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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23화)
7장. 세상을 구할 운명이라고?(2)
“끄응. 눈 부셔.”
긴 꿈에서 깨어난 난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온 빛에 인상을 찌푸리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스릴 문에서 덮쳐 오는 빛에 의해 정신을 잃고 도착한 낯선 장소였다.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에 난 눈이 아팠지만 가늘게 실눈을 뜨고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휘우! 넓은데?”
주위를 둘러본 내 첫 소감이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 역시 높은 천장하며 바닥은 엄청난 넓이를 자랑했다. 하지만 전에 있던 곳과 다른 점이라면 천장에 박혀 있는 빛을 내뿜는 구슬들로 인해 전혀 어둡지 않다는 것이다.
그 잠깐 사이에 시력이 회복된 난 더욱더 꼼꼼히 주변을 살폈다. 여기 저기 어딘가로 나 있는 문을 보니 다행히도 닫힌 공간은 아닌 듯했다.
“잘하면 빠져나갈 수도……. 어?”
한데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내 눈에 보이는 뭔가의 모습에 난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입을 헤 하고 벌려야 했다.
일순간 내 눈이 어떻게 된 건 아닌지 싶어 손등으로 두 눈을 비벼도 보았지만 오히려 더욱더 선명하게 그것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 저건 뭐지?”
내 시선이 향한 곳. 정확히 우리가 누워 있는 곳의 반대편 벽 쪽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거대한 크기의 동물이 있었다.
천장의 빛을 받아 금빛으로 번쩍이는 그 동물의 모양새는 커다란 날개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도마뱀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물론 모양만 그렇다는 거지 크기에서는 절대 비교가 안 됐다.
‘세상에 저 발에 밟혔다간 형체도 안 남겠다.’
그 도마뱀은 마치 잠을 자듯 두 눈을 감은 채였지만 다행히 조그마한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난 저것이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런 동물이 세상에 어디 있어? 조각이겠지.”
그것은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조각이 아니라도 좋으니 제발 움직이지만 말아라. 난 도마뱀의 간식거리가 되는 건 사양이거든.’
도대체 아론의 던전에 저런 건 왜 있는 건지.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가는 위험할 것 같아 난 서둘러 크리스를 깨우기로 했다.
찰싹! 찰싹!
그간의 설움을 풀 겸 난 은근히 감정을 담아 크리스의 뺨을 때렸다. 그러자 금방 벌겋게 부어오르는 뺨.
“그만 해라. 아프다.”
“아하하하. 깨, 깼냐.”
난 죽일 듯 날 노려보는 크리스의 눈빛에 어색하게 손을 거두고 물러나야 했다. 이런,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맛이 들려 버렸군.
잠시 두통이 이는지 관자놀이를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선 크리스에게 난 퍼뜩 생각난 사실에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빨리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어.”
“갑자기 또 무슨 일인데 그러지?”
“저, 저길 보라고.”
난 엄청난 크기의, 조각상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리는 그것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내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크리스가 그답지 않게 놀란 눈빛을 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 저건…… 드, 드래곤?”
하지만 그 말에 난 더 놀라야 했다.
“뭐? 저, 저게 드래곤이란 말이야? 말도 안 돼. 드래곤이라면 멸종되었다고 하지 않았어?”
드래곤은 천 년 전에 이미 멸종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당시 대륙을 혼란에 몰아넣었던 쉐인은 드래곤을 부림으로써 그들을 앞세워 마탑을 공격하였다고 했는데 드래곤의 엄청난 위력 때문에 마탑은 결국 손 한 번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고 했다.
쉐인에 맞설 수밖에 없었던 아론으로서는 그런 드래곤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런 이유로 그 이후 드래곤을 봤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드래곤이 여기 이렇게 떡하니 있으니 놀라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이 아닐 게다.
몬스터 중 가히 최강이라 말할 수 있는 드래곤. 옛날 전설이나 신화를 봐도 드래곤으로 인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저 커다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브레스란 것은 마을 하나를 그냥 쑥대밭으로 만들 위력을 가지고 있다 하였다.
아니, 비단 그 위력을 떠나서 저 커다란 몸뚱이를 갖고 그냥 기지개 한 번만 펴도 어지간한 성벽은 그냥 무너질 거다.
“서, 설마 저, 저거 진짜는 아니겠지? 멸종되었다던 게 지금 왜 여기 있어?”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나에게 크리스는 잔뜩 긴장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가 보기엔 저건 진짜다. 비록 마나를 쓸 수 없는 몸이지만 마나를 느낄 수는 있지. 엄청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 그래도 봐. 숨도 안 쉬잖아.”
“드래곤은 동면에 들 경우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 동면 중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 우리 때문에 그 동면에서 깨어나면 어떻게 되는데?”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에 크리스는 물끄러미 날 보더니 조금은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걸 묻는군. 만일 폴 그대가 낮잠을 자다 누군가의 방해로 깨어난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나?”
“…….”
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만일 내가 그랬다면 상대방은 반쯤 죽었다 보면 옳을 것이다. 내가 이러할진대 드래곤은 어떠하리? 말해 봐야 입만 아프다.
“이, 일단 출구부터 찾아보자. 조용히.”
난 조용히라는 말을 최대한 강조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그런 내 말에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냥 이대로 있는 게 좋을 것 같군.”
“무슨 헛소리야? 죽고 싶어서 그래?”
“그게 아니다.”
“그럼 뭔데?”
“깨어났다.”
깨어났다……라니?
‘서, 설마!’
꿀꺽.
난 크리스에게로 향해 있던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마치 기름칠을 하지 않은 문처럼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목.
‘제발, 제발, 제발!’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지만 신은 그런 내 기도를 너무나도 간단히 씹으셨다.
쿠우우우우.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며 크게 들썩이는 녀석의 몸. 동면으로 인해 굳어 있는 몸을 푸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녀석의 눈꺼풀.
금빛 바탕에 검은색의 세로로 길게 쪼개진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그 압박감이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학살자 녀석과 생사를 오가는 싸움 속에서도 당당히 버텼던 나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저 거대한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아그작아그작 씹힐 것만 같았다. 녀석은 비록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내 머리는 앞으로 일어날 것 같은 일들을 열심히 상상하며 스스로를 더욱더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었다.
‘밟혀 죽을까? 아니야. 태워 죽일지도 몰라.’
“으으으으으.”
어느새 다리가 풀린 난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 한구석에서는 도망가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닥쳐올 죽음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문득 시선에 그나마 버티고 서 있는 크리스의 뒷모습이 비춰졌다. 하지만 녀석의 모습도 가히 정상은 아니었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녀석의 몸은 계속해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랬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인들,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결국엔 인간이란 건 똑같다. 드래곤에겐 한낱 간식거리도 되지 않는.
쿵. 쿵. 쿵.
우릴 어떻게 죽일 것인지 드디어 결정을 내린 듯 드래곤이 천천히 움직였다.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그 모습이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억만년같이 길게만 느껴졌다.
난 차라리 보지 않겠다는 듯 눈을 꼭 감았다.
후우욱.
어느새 가까이 왔는지 녀석의 입김이 확 하고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으, 결국엔 잡아먹히는 쪽인가.’
나 잡아먹어 봐야 맛도 없을 텐데.
하지만 어찌 된 일일까? 금방이라도 날 잡아먹을 것만 같았던 드래곤은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인간이 호기심의 동물이라 불리는 것처럼 나 역시 갑자기 똬리를 틀고 일어선 호기심에 천천히 실눈을 뜨며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아보려 했다.
“헉!”
하지만 금방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난 그대로 기겁을 하며 뒤로 넘어갔다.
마치 날 관찰하듯 내 키만 한 눈동자가 정확히 눈앞에서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 다음부터였다.
그렇게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날 향해 어디선가 귀여운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숙녀를 보고 놀라서 자빠지다니, 실례잖아!”
“……?”
난 잠시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죽을 때가 되니 환청까지 들리는구나.”
하지만 그 말에 발끈한 듯 또다시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이라니, 더 실례잖아. 기껏 숙녀가 먼저 말을 걸어 줬는데.”
이로서 환청은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하지만 상황은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무리 봐도 나에게 말을 걸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말하고 있는 거지?
“야! 너, 어딜 보는 거야? 바로 앞에 있잖아. 숙녀를 몰라보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앞에?’
난 다시금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건 천장을 향해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있는 드래곤 한 마리뿐이었다.
“에이, 말도 안 돼.”
설마 저 드래곤이 말한 건 아니겠지. 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날 경악에 떨게 만들었다.
“뭐야. 말이 안 되기는 왜 안 돼. 나 맞아. 네 앞에 있는 드래곤.”
“…….”
머릿속의 사고 기능이 정지해 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마, 말도 안 돼. 드래곤이 말하다니!”
“얘, 정말 웃긴다. 그럼 드래곤이 말하지 말라는 법도 있니?”
“그건 아니지만…….”
하지만 내가 알고 있기론 드래곤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능은 물론 높지만 말이란 건 구강 구조가 받쳐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봐도 드래곤의 구강 구조는 말하기엔 적합하지는 않았다.
거기다 여태껏 저 드래곤이 입을 연 걸 난 보지도 못했다.
“복화술이라도 익혔나.”
“호호호호! 복화술 같은 게 아니야. 아, 그러고 보니 내 본모습을 아직 보여 주지 않았구나. 미안해. 잠시만 기다려.”
그 말과 동시에 내 앞에 조그마한 빛 덩어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구슬 정도의 크기였지만 점차 빛을 흡수하듯 커지더니 이내 내 손바닥보다 좀 더 커졌다. 하지만 더 커질 생각은 없는 듯 마치 빛이 깨져 나가듯 사위로 퍼지더니 그 자리에는 빛 덩어리가 아닌 반투명한 요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찰랑이는 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마치 나비와도 같은 날개를 퍼덕이며 떠 있는 요정은 내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앙증맞고 귀여운 얼굴. 금빛 머리는 양 갈래로 땋아 귀여움을 한층 더 부각시켜 주고 있었다.
조금 과격한 표현으로 아그작 씹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에 크리스 역시 시선을 빼앗기며 멍하니 그 요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정인지 드래곤인지 이제는 헷갈리는 그 소녀는 우리 둘의 시선에 한껏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런저런 다양한 포즈로 우리 둘을 더욱 황홀함에 빠뜨렸다.
크리스와 내가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문득 정신을 차린 난 잠시 고민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숙녀란 건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거였지?”
귀엽고 앙증맞은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숙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그런 내 말에 소녀는 상큼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살짝궁 씹어 줄까?”
“…….”
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군.
“그보다 넌 도대체 누구지? 많은 기록을 보지 못해 드래곤에 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드래곤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는지는 금시초문이군.”
소녀의 묘한 박력에 입을 다문 날 대신해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며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난 그런 크리스의 말에 조금 놀랐다.
“헤. 드래곤은 원래 이런 게 아니었어?”
난생처음 보는 드래곤이기에 난 모든 드래곤이 다 이런 능력을 가진 줄 알았다. 내가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호호호호. 물론 드래곤에게 이런 능력은 없지.”
소녀는 깜찍하게 웃더니 마치 숙녀의 그것처럼 치마를 붙잡고 정중히 인사를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