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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3화)
2. 운명을 거역하다 (1)
꿈을 꾸었다.
꿈속에 나는 어느 대마법사 귀족 가문의 자제이며 매우 부유하게 생활했다.
가문의 가주인 아버지는 황궁 수석마법사이며 내 위로 형님과 누님, 그리고 동생까지 세상에 이름을 떨치며 가문 명예를 이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나만 그 이름 높은 가문을 먹칠하는 존재였다.
나는 마법에 전혀 재능이 없었다.
무려 15년이나 노력했음에도 내 심장에 둘러져 있는 고리는 고작 셋.
그 클래스는 막 마법에 입문해 겨우 입문 마법사란 칭호를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클래스.
평민 마법사도 5년 안에 들 수 있는 클래스를 그 이름 높은 가문에서 태어난 내가 15년이나 걸려 이룩해 낸 것이다.
그렇다고 검에 소질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도 어중간하며, 지극히 평범하다.
그래, 나는 대마법사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유일하게 가문의 오점이었다.
어디를 가든 가문의 꼬리표가 뒤따라왔으며, 귀족가의 자제들은 나만 보면 뒤에서 가문의 오점, 사생아라는 말을 소곤거렸다.
아버지도 그런 내가 부끄러워 3년 동안 저택에 가둬 놨었고, 형님, 누님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점점 막다른 길로 내몰리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가족마저 적처럼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전부 내 욕을 하는 것 같았으며, 그 스트레스에 악몽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집을 나왔다.
이런 몸을 준 신과 운명을 저주하며 기필코 운명을 바꿔 보리라 굳게 결심한 채.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마나증폭이란 비원의 술이 존재한다.
심장에 고리된 마나를 억지로 휘돌려 서클끼리 공명시킨 다음, 그걸 한순간에 폭발시켜 마나를 증폭시키는 술.
성공한다면 비록 서클은 잃어버리지만 몸 구석구석, 마나가 침투해 소드마스터처럼 마나로 이루어진 육체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내가 바라던 강함, 재능, 그리고 운명 역행.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말 그대로 몸이 부풀어 터지고 만다.
만에 하나 몸이 버텨 낸다 할지라도 정신이 견디지 못해 백치가 되든가, 뇌 자체가 걸쭉한 수프처럼 변해 죽게 된다.
즉, 육체와 정신을 전부 버텨 내야지만이 비로소 최소한의 재능이 열린다는 말이다.
그래도 나는 이 비술을 쓰는 데 가장 최적의 조건을 타고났다.
그것은 바로 재능이 없어 내 마나 서클이 3서클에 머물러 있다는 것.
어중간하게 4, 5서클이었다면 그만큼 마나증폭이 더 광대해 분명 몸이 버텨 낼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3서클이라면 모험을 걸 가치가 있었다.
그래도 무모하고 절망적이란 것에는 변함없지만.
확률?
그런 건 없다.
100년 전, 고대 마법사가 남긴 석판에서 발췌한 후로 지금까지 성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물론 석판의 해석이 완벽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나 퇴적해 사라져 버린 석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려 한다.
이제 내게 남겨진 길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게 실패해서 죽는다면 좋겠지만, 백치가 된다면…… 정말 끔찍하다.
망가진 내 모습을 아버지나 형님, 누님이 볼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구토가 올라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포기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준비는 마쳤다.
이제 실행만 남았을 뿐.
나는 마치 자살하기 전, 추억을 회상하는 사람처럼 지그시 눈을 감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주신이시여, 당신이 운명을 만들고 삶과 죽음을 예정해 놓았다면 어째서 자력으로 바꿀 수 없게 만들었나이까.
어째서 당신은 이리도 잔혹하십니까.
……그 남자의 꿈은 어쩐지 나와 너무도 비슷했다.
재능 없는 자신을 저주하고 바꿀 수 없는 운명을 증오하는 모습, 그 자체가.
좌절하고 포기할 법도 한데 마지막 끝까지 운명을 거역하려 했던 몸부림, 그 자체가.
움찔,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온몸이 쑤시듯 아팠지만 흐릿하던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나는…… 산 건가?
힘겹게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척이나 무거워 부들부들 떨린다.
병원일까 싶어 억지로 눈을 떠 보았지만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온통 흐릿해 어딘지 좀 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시야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이용해 상황을 점검했다.
뺨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등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돌의 감촉까지.
우선 이곳은 실내도 아니며 심지어 침대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아직 시멘트 바닥인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도 조용하다.
자동차 엔진 소리도,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소리도 없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충격적인 진실을 하나 알아냈다.
몸이 아프지 않다는 것을.
분명 온몸의 뼈가 부러졌었다.
발도 기형적으로 꺾였고 척추도 박살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 몸이 조금 뻐근하다는 것뿐 어떤 곳도 아프지 않았다.
그런 게 가능한가?
즉사해도 모자를 상처라 살아 있기만 해도 기적인데 몸이 아프지 않아?
심지어 활력이 돌아오니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끙.”
실재로 몸을 일으키니 조금 힘겨웠지만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자세로 앉아 있다 황급히 눈을 비볐다.
그렇게 몇 번 부비고 깜빡이는 등 노력하자 드디어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야.”
가장 먼저 눈앞에 보인 건 돌이었다.
천장도 돌, 앞도 돌, 그리고 뒤까지.
어두웠지만 어딘가 빛이 들어오는지 못 볼 정도는 아니다.
여기 설마 동굴인가?
혼란스러웠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예상조차 하기 힘든 곳에 홀로 누워 있으니 사고가 정지된 느낌이다.
“…….”
이를 악 다물고 벽에 손을 더듬어 가며 저 멀리 빛이 들어오는 출구로 이동했다.
적어도 이 동굴을 나서면 모든 의문이 풀릴 거라 믿으며.
긴 터널 속을 빠져나오는 기분.
그 적막한 정적이 길어질수록 영원히 이곳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공포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그래도 다행이랄까?
아직 몸이 뻐근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몸은 괜찮은 것 같았다.
출구로 나오자 쏟아지는 빛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곧 빛에 적응한 나는 동굴 밖을 확인했다.
“……세상에.”
동굴 밖 드넓게 펼쳐진 숲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았다.
좌우, 어딜 봐도 숲이다.
끝도 모를 광활한 숲.
마치 숲의 바다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대 산림이었다.
“하, 하하.”
기가 차서 헛웃음만 나왔다.
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어째서 나는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설악산…… 같은 곳일까?”
내게 물어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엇 하나 예측할 만한 단서를 찾기 힘들다.
분명 나는 차에 치여서 기절했는데 어째서 병원이 아니라 이런 곳에 있는 걸까, 그것도 나 홀로.
설마 꿈? 아니면 이곳이 천당이라는 곳일까? 볼을 꼬집어 보니 아프다.
가슴을 만져 보니 힘차게 심장이 뛰는 걸로 보아 살아 있다는 것도 자각할 수 있다.
“그럼 누군가 나를 이곳으로 옮겼다?”
어째서? 왜?
영화처럼 무슨 실험을 위해 사회에선 나를 죽었다고 위장시키고 연구 데이터로서 나를 활용하려는 건 아닐까?
문득 새끼손가락에 묶여 있는 내 운명의 실을 보았다.
피처럼 붉은 실.
죽기 직전의 흰색이 아니라 본래 붉은 실로 돌아와 있었다.
“운명이…… 바뀌었어?”
붉은 실이 흰색이 되는 건 있어도, 흰 실이 붉은색이 되는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봤다.
즉,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한 정해진 운명이 바뀌었다는 것.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하나부터 끝까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아니면 그때 본 흰 실은 잘못 본 것?
그럴 리가 없다.
분명 고양이의 흰 실과 내 흰 실이 뒤엉켰고 나는 그걸 잡았……!
“잡았어?”
만질 수 없는 운명의 실을 나는 잡았다?
손을 휘저어 운명의 붉은 실을 잡아 보려 했지만 역시나 손을 투과할 뿐 결코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망상인가? 정신이 없어 잡았다고 착각한 건가?
고개를 흔들어 망상을 접었다.
여기서 그런 생각을 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보다도 일단은 내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동굴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대략 20미터 높이의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일직선으로 내려가는 건 무리.
옆을 보니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길이 나 있다.
아마 나를 옮긴 누군가가 저곳을 통해 동굴로 들어왔을 거라 짐작해 본다.
그럼 가팔라 보이지만, 저 길을 통해 일단 이곳을 벗어나 볼까?
잠시 긴장한 눈으로 한동안 길을 바라보다 포기하고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이런 알 수 없는 곳에 홀로 남아 목숨을 걸고 절벽을 타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이 동굴을 벗어나면 길이 보이나? 그냥 차라리 누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일어나자마자 이런 상황에 봉착한 내 운명에 화가 났다.
지금 당장도 동생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열심히 숨을 쉬고 있는데, 나는 어째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걸까.
언론에선 나를 죽었다고 발표할까? 아님, 실종되었다고 발표할까?
어머니도 분명 걱정하고 있겠지. 관장님도, 많이 도와주시던 이웃집 아주머니도.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인생이 절망스럽고 원망스럽다.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다.
정말 신은 나와 가족을 전부 버리려는 게 아닐까?
그렇게 한 시간쯤 신을 원망하고 있으니 배에서 꼬르륵 거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은 희망을 갖고 누가 오길 기다렸지만 역시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서 굶어 죽을 바에야…….”
왼손으로 오른손 팔목을 감싸 쥔 채 가슴으로 가져갔다.
후하, 후하. 결정하자, 결의를 다지자! 이제 공은 울렸다.
마음을 다잡고 일어났다.
세상이 원망스럽지만 일단 살고 봐야 한다.
절대로 살아서 걱정하고 있을 어머니도 안심시켜 드리고 동생의 얼굴도 다시 보고 말리라.
최대한 벽에 붙어 조심히 옆으로 발을 내딛었다.
다행히 바람은 크게 불지 않았지만, 떨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에 절로 발이 떨려 왔다.
“후욱, 후욱.”
뛰는 심장을 달래며 천천히, 그리고 조심히 벽에 딱 붙어 게걸음으로 이동했다.
그냥 걸어가도 될 만큼 폭은 있었지만 아래를 보는 게 너무 무서워 나도 모르게 그런 자세가 됐다.
“후아, 죽는 줄 알았네.”
거리는 솔직히 얼마 안 됐지만, 워낙 천천히 이동한 터라 한 시간이나 걸려 드디어 아래에 당도할 수 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칼로리도 많이 소모했는지 공복감에 머리까지 어지럽다.
“아, 그러고 보니 육포가 조금 남아 있었…… 어, 어라?”
검은 고양이에게 조금 주고 남은 육포가 생각나 바지 주머니를 찾다가 지금 내 옷차림이 이상하다는 걸 비로소 눈치챘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항상 입고 있는 신축성 청바지에 부드러운 천 옷이 아니었다.
윗옷은 꺼끌꺼끌한 모직으로 된 옷이었고, 바지는 가죽이다.
이음새도 실이나 단추가 아닌, 가죽으로 된 줄이 교차해 엮어져 있다.
이런 옷 어렴풋이 어디선가 본 느낌이 든다.
그래, 이건 중세 시대 판타지 영화에서나 보았던 그런 옷이다.
어째서 내가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건지 생각해 봤지만, 역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뭔가 진실과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우선은 옷에 대한 생각을 접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벽 아래로 내려오니 사방이 다 똑같아 보이는 숲이다.
무작정 숲으로 들어가 볼까? 아니, 그건 좋지 못하다.
그러다 길을 잃으면 꼼짝도 못하고 죽을 테니까.
그럼 일단 절벽을 따라 걸어가 볼…….
“꺄아아아아악!”
그때, 저 멀리서 소녀의 비명 소리가 메아리쳐 들렸다.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 같지만 나는 반가움이 앞섰다.
사람이다, 이 근처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비명이 들린 곳은 오른쪽 절벽 쪽.
일단 나는 무작정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저 높은 절벽 위에 한쪽 팔만으로 매달려 있는 작은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건가? 지금 당장이라도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처럼 불안한 상태였다.
“기, 기다려! 지금 구해…… 제기랄!”
황급히 외쳤지만 늦고 말았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온 힘을 다해 달려 보지만 아무리 빨라도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리였다.
머릿속에서 소녀가 지면에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 뇌수가 쏟아지는 등 잔혹한 상황이 무수히 그러졌다.
아무리 달려 봐야 처참한 상황만 눈으로 보는 게 아닐까?
그럴 바엔 그냥 뒤돌아 모른 척하고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 저 소녀가 죽는 게 운명일 수도 있지 않……!
“으아아아아아아!”
더 힘차게 발을 박찼다.
순간, 정해진 운명일 거라 타협하는 내 자신에게 놀랍고 화가 났다.
그렇게나 증오했는데, 그렇게나 운명이 바뀌길 기도했는데, 어째서 내가 불리해지니 그런 것에 기대려는 거냐.
왜 그런 것에 타협해 도피하려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