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운명을 바꾸다 1권 (2화)
1. 불공평한 운명 (2)
“이거 상처가 심하겠는데…… 성일이 저 녀석 괜찮을까요?”
“후우, 어쩔 수 없지. 나도 저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줄은 몰랐다구.”
“입문한 지 반년이라는데, 천재란 참으로 무섭네요.”
“정 코치, 저 애송이도 천재지만 성일이 저 녀석도 눈만큼은 천재야. 초반엔 폭풍 같은 잽도 전부 피했었잖아.”
“그건 저도 알고 있죠. 하지만 몸이 못 따라 주잖아요. 저도 성일이 녀석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벌써 5년째입니다.”
“후우, 벌써 5년인가…… 안타깝구먼. 의지와 신념은 그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데, 안타깝게도 몸은 범재를 벗어날 수 없다니. 이대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프로가 되는 건 힘들겠지.”
창문 틈으로 들리는 대화 소리.
나는 이 이상 듣지 못하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내게 재능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3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었지만!
노력하면, 남들보다 더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면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역시 내 새끼손가락에 묶여 있는 운명의 붉은 실처럼 정해진 내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헉, 헉.”
얼마나 달렸을까.
인적이 드문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 주저앉았다.
거친 숨을 고르니 미칠 듯한 울분은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키도 작고, 더벅머리에 토끼 같은 순진한 얼굴이라 어릴 때부터 놀림 받으며 자랐다.
어디를 가든 불량배한테 돈을 뜯겼고, 심할 땐 따돌림도 당했다.
그래서 강해지기 위해, 내 자신을 바꾸기 위해 복싱까지 시작한 건데 내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약한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약할 뿐이다.
“복싱…… 포기할까.”
머리가 식으니 열정도 식어 버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왜 붙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동생의 말을 기억해 내 위로받곤 했지만, 이젠 그것도 지쳤다.
“야옹.”
언제 다가온 건지 작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발에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한창 심각하게 고민 중인데 난데없이 고양이라니.
“……달래 주는 거야?”
“야옹.”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운다.
이 녀석, 먹을 걸 바라는 건가? 사람을 피하지 않는 것을 보니 집에서 키웠던 고양이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너…… 곧 죽겠구나.”
고양이 발가락에 묶여 있는 흰색 실.
붉은빛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이제 곧 죽는다는 걸 뜻한다.
운명의 붉은 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색의 진함에 비례해 수명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가장 진한 색이 검붉은색. 다음 붉은색, 오렌지색, 노랑색, 레몬색, 그리고 흰색으로 옅어지는데, 마지막 색깔의 실이 되면 머지않아 죽게 된다.
마치 실이 그자의 수명을 나타내듯 색을 바꾸는 것이다.
고로 이 고양이는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곧 죽을 것이다.
사고든, 병이든, 아님, 그 무엇으로라도.
이 운명은 바꿀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어릴 적엔 죽음이란 운명을 바꾸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 적이 있었다.
키우던 병아리를 돌본다든가, 멀리 여행가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비행기는 타지 말라고 조언한다든가.
하지만 운명은 바꿀 수 없었다.
예방 접종을 해 체력을 찾은 병아리는 어느 날 갑자기 길고양이에게 잡아먹혀 버렸고, 이웃집 아주머니는 내 조언으로 비행기 사고에 휘말리지는 않았지만, 그 다음 날 강도가 들어와 죽고 말았다.
그렇듯 아무리 노력해도 죽음이란 운명은 계속 상대를 뒤따르는 것이다.
“네 운명을 구해 줄 순 없겠지만…… 이거라도 좋으면 먹겠니?”
열량 섭취용으로 가지고 있는 육포를 조금 찢어 주었다.
고양이는 두 발로 육포를 고정한 채 맛나게 먹기 시작했다.
흰색 실을 가지고 있는 고양이를 보니 어쩐지 동생 생각이 난다.
조금 고민하던 나는 육포에 정신 팔린 고양이를 뒤로 한 채 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생은 서울 성심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다.
병명은 루게릭 병.
정확한 이름은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라 하여 서서히 근육이 굳어, 끝엔 심장 운동이 정지돼 죽는 병이다.
동생에게 이 병이 시작된 건 지금부터 4년 전인 열세 살 때였다.
처음엔 그저 몸이 뻐근하다고 해서 병원을 찾아갔는데 성장 과정 중에 가끔 그런 일이 있다는 진단 결과를 받고 되돌아왔다가, 약 3개월 후, 괜히 넘어지거나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트리는 등 조금씩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딱 반년 째 되는 날, 발이 움직여지지 않게 되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지금은 온몸의 근육은 물론이고 혀 근육까지 움직이지 않아 말도 못한다.
말 그대로 식물인간처럼 간신히 눈만 껌뻑거리는 게 전부.
“성일이 왔니?”
중환자실에 들어가니 눈 밑이 거뭇거뭇한 어머니가 피곤한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이제 오후 조금 늦은 시간인데 여기 있는 것 보면 일이 끝나고 곧장 이곳에 와, 동생 병간호를 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밤에 유흥업소 접객으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뛰어든 일이라 지금은 인지도가 높아 편하다고 말씀하시는데…….
분명 어머니가 말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당장 그 일 그만둬!’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만큼 형편이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피곤한 것 같은데 들어가 자요.”
“으응, 그럼 한숨 자고 올 테니까 부탁할게.”
어머니는 휘청휘청 병실을 나갔다.
그렇게 어머니가 나가자 병실 안은 심전도기 소리만 가득 찼다.
동생은 자고 있는 건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슴 근처에는 유동식을 흘려 넣기 위한 관이 위와 연결되어 있고, 입엔 호흡기가 연결되어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도와주고 있었다.
나는 항상 이 모습을 볼 때마다 동생이 촛불처럼 이대로 훅 꺼져서 사라지는 게 아닐까 불안해지곤 한다.
그래서 불안을 감추듯 가장 먼저 하는 건 동생의 손을 꼭 잡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동생은 나를 인식하고 눈을 뜬다.
보일 듯 말듯 휘어지는 눈썹.
얼굴의 근육도 움직이지 못해 무표정이지만, 나는 동생이 미소 지어 준다는 걸 알 수 있다.
“나 왔어.”
반응은 없다.
반년 전만 해도 고개를 끄덕여 화답해 줬는데 이젠 그것조차 힘든 것 같았다.
잘 씻지 못해 머리도 마구 흐트러져 방치되어 있었고, 근육은 전부 수축돼서 얼굴도, 몸도 깡마른 상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예뻤다.
하늘에서 막 떨어진 눈꽃처럼……. 내가 만지면 사르륵 녹아 사라져 버릴 것처럼 불안하고도 아름다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제길, 이젠 동생 앞에서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아직 한창 자랄 나이고 꽃피울 나이.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어째서 신은 동생에게 무자비한 운명을 내린 걸까.
병원에서도 어린 나이에 루게릭 병이 생기는 건 매우 희귀한 경우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나 희귀한 병이 왜 하필 동생에게……!
우는 걸 본 동생이 천천히 눈동자를 좌우로 돌렸다.
싫어, 또는 그러지 말라는 약속된 언어다.
“응, 미안. 나도 참 청승맞지. 아, 요즘 부쩍 더워졌어. 사람들도 다들 반팔 입고 다니기 시작했고. 여기도 상당히 덥지? 그래! 병이 다 나으면 우리 물놀이 가자. 꼭 한 번 가 보자고 했잖아. 오빠도 알바해서 이제 갈 수 있어. 그러니까 예쁜 수영복도 사고, 물장구도…… 크윽, 치고, 으흑!”
오열이 멈추지 않는다.
꼭 잡고 있는 동생의 손은 돌처럼 딱딱하다.
석고상을 만지는 것처럼 완전히 굳어 버린 손을 꽉 부여잡고 나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크윽, 나을 수 있어. 절대로 나을 거야. 그러니까…… 봄에는 꽃구경도 가고, 겨울엔 눈싸움도 하면서…… 움직일 수 있게 되면 같이, 우리 둘이…… 으흐윽!”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 전부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다.
병이 낫는 건 절대로 무리라고, 동생은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나는 인지하고 있다.
딱딱해진 동생의 손가락엔 흰 실이 묶여 있었으니까.
반년 전만 해도 레몬빛이었다.
그게 최근 일주일 사이 흰색으로 바뀌었다.
그걸 보고 얼마나 목 놓아 울었던가.
얼마나 운명을 저주했던가.
얼마나 무능력한 내 자신을 탓했던가.
이제 동생에게 남은 시간은 한 달? 일주일? 아니,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심장은 지금도 시한폭탄처럼 정지할 시간을 그리며 뛰고 있다.
그걸 하루하루 지켜보는 내 심장은 무너져 내린다.
무섭고, 두려워,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제발 가지 말라고 빌며 동생의 손을 잡게 된다.
제발…… 제발 신이시여, 동생을 데려가지 말라고, 차라리 나를 데려가 달라고 필사적으로 빌게 된다.
결국, 참지 못해 병실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병원 밖까지 달리면서 미친 듯이 오열했다.
눈물 콧물이 뒤범벅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게서 도망쳤다.
“야오오옹―!”
얼마나 뛰었을까.
도로 한가운데서 엄마를 찾듯 울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저 고양이는 아까 내가 육포를 준 그 고양이.
설마 나를 뒤쫓아 왔던 건가?
순간 뇌리에 스치는 깨달음.
그랬구나, 고양이의 운명의 실이 어째서 흰색이었는지 알겠어.
나 때문이야.
전부 내가 먹이를 준 덕분에 고양이는 여기서 죽게 되는 운명이 만들어진 거였어.
나를 뒤쫓아 오다 도로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차에 치여 죽게 되는 것.
거부할 수도, 용납도 안 되는 빌어먹을 운명의 스토리.
어째서 동생은 행복 하나 누리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
어째서 아직 새끼에 불과한 고양이가 엄마도 찾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
왜 재능 없는 자는 노력해도 쓸모없고, 천재는 노력 없이도 앞지르는가!!
어째서 신은 이리도 불공평한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차도로 뛰어들었다.
신이 이리도 불공평하다면, 운명이 이리도 불공평하다면!
나는 그 운명을 거부하겠다.
동생이 살 수 있도록, 고양이가 죽지 않도록 내가, 내가!
운명을 바꾸겠다.
쾅!
고양이를 껴안은 순간 묵직한 힘이 내 등을 덮쳤다.
우두둑 뼈가 부서지고 세상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저 멀리 날아가 시멘트 바닥에 몇 바퀴 구른 나는 웅덩이지기 시작한 내 피를 멍하니 바라보다 가슴팍에 안은 고양이를 가까스로 내려다보았다.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혀를 길게 빼문 채 죽어 있는 고양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재앙 같은 운명.
내 손가락에 감겨 있는 붉은 실이 급속도로 흰색으로 변해 간다.
그 모습이 잔인하게도 영화 속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만 보인다.
하하, 웃음이 나왔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 운명은 손가락에 묶인 실처럼 질기디 질겨서 절대로 끊을 수 없다.
고작 실 따위에 불과한데도, 고작 운명 따위에 불과한데도…….
서서히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뒤엉킨 두 가닥의 흰 실을 쥐어 잡았다.
그것을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