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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운명을 바꾸다 1권 (1화)
프롤로그
운명의 붉은 실이란 전설이 있다.
신이 운명의 상대들에게 붉은 실로 새끼손가락을 감아 두어 평생 함께할 인연을 엮어 준다는 전설.
전설대로 실이 인연의 상대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붉은 실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 실을 볼 수 있었으니까.
새끼손가락 끝마디에 묶여 있는 붉은 실.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어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게 전부지만 이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사람마다 붉은 실이 없는 경우는 없으며, 모든 실은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있다.
실의 끝은 어디일까.
전설대로 하늘 너머 인연의 상대와 묶여 있을까? 아니면 천상의 나라로 이어져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 운명이란 게 있다면…….
진정 신이 운명이란 것을 만들어 놓았다면…….
부디 신이시여, 부탁합니다.
제 동생 지현이를 살려 주세요.
1. 불공평한 운명 (1)
‘이 씨네 얘기 들었어?’
‘그럼, 잘 알지. 애 엄마 혼자서 두 남매를 키운 집 맞지?’
‘쯧쯧, 참으로 딱하지. 회사 부도에 남편이 자살했는데도 그 애 엄마, 그렇게 억척같이 버텨 왔었는데.’
‘그러게, 이제 어찌어찌 사나 했는데, 여아가 갑자기 불치병이라니.’
‘정말 운도 없지. 안타까워 어째, 쯧쯧쯧.’
신은 가혹하다.
하나만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일들을 매번, 희망이란 걸 갖는 순간 앗아 가 버린다.
그 시작은 아버지.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는 그리 잘나가진 않았지만, 부근에선 인지가 높은 중소기업이었다.
하나 1997년 11월 21일, IMF가 터지면서 우리 집은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부채를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나와 여동생이 어머니 젖조차 떼지 않은 나이에 홀로 떠나셨고, 그로부터 어머니 혼자서 억척같이 우리 남매를 키우셨다.
고시원에 터를 마련해 비좁은 방에 세 명이서 살기도 했다.
화장실도 공용에 취사도 1층 로비에서 주인 눈치 봐 가며 몰래 만들어 먹을 정도로 열악한 생활이었다.
그로부터 지하 월세 집을 전전해 가며 살아갔는데, 습기 찬 방에서 곰팡이 냄새와 씨름해 가며 10년을 버텼다.
그렇게 인내와 고비를 넘기며 겨우 빌라 전세로 이사와 드디어, 드디어…… 살 만한 정도 되나 했는데…….
신은 다시 우리 가족에게 시련을 내렸다.
이제 버틸 수 없는 절망적인 시련을.
주말 아침.
신문을 돌리고 와서 다시 잠들고 일어나니 방에 볕이 들 만큼 날이 밝았다.
집안은 엉망.
며칠 전 먹은 음식물 쓰레기도,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도, 어제 먹은 컵라면도 치워지지 않은 채 방안에 방치되어 있다.
이유는 잘 알고 있다.
어머니는 동생 병간호하느라 집에 신경 쓰지 못해 이런 것이다.
오래 전부터 봐 오던 풍경,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덤덤하다.
대충 내가 어질러 놓은 것만 치운 나는 운동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에 신문을 돌리며 로드워크를 해 뒀지만, 집에만 있기 답답해 다시 나온 것이다.
이미 마를 대로 말라 더 이상 체지방을 줄이면 안 된다고 관장님이 그랬지만…… 뭐 괜찮겠지.
내 하루 생활은 아침에 신문을 돌리고 학교에 갔다가 복싱 체육관에 들러 몸을 단련, 오후 늦게 쯤 병원에 가 동생 수발과 더불어 필요한 생필품을 사 오는 일이 전부.
오늘은 주말이라 학교 대신 더 연습에 몰두하는 것이고.
복싱을 하게 된 계기는 키 작고 소심한 나를 탈피하기 위해서였지만,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동생의 힘이 크다.
“세상에서 오빠가 가장 강해. 나에게 있어서 오빠는 히어로야!”
아직 혀 근육이 잘 움직이던 때에 동생이 했던 말이다.
지금은 말은커녕 눈조차 깜빡이기 힘들어 하지만 당시에 말은 나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헉, 헉.”
항상 같은 경로를 습관처럼 뛰다 보니 어느새 체육관에 도착했다.
이곳은 나름 유망한 체육관이라서 프로 선수도 많았는데, 중학교 때 관장님이 내 재능을 높이 사 주어 돈이 없이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말은 자랑하듯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니다.
지금 아마추어로서 고등부에서 뛰고 있지만 내 승률은 어정쩡한 6승 4패.
그나마 지역 대회 4위에 들어간 게 내 최고 전적이다.
그래, 중학교 때부터 시작했다곤 하지만, 사실 나는 그다지 잘하지도, 유명하지도 않다.
“어, 성일이 왔냐?”
더운 날이라 호스로 문밖에 물을 뿌리던 관장님이 나를 불렀다. 이젠 은퇴해서 뱃살도 조금 나오고 까끌까끌 턱수염도 잔뜩 있었지만 역시 복싱 관장답게 팔뚝 근육만큼은 프로 선수 못지않다.
“안녕하세요.”
“오늘 쉬는 날 아니었어?”
“그, 저기, 할 일이…… 없어서요. 잠깐 뛰고 있었어요.”
“그래? 그런데 뭘 그리 부끄러워해? 남자답게 어깨피고!”
관장님이 내 어깨를 팡 두드리며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이리도 자신감이 없으니 남들이 너를 얕보는 거야. 아, 그나저나 마침 잘됐다. 성일이 너 잠깐 스파링 좀 해라.”
“네? 스파…… 링이요?”
뜬금없는 스파링 제의. 항상 몸은 단련하고 있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너무 갑작스럽다.
체육관 안에는 항상 나를 봐주고 있는 정 코치님과 제각각 운동 겸 연습하러 온 사람들이 샌드백을 치고 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선수가 링 위에 올라가 있었다. 체격은 나와 비슷한 정도.
나는 저자가 스파링 상대라는 것을 직감했다.
“누구죠?”
“안성태. 너도 들어 봤지?”
안성태.
물론 들어 봤다. 복싱에 입문한 지 이제 고작 반년밖에 안 됐지만 서울 지역 아마추어 복싱 대회를 우승하며 천재 루키로 불리는 선수다.
그런 상대가 어째서 이곳에?
“원래 병하랑 스파링하기로 했는데, 도착하려면 좀 시간이 걸린다네. 몸도 풀 겸 간단히 뛰어 보라고. 저런 선수랑 스파링하는 거 성일이 너한테도 이득이잖아? 이런 기회 흔치 않아. 어때, 해볼래?”
유명한 천재 루키가 왜 여기에 있나 했더니 병하 형이랑 스파링하기로 예정되었던 건가.
병하 형은 우리 체육관에서 프로로 뛰고 있는 선수다.
아마 실전 연습 겸 상대를 알아보기 위해 부른 것일 테지.
꿀꺽, 마른침이 넘어간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천재와의 스파링.
나 같은 아마추어 복서에게 있어서 이건 어쩌면 하나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해야 해.
왼손으로 오른손 팔목을 꽉 감싸 쥔 채 가슴으로 가져갔다.
결의를 다져라, 이성일. 이미 공은 울렸어.
고민하던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관장님은 진지한 얼굴로 내 어깨를 툭 쳤다.
“반년밖에 안 됐지만 저 녀석 확실히 천재다. 방심하지 마라.”
조언과 우려가 뒤섞인 말투였다.
나는 다시 상대를 바라보았다.
나와 다르게 세간에 주목받으며 천재로 불리는 선수. 나이도 같고 체급 역시 나와 같지만 그와 나는 너무도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당신이 내 상대? 에이, 약해 보이는데.”
“…….”
상대는 자신감이 넘치는지 여유로운 얼굴로 나와 대치했다.
그로서도 실망했을 것이다.
오늘 붙을 상대가 프로로 뛰고 있는 선수일 줄 알았는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나를 상대하게 됐으니까.
“운동 겸 몸풀기니 1라운드, 원 넉다운제로 가겠다! 헤드기어는 착용하고 글러브는 8온스 시합용 글러브를 써라!”
“헤드기어요? 에이, 전 됐어요.”
헤드기어를 착용하라는 말에 안성태는 불만을 토로했다.
그만큼 나를 얕보는 거다.
순간, 속에서 욱하는 감정이 일어났지만, 이를 악 다물고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후우…… 마음대로 해라. 그럼, 준비됐으면 시작!”
관장님이 시작을 알리자 안성태는 글러브 낀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다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 과연! 메인 디쉬 전 애피타이저라 이건가? 그럼 원하는 대로 몸 좀 풀어 볼까!”
통, 통.
가볍게 뛰는 발.
상대는 나와 같은 속도를 중시한 아웃복서 타입. 아마 관장님은 안성태가 아웃복서이기에 스파링을 붙여 준 게 틀림없다.
같은 체급의 같은 타입이라면 배울 점이 무척 많을 테니까.
물론 나 역시 그런 걸 알기에 응했지만 이유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다.
대체 천재란 수식어가 뭐기에 입문한 지 고작 반년밖에 안 된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는 건가.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5년간 필사적으로 임했다.
하루도 쉰 적이 없고, 매일매일 시합에 나가는 기분으로 연습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약하고 저자는 강한가.
그걸 정한 게 운명이라면 나는 그 운명을 부숴 버리기 위해 링 위에 오른 것이다.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상대가 천재라지만 나도 필사적으로 임한다면 지지 않을 자신 있다.
고작 반년밖에 안 된 루키보다 내 발이 느릴 리가 없……!
시작을 알린 순간, 상대가 내 앞에서 사라졌다.
일순간 옆으로 턴해 내 뒤를 잡은 것이다.
황급히 몸을 돌려 가드를 취했지만, 상대는 내 얼굴에 무려 세 방이나 잽을 먹이고 뒤로 빠져나간 뒤였다.
당황한 마음을 다잡고 뒤늦게 상대를 쫓았지만, 내 발과 주먹은 상대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빠르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동체 시력만큼은 자신 있어 상대를 놓치지 않았지만, 이 능력 없는 몸이 눈을 따라가 주지 못했다.
말 그대로 눈으로만 쫓아 겨우겨우 공격을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거봐, 역시 약하잖아.”
1라운드, 2분 15초.
결국 다운 당했다.
헤드기어를 썼음에도 무차별 공격에 머리가 어지러워 넘어진 것이다.
관장님은 룰대로 내가 넘어지는 순간 스파링을 끝냈다.
평소라면 억지 부려 1라운드 정도는 풀로 뛰게 해 주었을 텐데, 관장님도 나와 상대의 실력 차가 꽤나 난다는 걸 인지했는지 급히 끝내 버린 느낌이었다.
상대는 유유자적한 발걸음으로 링을 내려섰다.
나는 멍하니 캠버스에 앉아 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일어났다.
“성일아…….”
“……죄송해요. 먼저 가 볼게요.”
상대의 고까운 말투보다도, 안타까워하는 관장님의 표정보다도, 약한 내 자신에게 더없이 화가 났다.
“제기랄.”
체육관을 문을 박차고 나가 벽에 기대 울분을 삼켰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도 신이 정해 준 천재에게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쯤은.
신이 정한 운명은 거역할 수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