 마도 시대라고도 하는데 그때의 왕은 그야말로 유명무실했고 마탑의 눈치를 봐 가면서 지내야 했다.
계급 구조도 단순하여 마법사, 왕과 귀족, 그리고 일반인으로 나뉘었다. 사실 일반인이라고 좋게 표현은 했지만 실상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마탑의 노예라고 봐도 무방했다.
차라리 같은 사람은 나은 편이었다.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종족들은 그 특이성으로 인하여 마법사들의 노리개나 실험 대상으로써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막강한 마탑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때는 마탑의 제자였다던, 쉐인이라는 희대의 대마법사가 나타나 드래곤들을 수하로 삼고 대륙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어째서 쉐인이라는 마법사가 마탑을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누구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는 못했지만 어찌 되었건 쉐인에 의해 대륙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또 다른 대마법사가 나타나니, 그 이름도 위대하신 아론.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나지만 아론은 기존의 마법과는 다른 원진 마법을 창시하여 그 힘으로 사분오열되었던 대륙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 가까스로 쉐인을 처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던 이들과 함께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바로 대륙 최초의 통일 제국인 하이네스였다. 어지러운 민심을 살피는 데만 10년. 한데 돌연 아론은 자신을 따르던 이들 중 리오스 알렉시온에게 황위를 물려준 채 그를 도왔던 이종족들과 함께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만다.
그가 창시한 원진 마법 역시 기록으로만 남았을 뿐 그는 후인조차 남기지 아니하였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구심점인 아론이 사라지자 제국은 서서히 사분오열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힘에 억눌려 왔던 자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고, 결국 하이네스 제국은 아론이 떠난 지 채 30년도 되지 않아 수십 개의 나라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이 지나 하이네스 제국은 지금의 하인스 왕국으로 남아 대륙의 서쪽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서 그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해 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역대 왕들 중에서 하이네스 제국 시절로의 회귀를 갈망하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접한 로이어 제국과 얀 제국에 의해 언제나 그런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