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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25화)
제5장 재회(再會)(3)
‘하아…….’
긴 한숨에 밤의 그림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고요한 정원 내 풍경 역시 심란한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긴 물결을 드리웠다.
旅館寒燈獨不眼
여관의 찬 등불 아래 홀로 잠 못 이루고,
客心何事轉凄然
나그네 마음 무슨 일로 점차 쓸쓸해지니.
故鄕今夜思千里
이 밤 고향 생각하니 천리 길인데,
霜빔明朝又一年
서리 내린 귀밑머리 내일 아침이면 또 한 살 느는구나.
잔잔히 읊조리는 그녀의 근심이 한 올 한 올 묻어난다.
이대로 쓸쓸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새장 같은 이곳에서 난 평생을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직 어린 나이건만 북궁연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오늘도 내일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그런 삶뿐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무슨 일로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는 시를 읊고 있는 것이냐?”
학창의 차림의 북궁명이 다가오며 물었다.
“명 오라버니…….”
“누가 우리 예쁜 막내를 슬프게 한 거지? 아버지신가? 아님 우리 모두인가?”
“그냥 답답해서 그런 것뿐이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연아, 네가 그리 말한다 해서 모를 내가 아니고, 또 네가 그리 말한다 해서 내 마음이 편하지도 않구나.”
북궁명을 빤히 올려다본 북궁연은 이렇게 말했다.
“여인으로 태어나 그 숙명을 거스르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운 일인지요. 무가의 딸로 태어났으니 다른 이들보다 좋은 조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조금의 가능성이 절 더욱 힘들게 해요.”
“그리 힘들었더냐?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다면, 네가 이리 외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제 무공이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아니 제가 남자로만 태어났었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아쉬움만을 반복하는 제 삶이 싫어요. 당당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의 부속품이 아닌 스스로 당당하고 싶어요. 결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요. 그게 그렇게 불가능한 일일까요?”
“아버지께서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도 알 것이다. 강호라는 곳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아수라장이다. 그런 곳에 널 내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버지나 나나, 그리고 휘 형님이나 마찬가지란다. 한데 너는 그곳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구나. 그 점이 난 걱정이 된단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여자라는 이유가 가장 크겠죠. 그래서 강한 남편을 만나 함께 강호를 누비는 것만이 제게 주어진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전 그것이 싫어요. 전 누군가에게 의지를 해야 할 만큼 약하지 않다고요.”
“후, 부질없는 너와 나와의 언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니? 차라리 아버님을 설득해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한데……. 마침 저기 오시는구나.”
긴 회랑을 타고 그림자 하나가 길게 늘어선다. 얼핏 보기에도 커다란 체구가 눈에 띄는 그런 그림자였다.
“어서 오세요, 아버지.”
북궁명은 북궁철우를 보며 인사했다.
“오셨어요?”
“남매지간에 무슨 큰일이라고 이리 늦은 밤에 소란을 떨고 있는 게냐? 저 너머까지 또랑또랑 잘 들리더구나.”
“다 듣고 계셨으면, 연이의 생각을 아시겠군요. 이만 놓아주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놓아주다니, 누굴 놓아준단 말이냐?”
“연이지 누구겠습니까? 이제 아버지 품에서 벗어날 나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흥!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 올바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보호하는 것이 아비된 의무이거늘, 넌 그것을 하지 말라고 내게 강요하는 것이더냐?”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진심으로 연이를 생각하신다면, 연이에게 자유를 주십시오. 위험하다 하여 연이만을 감싸고 도시는 까닭은 어머니 때문이 아니십니까?”
“닥치거라. 어디서 네 어미를 입에 올리는 것이더냐. 내가 널 그리 가르치더냐?”
불같이 화를 내는 북궁철우의 모습은 진심이었다. 그가 사랑하고 미안해하는 그의 아내를 함부로 입에 올린 것에 대한 분노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어머니만큼, 연이의 생각도 중요합니다. 제발 들어주세요. 연이의 꿈을 올바르게 보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북궁명은 북궁철우에 기세에 맞서며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자 한 자 말했다.
“많이 발전했구나. 날 정면에서 그렇게 바라볼 정도로.”
마음 한 켠에서는 기쁜 마음이, 한 켠에서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기세를 더 올리며 북궁철우는 말했다.
“아직은 아니다. 하나, 연이가 만일 천왕십이도법을 십 성까지 모두 익힌다면, 허락하마.”
“아버지!”
북궁연과 북궁명이 동시에 소리쳤다.
아직 북궁철우를 제외한 누구도 십 성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기재라 불리는 북궁휘조차 벌모세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팔 성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을 어찌 십 성까지 익힌단 말인가?
“대신 연이에게 대환단을 주마. 늦었지만 세가 원로들로 하여금 연이를 벌모세수하게 하마. 이 정도로 내가 양보했다면, 이제는 연이 네가 양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찌하겠느냐?”
“대환단이라니요? 오늘 소림분들이 오신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북궁명은 소리쳐 물었다.
“뭐, 그런 이유도 있고…….”
사실을 말하기 쑥스러운 북궁철우는 얼버무리 듯이 대답했다.
“하겠어요. 꼭 천왕십이도법을 십 성까지 익히겠어요.”
이것이면 충분했다.
부친이 스스로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희망이 없던 방금 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 그러면 내게 약조 하나를 해 다오.”
“무엇인지요?”
“무공을 다 익힌 연후, 네가 누구를 만나든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오 년 안에 익히지 못한다면, 내가 정한 혼처에 시집을 가거라. 그것이 내 조건이다.”
북궁명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동생인 북궁연이 뛰어난 신체 조건을 가진다 해도, 오 년 만에 십 성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버지, 그건…….”
“그만!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약조 드릴게요. 반드시 해 보이겠어요.”
북궁연은 주먹을 꼭 쥐고서는 대답했다.
“연아, 안 돼.”
“오라버니, 제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요. 지금이 아니면 안 돼요. 그래서 전 반드시 해내야 해요.”
“결심이 섰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준비하도록 하겠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북궁철우는 딸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아직 어리기만 한데, 어찌 아까 같은 시를 읊는단 말인가?
“연아, 다시는 조금 전과 같은 서글픈 시를 노래하지 말거라. 이건 아비의 개인적인 부탁이다.”
말을 마친 그는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축 처진 듯한 어깨가 오늘따라 더 안쓰러워 보인다.
“아빠…….”
열 살 이후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렀다. 그만큼 그의 모습이 힘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연아, 할 수 있겠니?”
“해야죠. 반드시.”
다부진 결심의 대답이 들려 온다. 한 손으로 북궁연의 어깨를 툭툭 치던 북궁명이 말했다.
“참, 우리 소림의 스님들께 감사 인사라도 하러 가는 것이 어떻겠니?”
“너무 늦지 않았을까요?”
“뭐,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니, 서두르자꾸나.”
“네, 오라버니.”
똑.똑.
“대사님. 세가의 자제분들께서 오셨습니다. 어찌할까요?”
정좌한 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던 대지는 두 눈을 뜨며 말했다.
“들어오시라 하게나.”
“네. 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북궁명과 북궁연이 거실로 들어섰다.
“북궁명과 북궁연이 소림의 고승을 뵙습니다. ‘
“아미타불. 고승이라니요. 그냥 대지라 합니다.”
“아…….”
대지라는 말에 둘은 크게 놀랐다. 십수 년 전부터 이름을 떨치고 있는 소림승을 처음으로 만난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사대 금강의 수좌로서, 소림제일승의 제자로서, 그리고 그가 강호에서 보인 행보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사님.”
“아닙니다. 그런데 늦은 시간에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자신의 명상을 깬 것에 대한 작은 책망이 담겨 있었다.
“죄송합니다. 늦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는 생각에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고마움이라니요?”
“아버님께 들었습니다. 이번에 귀한 물건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여동생이 그 덕분에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대지의 시선이 북궁연에게로 향했다.
‘세가의 가주가 애지중지한다는 딸이 바로 이 아가씨구나. 소문처럼 참으로 곱구나.’
북궁세가의 영애가 뛰어난 미인이라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실제 그 모습을 보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드립니다. 저로 인해 먼 길을 오시게 하는 수고로움을 끼쳤습니다. 후일 이 고마움을 꼭 갚겠습니다.”
“하하, 아닐세. 나야말로 심부름만 하는 처지인데 이런 감사를 받다니, 오히려 미안해지려 하네. 그러니 과례치 말게나.”
세 사람이 함께 웃으며 말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큰소리가 났다.
“악!”
대지는 안색이 급변하면서 서둘러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위의 한 소년이 온몸을 뒤틀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다른 방문이 열리면서 또 다른 승려가 다가왔다.
“대오야, 아무래도 네가 경계를 봐주어야겠다.”
대지는 아이를 한 손으로 고정시키고 다른 한 손으로 명문혈에 대고는 서둘러 기식을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아이는 괴로운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밖에서 그 모습을 바로 보고 있던 북궁연은 자신도 모르게 문 안으로 들어섰다.
끔찍한 독상과 화상으로 얼룩져 있는 아이의 얼굴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고통이 심한 와중에도 아이의 눈은 그녀의 얼굴에 곧게 맺혔다.
북궁연은 한 발 두 발 다가갔다.
옆에서 대오가 제지하려 했으나, 북궁명이 그를 말렸다.
“괜찮아. 그러니 그렇게 몸부림치지 마.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 안심해도 돼.”
그녀를 쳐다보던 아이의 얼굴에 뿌연 습막이 생겼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녀의 얼굴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바보 같이, 울지 마. 남자는 겉으로 우는 게 아니야. 마음으로 울어야지. 태산처럼 듬직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이를 보호해 줄 정도로 강해야 돼. 그런데 이만한 고통에 지거나 흔들려서는 안 돼. 알았지?”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나 한 걸까? 아니면 몸속에 기운들이 잠잠해져서일까?
아이의 얼굴이 점점 편안해졌다.
“휴우…….”
대지가 등에 대었던 한 손을 떼자 아이는 힘없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앞에 있던 북궁연이 아이를 얼른 받았다. 그리고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이를 보듬어 안았다.
처음으로 보는 처참함이었다. 늘 좋은 것, 고운 것만을 보아 왔던 그녀에게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을 본 것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사님, 이 아이 살 수 있는 건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리될 것이네. 아이도 잘 참아 주고 있으니, 꼭 그리될 것이네.”
“꼭 살려 주세요. 사람답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꼭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왕수강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고맙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북궁명은 누이와 그녀의 품속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고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 역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어떻게 될까?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전신을 훑어 내렸다.
“연아, 이제 그만 나가 보자꾸나. 더 이상 이곳에 있는 것은 예가 아닐 듯싶구나.”
북궁연은 아이를 침상에 눕히고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늦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닐세. 자네의 동생이 많은 도움이 된 듯하네. 아이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 보이는군. 오히려 내가 고맙네.”
북궁명은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는 발길이 원하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 * *
“오셨습니까?”
“네. 상세는 조금 어떠한지요? ‘
“새로 의원님께서 오셔서 돌봐 주고 계십니다. 아직 어떤 차도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긴 망사로 된 발의 뒤편에는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사람이 있었다.
문성 공주였다.
북궁명은 그 모습을 보다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비목어가 될 수만 있다면 어찌 죽음인들 사양하랴(得成比目何辭死). 노조린의 심정이 이랬을까?’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사람이었다. 형과의 혼담을 막기 위해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다 보니, 어느새 마음을 두고 말았다.
평생을 스스로를 찾기 위한 구도자의 삶을 살리라 했던 맹세는 덧없이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세가를 위해서라고 스스로의 정당화했지만, 이미 마음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돌아서야 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조금이라도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거든 내게 말을 해 주시게나.”
“그리하지요.”
아영은 북궁명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소가주가 아닌 그를 마음에 두셨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아닌가? 어쩌면 공주께서도 그를 마음에 두고 계셨을지도 모르겠구나.’
중독되기 며칠 전, 환한 미소로 치장을 준비하던 문성 공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북궁명과 함께 치박 근방의 저잣거리에 나간다고 들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인가가 떠오를 듯 말 듯했다.
‘뭐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 그녀다.’
북궁명과 문성 공주가 다정히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다가온 사람. 북궁명의 사매라고 했던…….
‘이름이 뭐였더라……. 적…… 적…….’
그때 그녀가 매서운 눈으로 공주를 바라보자, 북궁명이 급히 사과하게 만들었던 그녀. 원망하는 듯 북궁명을 바라보다가 아무런 말없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
‘공주께서는 이전까지 건강하셨다. 그런데 그녀를 만난 이후에 갑자기 저렇게 되신 것이지. 범인은 누구일까? 북궁휘의 아내일까? 아니면 비약이긴 해도, 북궁명의 사매일까?’
아영은 북궁명을 보고 말을 걸었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번에 저잣거리에서 만난 둘째 공자님의 사매분의 성함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사매의 이름을 말입니까?”
흠칫하는 표정으로 북궁명이 되물었다.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네, 맞습니다.”
“연유를 물어봐도 되겠는지요?”
아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공주께서 최근 만나셨던 분들에 대해 알아 두어야 할 듯싶어 물어본 것입니다.”
“뭐, 그런 이유라면야. 적희영. 그녀의 이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고개를 숙인 북궁명은 다시 한 번 침상을 돌아본 후 걸음을 내딛었다.
* * *
“너는 지금 가서 모 위사를 불러오너라.”
“네. 마마님.”
검은 무복의 한 청년이 곧이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정아.”
“네, 누님.”
“넌 지금 관부로 가서 북궁명의 사매인 적희영과 북궁휘의 아내인 소소란에 대해 알아보거라. 혹시 이 근방에 있는지, 아니면 태산파로 돌아갔는지, 또 최근 누군가를 만났는지 소상히 알아보거라. 필요하다면 하오문에 의뢰해도 좋다.”
“무슨 일이신데 그러십니까, 누님.”
“뭐랄까. 그냥 느낌이다. 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한 느낌.”
“알겠습니다. 참. 북궁세가 밖에 지난달부터 거지 한 명이 죽치고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개방 사람인 듯하던데, 그쪽에도 의뢰를 넣어 볼까요?”
“개방?”
“네. 그런 쪽이라면 하오문과 쌍벽을 이루지 않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을 수도 있고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하거라. 하지만 반드시 명심할 것은, 적희영만은 그간 행적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기왕이면 그녀의 가문이나 기타 정보 역시 모조리 알아 오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어서 서둘러야 한다.”
* * *
노소평은 공주의 체내에 있는 독의 해약을 만들기 위해 몇 가지 약재를 실험하고 있었다.
‘사매가 주로 사용하는 것이 약한 독성을 지닌 조협과 마취 성분이 들어 있는 세신(細辛)을 넣고, 몸의 냉열을 조절하는 시호(柴胡)를 섞은 뒤, 풍미산에 염낭을 두 푼 정도 넣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나머지를 알 수가 없으니…… 휴, 하나하나 실험을 하자니 시간이 부족하구나. 일단 이것이 맞는지부터 알아봐야겠다.’
약당 내에 간이 침상을 놓고 긴 탁자 위에 하나씩 약재를 꺼내어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들고, 조금 전 채취해 온 혈액의 일부에 하나둘 중화제를 넣어 보고 색깔의 변화 여부를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서로 상극이 되는 약재를 하나씩 검토하는 작업은 지루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긴 밤을 지샜음인가? 어느새 작은 틈으로 햇살이 들어왔다.
기지개를 펴는 노소평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났다.
‘다행이다. 사매가 그리 독한 성분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천운이야. 만일 내가 이 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더라면, 혹은 여기에 학정홍이 극소량만 섞여 있었다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 될 수도 있었겠구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약의 성분들을 알아냈지만, 해독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기에 약간의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문을 나서는 그의 눈을 햇살이 강하게 부딪혔다. 집무실로 향하는 그의 걸음이 한결 가볍다.
“가주님. 노 의원님께서 오셨습니다.”
생각보다 이른 시각에 찾아온 노소평을 북궁철우는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노 의원님의 얼굴을 보아하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어서 좋은 소식을 내놓으라는 듯 얼굴을 바짝 가져가며 물었다.
“하하, 제 얼굴에 그리 쓰여져 있습니까? 다행히도 약의 성분은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해독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이것으로 큰 걱정은 덜 수 있을 듯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노 의원님.”
북궁철우는 기뻐하며 노 의원의 양손을 맞잡았다.
“제가 예상했던 독이라 다행이었습니다. 만일 조금만 달랐어도 크게 위험할 뻔했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겸손하게 말하는 노소평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두 번이나 저희 세가를 구해 주시는군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두둑이 은자나 주십시오. 이곳 치박은 덜하지만, 지금 굶어 죽거나 치료를 받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는 이들이 저희 도가의방 근처에는 무수히 많답니다. 그러니 넉넉히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고 말고요. 내 크게 드리리다. 그러니 어서 공주님을 이전처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그리하겠습니다. 단지 어제 제가 드린 부탁을…….”
“그 문제라면 제가 당부해 두었으니, 큰일은 없을 것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소평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휴,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내당상궁에게 가 보지요. 아마도 그녀가 가장 속이 타고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가는 발길을 서둘러 내원으로 향했다.
* * *
노소평이 독약의 성분을 발견한 탓에 공주의 상처는 조금씩 호전되었다.
하지만 공주의 상처가 호전될수록 후원의 분위기는 점점 더 냉랭해지고 있었다.
“마마님, 공주님께서 깨어나시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평소 공주의 성품을 미루어 짐작컨데,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각오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너와 내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이다. 보필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누가 그런 일을 했는가를 밝혀내는 일 또한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넌 함구하고 있어야 한다. 이곳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다른 궁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입조심을 시키거라.”
아영은 말을 하는 동시에 조금 전 도착한 한 서신을 살펴보았다.
적희영.
호북 적씨세가의 장녀입니다. 어려서 몸이 약한 관계로 태산파에 여동생인 적약약과 함께 수련차 보내졌습니다.
무공은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성품이 온화하고 배려심이 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북궁명이 세가로 돌아가서 꽤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자, 이곳 치박에 작은 장원을 구입해서 동생과 함께 머무르고 있습니다.
장원에는 적씨세가에서 보낸 유모 외에 호위 무사까지 대략 이십여 명 정도가 머무르고 있으며, 외부인과의 접촉은 없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소소란.
치박의 유지인 소정포의 유일한 여식입니다. 무공은 익힌 적이 없고, 전형적인 현모양처입니다. 자식으로는 북궁협이 있습니다.
최근 저잣거리 약당에서 조협을 구매해 갔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몸이 약한 관계로 북궁휘가 거의 함께 지낸다는 것을 빼고는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추신. 개방의 인물은 화개 구충으로 드러났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북궁명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영은 서신 중에 조협이라는 글자에 주목했다.
노소평이 얼마 전 약의 성분 중에는 조협이 들어 있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예상대로 그녀인가? 공주님께는 그리 말씀드리는 것이 나을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데…….’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궁에서는 있었던 일도 없던 일로, 없던 일도 있는 일로 만들어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어 정적을 제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이깟 일을 조작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곳이 궁이 아닌 북궁세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이곳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라는 것이 걸림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