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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4화)
2. 운명을 거역하다 (2)


달렸다.
눈앞에서 구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소녀에게 깔려 죽는다 할지라도 달리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신이 불합리한 운명을 만들었다면 나는 그 운명을 거부하고 바꿔 나가리라 다짐했으니까.
그때였다.
온몸에 활력이 돋는가 싶더니 마치 깃털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다리가 폭발할 듯 지면을 터트리며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무서울 정도의 속도.
마치 로켓처럼 내 몸이 날아가는 기분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잘하면…… 잘하면, 소녀를 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필사적으로 바닥을 박찼다.
얼마나 속도가 빠른지 주위 배경이 번진 그림처럼, 흐릿하게 뒤로 훅 밀려나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은 더 느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떨어지는 소녀의 몸이 슬로우 비디오를 재생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래, 이대로만 가면, 조금만, 조금만 더!
소녀가 땅에 곤두박질치기 직전, 나는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도약했다.
순간, 내 몸이 화살처럼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믿을 수 없는 속도.
진짜 이게 내 몸일까 싶을 정도로 빨라 일순간 공포를 느꼈지만 억지로 소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 불안을 지웠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팔을 뻗어 소녀를 낚아채 그대로 가슴팍에 안았다.
쿠당탕탕!
힘차게 앞으로 몸을 내던진 만큼 바닥을 구르는 힘도 컸다.
보통 이정도 라면 갈비뼈 서너 개는 나가도 충분할 정도였는데, 이상하게도 내 몸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냥 길을 가다 넘어진 것 같은 정도로 등이 쓰라릴 뿐이었다.
“헉, 헉, 헉.”
한동안 소녀를 꽉 껴안은 채 숨을 골랐다.
조마조마했던 터라 심장이 미칠 듯이 뛴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해냈다.
조금만 늦었어도 바닥에 곤두박질쳐 뼈가 부서지고 피로 범벅된 소녀를 봐야 했을 것이다.
간신히 진정한 나는 슬며시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괜찮아?”
소녀는 패닉 상태인지, 새파래진 입술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초조했을 뿐이지만 소녀 자신은 생사의 고비를 맛보았을 테니까.
하지만 어쨌거나 소녀는 조금 긁힌 상처만 있을 뿐 크게 다친 흔적은 없어 보였다.
“정말 다행이…… 어?”
쫑긋쫑긋.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녀를 바라보는데, 내 눈에 보이지 말아야 할 게 보였다.
설마 잘못 본 건가 하고 눈을 비벼 보았지만 역시 머리카락 따위가 아니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히 그걸 만져 보았다.
“꺄앙!”
부드럽고 말캉거리는 느낌.
모조 같은 게 아니다.
지, 지, 진짜?!
“히갹, 거긴, 꺄윽! 아, 안 돼…….”
마치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새하얗게 탈색돼 있던 소녀의 얼굴이 이젠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순간 아차 싶어 황급히 손을 떼었다.
“아, 미안. 하지만 그, 그 고양이 귀…… 진짜야?”
그날 처음으로 난 얼굴이 할퀴어지는 경험을 맛봤다.

“죄, 죄송해요. 하지만 그, 그, 귀는 예민한 곳이라고요!”
내 얼굴에 약을 발라 주던 소녀는 미안하긴 하지만, 억울한 마음도 있는지 울먹이면서도 볼을 부풀렸다.
이 소녀의 이름은 마오.
검은 머리에 검은 귀, 그리고 검은 꼬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을 묘족이라고 했다.
처음 절벽에서 자기소개 할 땐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다시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아니란다.
그런 말을 듣고 ‘아, 네. 그렇습니까?’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 그녀가 나를 자신의 마을로 초대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반인반수의 사람들을 보고서야 비로소 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종의 무엇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묘족이라니…….”
솔직히 말해 아직도 혼란스럽다.
이게 꿈이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단체로 나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마오의 귀도, 꼬리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인정할 때마다 내 안에 있는 정체성이 무너지는 기분을 맛보고 있다.
“하아, 도무지 뭐가 뭔지…….”
한숨을 내쉬며 나뭇가지로 고정시켜 열어 둔 창문 틈을 바라보니 몇몇 묘족들이 밭을 갈거나 저들끼리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묘족이 머무는 곳은 깊은 산지였는데, 고원도 있어 밭농사와 목축업을 겸하고 있었다.
지금 마오가 발라 주는 약초도 그렇고, 아까 먹은 야채 수프도 그렇고, 그런 것만 보면 이들은 사람의 문화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단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문명적으로 엄청 퇴보되어 있다는 것.
내가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이들이 입고 있는 옷까지, 현대적인 양식을 전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그것뿐인가?
밭을 가는 농기구도, 집도, 문화까지 전부 현대와는 동떨어져 있다.
마치 중세 시대 평민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여, 소년. 이젠 좀 괜찮나?”
“아빠!”
입구에 장막을 걷고 들어온 한 묘족.
마오와 같이 검은 귀에 검은 꼬리를 가지고 있는 커다란 묘족이었는데, 이분은 마오의 아버지인 마챈챈이라는 묘족이다.
마챈챈 씨는 처음 나를 볼 때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것처럼 험악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뒤늦게 마오가 상황을 설명해 줘서 다행이었지, 만약 마오가 없었다면 그대로 물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 네. 먹을 것도 주시고…… 감사합니다.”
“됐어, 됐어. 인간은 싫지만 너는 내 딸의 생명의 은인이니까. 묘족은 결코 은혜를 잊지 않지! 그러니 언제까지든 머물러도 좋아.”
그는 털털하게 웃으며 내 등을 팡팡 내려쳤다.
“아, 제가 말했던 건 조사해 보셨나요?”
“응? 아아, 자네 말대로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는 왔는데…… 이곳은 홍수도, 산사태도 일어나지 않는 지형이야. 걱정해 주는 건 좋지만 역시 괜한 생각이네.”
“그래도 뭔가 있을 거예요! 혹시 우물에 독이 퍼져 있다든가, 아! 역병이 도는 걸지도 몰라요!”
“자네 대체 무슨 걱정을 그리하나. 꼭 우리들이 다 죽을 것처럼 말하는구먼.”
당연히 내가 걱정할 수밖에.
마챈챈 씨를 포함한 이곳 묘족 대부분 운명의 실이 흰색이었으니까.
분명 조만간 이 마을에 큰 변고가 일어날 텐데 나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답답했다.
“그나저나 아깐 미안했네. 나는 자네가 영락없이 자간에서 온 병사들인 줄 알았거든.”
“자간…… 이요?”
“자간 말이네, 설마 자간도 모르나? 이거 참, 최근 영토를 넓혀 가고 있는 왕국 아닌가. 이번 전쟁으로 아래 평지까지 장악했는데, 덕분에 우리한테 세금을 거둬 가려 하질 않나, 하여튼 인간들이란……. 그나저나 자간도 모르다니 대체 자넨 어디에서 온 건가?”
왕국? 자간?
뭔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일단 참았다.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시면…… 그, 서울이라고 해야 할까요?”
“서울?”
“서울이요?”
역시나 둘 다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역시 이곳은 내가 잘 모르는 외국인 걸까?
“혹시 한국 아세요? 아시아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한국? 그런 지명은 생전 처음 듣는데…… 가르벤 대륙 사람이 아닌가? 혹시 북 해변을 건너온 이민족인가?”
“가르벤 대륙이요? 이민족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죠?”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멀리서 넘어왔다면 대화 자체가 안 될 텐데.”
“대화…… 라뇨?”
“응? 아니, 그렇잖은가. 지금 자네가 쓰고 있는 말. 가르벤 대륙 공용어잖은가.”
“그게 지금 무슨……!”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충격이 엄습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말, 저들이 사용하는 말투, 전부 한국어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심지어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있다.
어째서? 어떻게?
“성일 님?”
“이보게, 괜찮은가?”
이곳에 온 직후부터 내 몸에 위화감이 있었다.
옷이 바뀐 것, 마오를 구할 때 보여 준 말도 안 되는 속도,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다른 나라의 언어까지. 그 모든 게 맞물려 믿기지 않지만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설마, 설마, 설마!
“이, 이보게!”
“성일 님!”
의자에서 일어나 도망가듯 집 밖으로 나갔다.
분명 여기 오는 도중에 호수가 있는 걸 보았다. 거기라면……!
나는 호숫가에 당도하자마자 무너지듯 주저앉아 수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떠오르는 내 얼굴.
더벅머리에 토끼처럼 생긴 순진한 얼굴.
분명 내 얼굴이 맞다.
머리카락 색이 옅은 갈색을 띈다는 것과 눈동자가 파랗다는 것을 제외하곤.
그렇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 살고 있는 이성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동안 패닉 상태가 되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기절한 사이에 누가 내 몸에 장난을 친 건가?
온갖 약품을 사용해서 눈동자와 머리색을 바꿨다거나.
아니면 영화처럼 영혼이 교체된 게 아닐까?
알 수 없다. 이 세상도, 내 몸도, 어느 것 하나도.
“우웁! 우우웁!”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없어 구토가 올라왔다.
내가 가슴을 쥐어짜며 헛구역질하자 뒤늦게 따라온 마챈챈 씨가 당황해 내 등을 두드려 줬다.
“자네, 갑자기 왜 그러나? 어디 아픈가?”
“우웁, 헉, 헉. 저기요. 여기가…… 정확히 어디죠?”
“응? 아니, 그야 여긴 가르벤 대륙 최남쪽 바스칼 산맥이다만.”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이…… 몇 년도죠?”
“자네, 지금 무슨 말을…… 아, 알았네. 지금은 륀력 603년도네.”
사형 선고받는 죄인처럼 고개 숙인 채 듣고 있던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여긴 한국도, 외국도 아닌, 다른 세상이었던 것이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내 몸은 어찌 된 건가.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방치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대체 뭘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선택한 건 마오의 집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몸을 부둥켜안는 것이었다.
어느 영화나 만화에서 주인공이 이계로 떨어지면 그 생활에 적응해 크게 활약하는 모습을 그리곤 한다.
도전 정신과 모험, 호기심 가득한 주인공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영화처럼 이계에 떨어졌다는 걸 인지한 후,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두렵다’였다.
그래, 두렵다.
평생 여기 혼자 떨어져 지내는 건 아닐까? 동생도, 어머니도 볼 수 없는 게 아닐까?
전혀 알지도 못하는 세상 속에서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죽어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망상에 젖어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그때, 내 몸을 덮은 작은 그림자.
놀라서 올려다보니 마오가 나를 꼭 껴안은 채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불안아, 걱정아. 멀리멀리 날아가라.”
“…….”
마오는 마치 어린 아기 달래듯 이젠 등까지 토닥여 주었다.
그러다 자신도 무안했는지 쑥스러운 얼굴로…….
“헤헷, 저희 할머님이 그러셨는데요. 이렇게 안아 주면 마음의 병이 전부 달아난대요.”
라고 말하며 혀를 빼쪽 내밀었다.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덜덜 떨리던 몸이 점차 차분해지기 시작한 건 사실이었다.
어쩐지…… 마오의 체온이 따스하다.
“진정되셨어요?”
“……응, 고마워.”
“뭘요, 생명의 은인인데!”
내가 진정된 듯 보이자 마오는 펄쩍뛰며 활기차게 말했다.
그래, 지금 불안에 떨고만 있을 수는 없다.
지금도 동생은 사라진 나를 걱정하며 애타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