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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24화)
제5장 재회(再會)(2)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저녁 하늘에는 소리 없이 빛들의 향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태양 빛이 사라지자, 그동안 억눌려 지내던 수많은 별들이 저마다 뽐내듯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빛이 변해 간다. 한사람의 얼굴로, 또 다른 이의 얼굴로.
“하아…….”
작은 입술로 토해 내는 한숨 속에는 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누군가를 향한 원망, 누군가를 향한 적개심, 그리고 자신에 대한 한탄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정자 한 켠을 스치는 옷자락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미워할려야 미워할 수 없는 이의 얼굴이 다가온다.
“당신…….”
“왜 나와 있는 거요? 몸도 편치 않은 사람이.”
물끄러미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잘생긴 얼굴이다. 짙은 검미하며, 하늘을 담고 있는 맑은 눈빛,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까지.
언제나 자신만을 바라보던 그 얼굴이 얼마 후면 다른 이를 향해 웃음을 지어야 할 것이다.
“…….”
“왜 말이 없는 것이오. 공주 때문에 그런 것이오? 그렇다면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난 당신 이외의 어떠한 여인도 아내로 맞이할 생각이 없소. 그러니 날 믿고 기다려 주시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에요. 공주의 청혼을 받아, 이미 부마로 간택된 상황에서 어떻게 혼인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요? 설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 후의 일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이 거대한 북궁세가의 소가주라는 입장을 생각해 보신 건가요?”
억눌린 마음을 쏟아 내듯 그녀는 북궁휘에게 물었다.
“난 다른 것은 필요 없소. 가문에서 내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어떤 이유라 해도 당신과 바꿀 수는 없소. 평생 내게 굴레처럼 씌인 이 짐을 차라리 이번 기회에 벗어나고 말겠소. 소린, 누가 뭐라 해도 현재도 미래도 내 옆에 있을 사람은 당신이오. 마음을 굳게 먹으시오.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당신과 협이만 있다면, 난 견뎌 낼 수 있소.”
말수가 적은 이가 자신의 남편이 아니던가. 아이를 낳았을 때도 단 한마디 ‘수고했소’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긴 표현을 하고 있었다. 구구절절 흩어지는 소리들이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만큼은 참으려 했다. 약해져 가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그 앞에서는 보여 주기 싫었다.
‘미안해요. 모든 것이 그렇게 흘러갈 것을 알지만, 어쩌면 전 당신에게 용서 못 할 죄인이 될 수도 있겠네요, 휘랑.’
자신을 안아 주는 그의 품이 너무 따뜻했다. 그 따뜻한 만큼이나 스스로의 마음에는 한기가 일었다. 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절망적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함께 들어가는 것이 어떻소. 이렇게 오래 밖에 나와 있는 건 좋지 않소.”
무예를 모르는 아내가 걱정되었다. 평소 몸이 많이 약한 그녀가 이번 일로 인해 겪었을 고초를 생각하니,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안고 있던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놓치지 않을 것이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 * *

북궁세가에 도착한 일행은 마인풍의 안내 아래 집무실에 다다랐다.
평소 북궁철우가 머무는 곳은 주로 연무장이지만,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집무실에 거처하며 추이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먼 길까지 찾아와 주셔 감사합니다, 대사님. 그리고 노 의원님. 말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만 간단히 말씀드리지요.”
북궁세가의 상황이 많이 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주가 직접 나서야 할 정도의 일,
그리고 세가의 이인자라 할 수 있는 의동생을 보내어 의원을 데려와야 할 정도의 일,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대지였다. 게다가 차를 준비하고, 멀리서 온 손님의 안부를 묻는 순서조차 없이 바로 본론을 꺼내는 모습에서, 일순간이지만 조금은 급박하다는 느낌을 주는 언행이었다.
“무슨 일이신데 그러시는지요. 소승이 알아서는 아니 될 일이라면, 잠시 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강호에서는 쓸데없는 분란에 끼는 것을 금하고 있다. 들어서는 아니 될 말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리 없이 사라졌던가?
대소문파를 막론하고 치부가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살인 멸구쯤은 우습게 여기는 곳이 바로 그가 살아가고 있는 땅이었다.
“음……. 대사님. 제가 소림에 부탁한 일과 이 일은 서로 무관하오니, 외람된 말씀이나 잠시 후에 다시 뵈었으면 하는데, 어떠하신지요?”
“그리하겠습니다. 사제들과 함께 잠시 다른 곳에 묵고 있겠습니다. 조금 뒤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대지는 사제들을 이끌고 마인풍과 함께 후원으로 향했다.
“노 의원님, 이야기는 들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가 보시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서둘렀습니다.”
생명의 은인인 노소평에게 깍듯한 존칭으로 그 고마움을 표시하는 북궁철우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자신의 아내가 목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지키고자 했던 세가였다. 그런 세가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서두르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가주의 안색을 보니 환자의 상태가 많이 악화된 듯하군요. 빨리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가시지요.”
발걸음을 재촉하는 북궁철우와 노소평의 그림자에는 분주함과 근심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저녁노을에 얼굴을 묻고 있던 화원의 꽃들이 하나둘 피어 있던 꽃잎을 감추고, 기묘한 정원의 석회암들이 수많은 그림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마님, 가주께서 오셨습니다. 의원분과 함께 오신 듯합니다.”
“어서 뫼시어라.”
안으로 들어온 노소평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제향초의 향이 그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침상 위에 누워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이미 중독 증세가 많이 진행된 모양새였다.
“제가 진맥을 해 봐도 되겠는지요?”
노소평이 북궁철우의 얼굴을 보며 말을 하자, 북궁철우는 머리를 들어 올린 아영을 보고 눈으로 물었다.
“그리하시지요. 너희들은 잠시 물러가 있거라.”
노소평은 잠시 아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본시 옥체에 손을 대는 것이 큰 실례이나, 지금은 위급 상황이니 손으로 직접 진맥을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지요?”
잠시 망설이던 아영은 그래도 좋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진맥하던 노소평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맥이 가늘게 뛰고 중간 중간 무엇인가에 막힌 듯한 맥점이 잡혔다.
그는 가지고 온 침을 꺼내어 공주의 팔 가운데 혈관에 조심스레 찔러 넣은 후 상태를 지켜보았다.
점점 검게 변하는 침의 끝 부분을 보던 그는 절로 침음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몇 가지 가루로 된 약재를 꺼내어 혈흔이 묻어 있는 침에 뿌렸다.
검붉은색 피가 잠시 흐려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급속히 굳어지는 현상을 보였다.
“음…….”
북궁철우와 아영은 노소평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보고 안색이 딱딱해졌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을 인식이라도 한 듯 저마다 얼굴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운을 뗀 것은 아영이었다.
“의원님, 어찌 된 것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직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좀 더 살펴보아야 어떤 독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혈액까지 독 기운이 침범한 상태로, 이대로라면 며칠 넘기지 못하실 것입니다. 일단 독 기운을 약화시키는 탕약을 만들 터이니, 그것을 먼저 복용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주님께서는 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북궁철우는 노소평의 말에서 그가 무엇을 언급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따로 이야기하고자 함은 필시 다른 이유가 있을 터인데, 정말 답답하구나.’
노소평이 약방문을 적어 아영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매 두 시진마다 한 번씩 드셔야 합니다. 약을 먹는 시간과 양을 반드시 지켜 주셔야 합니다.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린 아영은 한 시비를 보고 말을 이었다.
“너는 어서 약당에 가서 이것을 보여 주도록 해라. 그리고 직접 약을 달여서 가지고 오너라.”
“네, 마마님.”
시비와 북궁철우, 그리고 노소평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결심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만일을 대비해 둘 필요가 있겠어.’

“무슨 연유로 따로 보자고 한 것입니까?”
“음,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나, 현재 공주님의 몸에 잠재되어 있는 독이 생각보다 너무 강합니다. 일단 정확한 해독법이 나오기 전까지는 당분간 제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 듯합니다. 단지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문제라면…….”
“만일 지금 공주께서 중독되신 독이 제가 아는 독이라면, 재차 다시 중독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겠군요. 제게 악연이라 할 수 있는 이가 있습니다. 강호에서는 독소홍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지요.”
“독소홍 다인!”
북궁철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아!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녀가 직접 독을 쓴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그녀의 독을 얻어 사용한 것인지…….”
“하면, 지금 공주께서 중독된 독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까?”
“정확하지는 않으나, 제 짐작이 맞다면 ‘다정한(多情恨)’이라 불리는 독입니다. 약을 제조하는 방식은 무수히 많으나, 특징이 있습니다. 일단 환자의 피부가 시체처럼 창백해지고, 그와 반대로 몸의 신진대사는 극도로 빨라집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온몸이 팽창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공주님의 상태와 유사하지요. 하지만 이 상태로 이레가 지나면, 몸속에 있던 모든 양분이 빠른 신진대사 덕에 모두 빠져나가 깡마른 시체가 됩니다. 마치 처음 사랑할 때와 이별 후 나타나는 증상과도 유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다정한이라…….”
이름은 애절하나, 그 독의 증상은 끔찍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녀가 직접 독을 푼 것이 아니라면, 이번 한 번으로 끝나겠지만…… 만일…….”
뒤의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단 사람을 풀어 그녀의 행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꼭 잡아야겠습니다.”
북궁철우의 입매가 매서워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소평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가주님, 부탁이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노소평을 바라보던 북궁철우가 말했다.
“무슨 부탁인데, 그리 어렵게 말씀하시는지요?”
“그녀를 잡게 되면, 아니 잡으시더라도 다치지 않게 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음……. 연유가 있을 테지요. 제가 알아서는 안 될 일입니까?”
“후, 개인적으로 제 스승님의 하나뿐인 딸이자, 제 사매가 되옵니다. 비록 괴의로 유명하나, 이유 없는 살생은 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러니 손속에 사정을 두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이유가 그러하다면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만일 저항이 심하다면 불상사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답을 들은 노소평의 얼굴이 조금은 펴졌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무거웠다.
‘사매가 정말 이러한 독을 썼단 말인가? 어쩌자고 북궁세가와 척을 질 수도 있는 일을 벌였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사태가 잘못되면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질 터인데, 큰일이 아닐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선을 다해 공주님을 치료하는 수밖에 없구나.’
이런 생각이 든 노소평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가주님, 전 일단 약고에 들러 필요한 약재와 침구를 정리하고, 바로 공주님의 처소에 들겠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온 일행 중에 다친 이가 있는데, 다른 의원을 시켜 돌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저도 노 의원님께서 공주님의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소림에서 온 분들을 찾아뵈어야겠습니다. 필요하신 일이나 전할 말씀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을 주십시오.”
노소평과의 대화에서 독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읽은 북궁철우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러한 일을 벌였는지 궁금증이 더해만 갔다. 공주를 위해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자신의 세가를 노린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사정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 빠른 시간 안에 해결해야겠다는 다짐만을 되풀이했다.

노소평과 헤어진 북궁철우는 아우인 사량객을 불러 독소홍의 행방을 쫓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소림승들이 기거하기로 한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편히 쉬고 있었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대지는 품속에서 작은 옥함을 꺼내어 들었다.
“여기 부탁하신 대환단입니다. 맞는지 살펴보시지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이리 귀한 물건을 보내 주시다니. 돌아가시게 되면 방장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고 꼭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아, 참. 제 정신이……. 약조한 것은 돌아가시는 길에 따로 사람을 통해 소림으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겉치레는 이 정도면 된다 여긴 북궁철우는 마음이 급해졌다.
“먼 길을 오신 분들께 계속 실례만 범하고 있군요. 피곤하실 텐데, 제가 먼저 자리를 뜨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후에 조촐한 자리나마 마련하려 하니, 그때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번거로우실 텐데 일부러 그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산사에 있던 저희는 오히려 지금이 편합니다. 그러니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지금은 자리를 뜨기가 조금 불편하기도 합니다.”
말을 하면서 대지는 대각과 침상에 누워 있는 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 그럼 일단 세가 의원들로 하여금 두 분을 살펴보도록 하라 일러두겠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가주님, 그보다는 다른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지요.”
“되도록이면 빨리 소림으로 떠나고자 합니다. 내일이라도 준비가 되는 대로 가고자 하니,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 말씀이십니까?”
“그러합니다. 이곳에서의 일은 마무리된 것으로 사료됩니다. 저희 일행 역시 급히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해서, 저 아이의 상태가 조금이나마 호전된다면 바로 떠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준비해 두라 일러두겠습니다. 먼 길을 오셨는데 이렇게 빨리 떠나신다니, 서운하기 그지없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뵈 올 것이니, 그때 회포를 풀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북궁철우의 발걸음은 내당에 자리 잡고 있는 북궁연의 거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