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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24화)
7장. 세상을 구할 운명이라고?(3)


“일단 내 소개부터 할게. 난 아론이 드래곤 하트를 이용하여 만든 일종의 사념체야.”
“사념체라……. 그렇다면 뒤의 그 드래곤은 뭐지? 드래곤은 멸종……된 것이 아니었나?”
맞아.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멸종이라는 말에 소녀는 잠시 기분이 나빴는지 인상을 찡그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사실 쉐인과의 전투에서 드래곤의 희생이 컸지. 너희들 말대로 거의 멸종 직전까지 가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아론은 깨달았던 거야. 단지 몬스터라고 알고 있던 드래곤이, 쉐인에 의해 조종되던 드래곤이 결국은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것을 말이야. 하지만 당시 인간들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드래곤을 없애려 했지. 단지 위험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훗, 정말 웃기는 일이야. 드래곤들은 자신들의 영역만 침범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먼저 건드리지 않는데. 아무튼 그런 혼란 속에서 아론은 간신히 골드족을 제외한 드래곤 6마리를 봉인하는 데 성공했어. 아론은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지만 쉐인에 의해 이미 마성에 눈을 뜬 그들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던 거지.”
“그러면 여기 있는 이 드래곤은 어떻게 된 거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크리스의 말에 소녀는 안쓰럽다는 눈으로 망부석처럼 서 있는 드래곤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이 아이는 당시 골드를 비롯한 모든 드래곤의 유일한 해츨링이었어. 쉐인으로서는 쓸모가 없었기에 방치해 두었겠지. 하지만 유일하게 골드 드래곤만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아론은 다 죽어 가는 이 아이를 발견하고는 크게 기뻐하며 이 아이의 드래곤 하트에 자신의 사념체를 만들었던 거야.”
“결국 드래곤한테 기생한다는 거네?”
간단명료한 내 정리에 소녀는 또다시 상큼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밟히고 싶지?”
“…….”
그새를 또 못 참고 나댔군. 아무튼 이 입이 방정이다.
“이 아이와 나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야. 다음부터는 조심해.”
“네.”
안 나오는 대답을 억지로 내뱉으며 난 주의를 돌릴 겸 크리스와 소녀의 대화에서 궁금하던 걸 물어보았다.
“저기 말이야, 그런데 그 사념체라는 건 뭐야?”
“누군가의 강력한 염원이 마력과 합하여 만들어진 일종의 인공 생명체라고 보면 된다. 보통 대상이 살아생전 원하고자 했던 바를 이루면 곧 소멸되지.”
마치 백과사전처럼 줄줄이 흘러나오는 명쾌한 크리스의 대답. 그 말에 난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럼 아론은 뭘 위해 이런…… 크흠, 사념체를 만든 거지?”
‘겉보기만 귀여운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
중간에 이런 말을 넣고 싶었지만 목숨이 아깝기 때문에 난 꾹 참았다.
아무튼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게 소녀가 갑자기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운명이 정한 자. 두 개의 열쇠를 가진 후인이 나타나면 그에게 아론의 모든 것을 전수해 주어야 해. 그리고 그를 도와 곧 닥쳐 올 대륙의 혼란을 종식시키는 거지. 그것이 아론의 염원. 또한 내 사명이기도 해.”
“…….”
소녀의 말에 난 일순간 얼굴을 구겼다. 슬슬 설마가 사람 잡기 시작하는군. 아론이 내 꿈속에 나올 때부터 알아봤다.
하지만 난 만의 하나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에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그 후인이란 건?”
“후우. 너, 바보니? 그럼 내가 여태 누구한테 입 아파 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당연히 너지.”
마치 ‘이런 한심한 놈을 다 봤나’ 하는 듯 날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소녀. 난 갑자기 뒷골이 당겨 왔다.
“말도 안 돼!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여기 크리스도 있잖아!”
그래. 솔직히 인정하긴 싫지만 대륙의 혼란이니 뭐니 영웅의 기질은 딱 봐도 크리스가 더 갖고 있다. 누가 봐도 영웅 필이 팍 꽂히지 않은가.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냥꾼인 일반 평민이었단 말이다.
그런 내 반박에 소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나도 네 심정은 충분히 아니까 그만 소리 질러. 사실 나도 네가 아론의 후인이라는 게 안타깝지만 그게 운명인 걸 어떻게 하겠니.”
“운명이라는 말로 어물쩍 넘기지 마!”
말은 쉽네, 운명. 세상에 운명이 어디 있냐?
하지만 내 말에 소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얘가 말 참 쉽게 하네. 운명이 어디 있냐니. 당연히 여기 있지. 네가 던전을 열 수 있었던 게 단지 우연이었을 거라 생각해? 그 문은 열쇠를 갖지 않고서는 절대로 열 수 없는 문이야. 하지만 넌 두 개의 열쇠 모두를 갖고 있지.”
“아, 그러고 보니 궁금했어. 열쇠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난 열쇠라고는 여태껏 만져 본 적도 없다. 솔직히 우리 집에 뭐 훔쳐 갈 게 있어야 자물쇠라도 걸어 놓고 살지.
“한심하구나.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잖아.”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소녀는 역시나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그 작은 손을 한차례 휘저었다. 그러자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하게 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빛을 뿜어내며 허공에 떠올랐다.
난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설마 이, 이게!”
“그래. 그것이 바로 첫 번째 열쇠.”
어머니의 유품이 아론이 남긴 열쇠였다니.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부터였다. 충격에 빠진 내게 크리스는 안색을 굳히더니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궁금했었다. 그 목걸이는 대체 어디서 난 건가?”
“어머니의 유품인데, 그건 왜?”
“그 문장, 많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과연 자세히 보니 과거 하이네스 제국의 황가를 상징하는 문장이 확실하군.”
“이, 이게?”
난 더 이상 빛을 뿜어내지 않고 있는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멍청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어머니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에 대해 난 자세히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단지 어머니가 숲에서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의 이름이 에쉴린이라는 것 정도가 내가 아는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다.
여태껏 그리 궁금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난 어머니의 얼굴도 보지 못했고 어머니의 얼굴을 상상하며 지낼 만큼 생활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폴, 혹시 어머니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없겠나?”
크리스의 조심스러워하는 듯한 어조에 난 괜찮다는 듯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가 아는 어머니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에쉴린……이라.”
크리스는 내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더는 말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난 잠자코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머지 하나의 열쇠는?”
“그건 여기 있어.”
소녀는 조막만 한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하지만 난 소녀의 손가락을 따라가다 잠시 헛웃음을 지었다.
소녀가 가리킨 곳은 바로 내 가슴. 정확히 명치에서 한 뼘 올라간 부근이었다.
“난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머지 하나의 열쇠는 바로 네 가슴속에 있어.”
“어, 어떻게?”
난 그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 가슴속에 열쇠가 들어가 있다니. 아마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거다.
“주, 죽는 거 아니야?”
약간 겁먹은 내 말에 소녀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입을 열었다.
“아론이 바보냐!”
“그, 그건 그렇군. 설명해 줘.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왜 열쇠란 게 내 가슴속에 들어온 거냐고.”
소녀는 내 채근에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혹시 일전에 뭔가 특이한 구슬을 줍지 않았어?”
“특이한…… 구슬?”
“그래. 손바닥 정도의 크기에 푸르스름한 빛을 띤.”
난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그런 게 있다면 내가 팔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날 보던 소녀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하고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몸속에서 발견했을 수도 있겠네.”
끔찍한 소리를 잘도 한다. 몸속에서 발견…….
“했구나!”
난 퍼뜩 생각난 어떤 사건에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왜 잊고 있었지? 분명 난 소녀가 말한 구슬을 본 적이 있었다. 학살자를 잡을 때 녀석의 가슴속에 구슬 하나가 있는 걸 보고 놀라지 않았던가.
하지만 집에 도착하고 나서 구슬이 없어졌기에 난 단순히 오는 도중에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내 몸속에 있었다니.
“설명이 필요한 얼굴이네. 뭐,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네 몸속에 들어 있는 구슬은 아론이 자신이 갖고 있던 ‘네이쳐’를 응집해 만든 일종의 마력 덩어리라고 보면 돼.”
“네이……쳐?”
난데없는 용어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소녀는 아미를 찌푸리더니 짜증스럽다는 듯 소리쳤다.
“말 끊을래? 나중에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될 테니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어.”
“네.”
소녀는 무섭지 않았지만 드래곤은 무서웠다.
아무튼 내가 조용히 입 다물자 소녀는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시 아론은 하이네스 황가의 비보를 열쇠로 하여 던전을 만들어 나갔지. 일종에 자격이라고 보면 될 거야. 하지만 자격만 갖고는 문을 통과할 수 없어. 그 사람이 아론을 이을 후인으로서 능력이 적합한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했지. 때문에 아론은 자신이 모은 ‘네이쳐’의 일부를 응집하여 당시 이 근처에 살고 있던 오크 부족에게 건네주었어. 운명이란 결국 어떻게 해서든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론은 그것이 반드시 훗날 후인의 손에 들어가리라 생각했던 거야.”
“그럼 뭐야? 그 ‘네이쳐’인지를 갖고 있는 나는 당연히 아론의 후인으로서 결정된 거다, 그런 건가?”
“요약하면 그런 셈이지.”
“하.”
난 잠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옛말이 떠올랐다. 우연이 겹치면 그건 운명이라고.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 살았다던, 사람 뺨치게 머리 좋은 오크 부족은 아마도 어떤 식으로든 아론의 영향을 받았을 터였다. 그런 그들이 어떤 연유로 멸망하고 그 자리를 학살자가 차지했고, 난 아버지의 복수라는 명목하에 그런 학살자를 죽였다.
단지 비쌀 것 같다는 생각에 들고 온 구슬은 이미 내 몸속에 있었고, 마치 뭔가에 이끌리듯 짜인 시나리오처럼 전쟁에서 포로가 된 난 땅굴을 파고 지금은 아론의 던전 안에 있었다.
“정말 기분 끝내 주는군.”
운명이니 어쩌고 운운하는 것을 떠나 내 행동, 내 선택,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조종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가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것이 좋은 의도였든 나쁜 의도였든 말이다.
괜히 화 풀 곳이 없었기에 난 아무 죄 없는 소녀에게 짜증을 냈다.
“그래서 날 보고 어쩌라는 거지? 날 이곳까지 끌고 온 이유가 뭐냐고. 아아, 그러고 보니 이미 이야기했었군. 대륙의 혼란이니 뭔지를 막아 달라고? 훗.”
난 시니컬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딴 거 내 알 바 아니거든?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다른 사람을 위해 그딴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해. 가자, 크리스.”
난 더는 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잠자코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크리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화병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날 향해 소녀의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호기도 좋지만 스스로의 모습을 한 번쯤은 돌아보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지?”
막 돌아서려던 난 의미심장한 그 어투에 매섭게 소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에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무슨 뜻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거지. 여기서 나가겠다면 뭐 굳이 말리지는 않아. 하지만 현재 네 자신이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결국 세상엔 혼란이 닥칠 거야. 과연 그때 아무런 힘도 없는 네가 그 혼란에 맞서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
난 대답하지 못했다. 분하지만 소녀의 말이 맞았다. 아론의 예언이라면 분명 맞을 거다. 그렇다면 난 어찌해야 할까?
소녀의 말대로 아무런 힘도 없는 난 혼란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단지 힘이 없다는 이유로, 평민이라는 이유로 전쟁에 끌려 나가야만 하는 다른 이들처럼.
난 그렇게 채 타오르지도 못한 촛불은 되기 싫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내게 소녀는 천천히 다가와 이전까지의 앙칼진 목소리가 아닌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전했다.
“아론도 아마 이야기를 했을 거야. 그 누구도 네게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야. 미리부터 겁먹고 도망치지 마. 그냥 간단히 생각해. 아론의 힘을 이어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 남들에게 뽐내고 싶지? 여자한테 인기 얻고 싶지? 숫총각은 이제 지긋지긋하지? 그렇다면 뭘 망설이는 거야. 당장 이 기회를 잡아.”
“…….”
어째 위로랍시고 한다는 게…….
“너, 지금 물건 파냐?”
난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내 얼굴은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끝에 가서 좀 엉뚱한 데로 말이 새기는 했지만 소녀의 말은 나에게 많은 걸 깨닫게 해 주었다. 결국 이 세상은 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 돈이든 명예든 그 무엇이 되었든 힘이 없고선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현실이 이럴진대 혼란인지 뭔지가 왔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힘이 필요해.’
훗날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그것 한 가지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난 내 결심을 보여 주듯 소녀의 작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네 뜻에 따르겠어. 내가 뭘 하면 되지?”
그런 내 말에 소녀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얘,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괜히 뜨끔한 난 혹시나 해서 덧붙였다.
“내 이 결정은 결코 여자한테 인기 얻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야.”
정말이다. 그러니 크리스 너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날 아론의 힘을 이어받기로 결정한 나는 일단 이곳 던전의 구조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며칠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생활하게 될 곳이니 지내기에 불편한 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곳 던전은 나와 크리스가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먹을 것부터 입을 것, 잘 곳까지 풀 세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