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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25화)
7장. 세상을 구할 운명이라고?(4)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결정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아린이다.”
수업을 위해 소녀를 만난 난 대뜸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고 자시고 간에 이제부터 네 이름은 아린이라고. 언제까지 너라고 할 수는 없잖아.”
어리둥절해 하는 소녀의 모습에 난 괜히 쑥스러워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다른 존재한테 이름을 붙여 준다는 행위가 이렇게 쑥스러운 건 줄은 처음 알았다.
“아린……이라.”
멍청히 아린이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는 소녀.
‘답답하네. 마음에 들면 든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 좀 해라.’
한참을 멍하니 이름을 되뇌는 소녀의 행동에 막 짜증을 내려는 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흑.”
갑자기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지더니 뭐가 그리 서러운지 이내 눈물을 쏟아 내는 소녀.
‘뭐, 뭐야! 왜 우는데!’
혹시 괜한 짓을 한 건가. 그런 건가. 뜨악한 나는 허둥대며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응?”
그렇게 어르고 달래는 내게 소녀는 그게 아니라는 듯 눈물을 흘리면서도 애써 고개를 저었다.
“훌쩍. 그게 아니야. 그냥…… 기뻐서 그래.”
“……기뻐서?”
멍청히 되묻는 내게 소녀는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날 올려다보며 조금은 씁쓸히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나는 사념체에 불과하니까.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닌, 염원을 이루면 한낱 꿈처럼 사그라질 운명이었으니까. 이름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막상 이렇게 이름을 받으니까 왠지 내가 하나의 생명을 가진 것처럼 느껴졌어. 살아……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
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나로서는 정말로 의외의 반응이었다. 난 단지 앞으로 생활하면서 너라고 부르면 불편할 것 같아 반 장난으로 시작한 말이었다. 아린이라는 이름도 아론에서 살짝 철자만 바꿔서 만든 것일 뿐, 그걸 생각하는 데 든 시간은 채 1분도 소요되지 않았다.
하지만 반 장난으로 시작한 내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런 큰 의미로 다가올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난 아린을 안쓰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난 사념체가 갖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영혼이 없이 그저 염원을 다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도대체 그 존재가 갖는 기분이라는 건 어떤 것일까?
영혼을 갖는 모든 생물은 환생이란 걸 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사념체는 이 이후란 것이 없다. 말 그대로 깨끗하게 소멸되는 것이다. 내색하지는 않아도 두려웠겠지.
내 입장에서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색해져 버린 분위기도 바꿀 겸 난 괜히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다. 그럼 이걸로 결정된 거다. 아린, 나중에 불평하기 없기다.”
“응! 고마워.”
“뭘.”
난 고맙다는 그 말에 헤픈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그저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할 건 뭐야? 설마하니 공짜로 주는 힘은 아닐 테고.”
더 이상 어색한 분위기는 사양이었기에 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소녀, 아니 아린은 기다렸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간단해. 앞으로 폴이 해야 할 건 마법을 배우는 거야.”
“…….”
‘어째 너무 간단하게 말하는군.’
누군 몰라서 묻는 줄 아나. 세 살 어린애한테 물어봐도 알 거다, 아론이 마법사였다는 건. 그러니 그런 아론의 힘을 물려받는다는 건 당연히 마법을 배워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이냐.
“저기 말이야, 내 스스로 비하하는 것 같아 조금 꺼림칙하기는 한데…… 물론 난 결코 내 머리가 나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뭐, 어느 쪽이냐 하면 그래도 눈치가 빠르고 잔머리는 잘 돌아간다고 할까? 에, 그러니까 마법이란 건 나처럼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이 배우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물론 나야 배우는 입장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입에 퍼 넣으면 된다지만 그러자면 아린이 좀 힘들지…… 않을까?”
스스로 이런 말을 입에 내뱉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자고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하는 법. 내 머리는 결코 마법 같은 걸 배우는 데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아린은 그런 내 걱정에도 염려 말라는 듯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빙빙 돌려 말 안 해도 알아, 너 머리 나쁜 거. 다 아니까 걱정하지 마. 아론의 마법은 너처럼 머리 나쁜 사람도 쉽게 익힐 수 있으니까. 물론 너처럼 조건까지 맞아야 하지만.”
아주 비수를 꽂는군. 내 말은 콧구멍으로 들었나. 내가 분명히 ‘평범한’에서 강조한 뜻을 모르겠냐.
살짝 귀엽다 생각했던 내가 미쳤지.
난 따지고 싶었지만 괜한 걸로 힘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린의 말에 궁금한 점을 찾아 물어보았다.
“쉽게 익힐 수 있다면야 나야 대환영이지. 그런데 그 조건이란 건 뭐야?”
“간단해. 마나불응지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칠십 평생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마나를 쌓지 못할 정도로 둔감한 체질이어야 하지.”
“참 간단해서 좋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였다.
‘뭐야? 그렇다면 내가 여태까지 했던 호흡법은, 검술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크리스의 감시 아래 뼈를 깎는 고통 끝에 완성한 호흡법이다. 그걸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바로 마나를 모으기 위해서다. 검술이 뛰어나면 물론 좋겠지만 마나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일정 이상으로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게 크리스의 설명이었다.
기사까지는 못 돼도 적어도 어디 가서 얻어맞고 다니지 않을 정도로 실력을 쌓으면 적당한 취직 자리 하나 얻을 목적으로 열심히 익힌 호흡법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지금껏 내가 해 왔던 그 고생은 한순간에 삽질로 변모하고 말았다.
“정말 칠십 평생 죽었다 깨어나도 안 돼?”
혹시나 해서 묻는 나에게 아린은 확실히 못을 박았다.
“절대로. 만약 네가 스스로 마나를 모을 수 있다면 내가 오빠라고 불러 줄게.”
정말이군. 난 극심한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그런 나에게 아린은 힘내라는 듯 그 조막만 한 손으로 어깨를 두드려 왔다.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않아도 돼. 마나를 좀 못 느끼면 어때서? 대신에 아론의 힘을 이어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거잖아? 거기다 내가 혼자서는 못 느낀다고 했지 아예 느끼지 못한다는 말은 안 했거든? 그리고 크리스라고 했던가? 그 잘생긴 오빠한테 검술도 배우고 있는 모양인데 잘 생각했어. 마법사의 취약점을 검술로 보완한다. 그래, 이제부터 너는 마검사가 되는 거야.”
‘누구는 이름이고 누구는 오빠냐?’
아니, 그보다 마검사라고?
“어째 말은 참 쉽다만.”
“설명할 테니 잘 들어 봐.”
아린의 설명은 이러했다.
이미 아론의 기억에서 보았듯 아론은 마나불응지체로서 마나를 쌓을 수도 없는 체질이었다. 머리는 좋았으나 마나를 쌓을 수 없는 마법사는 이미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자신과 같은 처지인 친구 쉐인과 함께 연구하기를 수십 년. 그리고 마침내 마나가 필요 없는 마법을 완성시키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원진 마법.
사실상 이 원진 마법은 그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것이었지만 마나로써 마법진을 구현하고 발동시키는 데 어려움 때문에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마법이었다.
아론은 이 원진 마법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하고, 컨트롤이 어려운 마나 대신에 ‘네이쳐’라는 새로운 힘을 접목시켰다.
“네이쳐라면…….”
난 무심코 내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아론이 남긴 네이쳐가 들어 있다고 했었지.
“네이쳐라는 건 마나와 비슷한 힘이지만 또한 마나와는 전혀 다른 힘이야. 아마 이런 말은 들어 봤을 거야. 세상은 결국 마나로 이루어져 있다고. 무생물인 바위든 사람이든 모두 이 마나에 둘러싸여 있지. 그리고 보통 이 마나를 4원소로 분류하곤 해. 땅, 불, 바람, 물. 하지만 실제로 마나는 그 외에도 한 가지를 더 추가해서 다섯 원소로 이루어져 있어. 그건 바로 생명력이야.”
“생명력?”
“그래. 모든 생물체가 살아가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비록 그 양은 적지만 그 무엇보다 앞서 의지를 행하는 힘. 마나를 모을 수 없었던 아론은 자신의 몸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그 생명력에 관심을 가졌어.”
원진 마법을 정리하는 것은 아론과 쉐인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생명력의 크기를 키워 직접 마법에 적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실패와 고난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존의 마법사들이 행하던 명상법에서 해답을 찾았다.
생명력은 응집성이 상당히 강했다. 조금만 집중이 떨어져도 대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나와는 달랐다. 때문에 생명력을 활성화시키고 기존의 명상법을 시행하여 대기 중의 마나를 끌어 모았다. 마나불응지체인 아론의 몸에서는 자연히 그렇게 모여든 마나의 전부가 빠져나갔지만 그중 생명력의 마나는 아론의 몸에 있던 생명력과 반응하여 그 자리를 지켰다.
마나를 쌓는 속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미미한 양이었다. 하지만 그 질에 있어서만큼은 큰 차이를 보였다. 결코 마나의 힘에 뒤지지 않았다.
아론은 그렇게 인위적으로 모은 생명력에 네이쳐라는 이름을 붙였다.
“네이쳐가 일정 이상 크기로 성장하면 그 특유의 응집성 때문에 대기 중의 마나도 끌어 모으게 돼. 마나불응지체였던 아론은 역시 그렇게 모인 마나 또한 다시금 대기 중으로 되돌렸지만 마나불응지체까지는 아닌 폴, 너라면 분명 그 마나를 검술에 활용할 수 있을 거야. 물론 네이쳐의 크기가 어느 정도 크기 이상으로 커져야겠지만 이미 아론이 남긴 네이쳐의 일부를 가진 너라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아주 조금씩이지만 마나를 끌어 모으고 있지 않을까?”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사실 여태 아린이 말한 것 중 이해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네이쳐니 뭐니 열심히 떠들어 봤자 나한테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마나가 모일 거라니, 그보다 큰 희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지긋지긋한 호흡법이여, 안녕.
“그보다 대충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겠는데 어째서 나처럼 둔감한 체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거지? 마나에 민감할수록 더 좋은 거 아닌가, 보통?”
내가 멍청한 소리를 한 건가? 아린은 손가락 하나를 세우더니 쯧 혀를 찼다.
“생각해 봐. 만일 그랬다면 아론이 너처럼 바보 같은 후인이 나타날 때까지 뭣 하러 힘 낭비해 가며 날 만들고 있었겠니? 네이쳐는 마나불응지체인 아론을 위해 만들어진 힘이야. 일반인들은 결코 익힐 수 없어. 네이쳐를 쌓기도 전에 마나가 먼저 자리를 잡아 버리게 되기 때문이야. 만일 폴도 아론의 네이쳐가 없었다면 수련에 상당 부분 시간을 투자해야 했을 거라고. 마법의 둔재 중의 둔재인 사람도 이런데 일반인, 아니 마나에 민감한 체질인 사람은 어떻겠어? 아론도 그걸 알고 일찌감치 포기한 거야.”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뭐, 결과만 좋다면야. 난 둔재라는 소리는 잊어버리고 의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해 보자고!”
하지만 막 불타오르는 의욕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아니. 아직은 아니야.”
“아, 왜! 모처럼 사람이 좀 힘내서 해 보려고 하는데!”
“일단 본격적인 수련에 앞서 먼저 해야 할 게 있어.”
그러면서 어디론가 향하는 아린. 잠시 뒤에 나타난 아린의 뒤에는 언뜻 보면 바위 덩어리로 보일 법한 큼지막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쿵!
도저히 책이 떨어지는 소리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육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책 한 권.
왠지 모를 불길함에 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이게 뭐야?”
“뭐기는, 원진 마법에 필요한 룬어와 각종 마법진을 조합한 마법서지.”
“그런데? 이건 왜 갑자기?”
“생뚱맞게 무슨 소리야? 당연한 걸 왜 물어?”
“당연하다니? 뭐가?”
아린은 그런 내 말에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마법을 배운다며! 마법진이랑 룬어는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렇다는 건…….”
난 떨리는 눈동자로 책인지 바위 덩어리인지 모를 것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아닐 거야. 그렇지?
난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길 기도하는 듯한 눈빛으로 아린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린은 그런 내 시선을 무시하며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거 전부 외워.”
쿠궁!
역시나 설마는 사람을 잡았다.
“뭐야! 말도 안 돼! 이걸 어떻게 외워!”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나에게 아린은 ‘어머’ 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도 다른 마법들에 비하면 상당히 간추린 건데. 어디의 무슨무슨 학파는 이런 책이 열 권은 넘어간다고 했었지, 아마? 이 정도라면 바보 중의 바보라도 할 수 있을 거야. 난 적어도 폴이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폴은 어떻게 생각해?”
정말로 믿는다는 듯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빛.
하지만 난 보았다.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듯하지만 미미하게 떨리는 그 입술을.
‘아, 악마!’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아린은 요정이라기보다는 뒤에 꼬리를 감추고 있는 악마처럼 보였다. 제길.
결국 난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무, 물론 이 정도 외우는 건 일도 아니지. 하하하하.”
하지만 이건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여.
그때부터 난 아린 선생님의 혹독한 체벌 속에서 난생처음으로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란 걸 경험하게 되었다.


<『이웃집 영웅 폴』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