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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5화)
2. 운명을 거역하다 (3)
생각해 보자.
나는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계기는 아무리 봐도 그 사고밖에 없다.
검은 고양이를 구출하려다 도리어 나까지 휘말려 죽고 말았고, 덕분에 나는 여기에 오게 된 거다.
어째서?
문득 내 손가락에 걸려 있는 붉은 실을 바라보았다.
내가 있는 세상에선 아무리 노력해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실.
마지막 내가 죽기 전, 검은 고양이와 운명의 실이 엉켰고 나는 그걸…….
잡았다?
뭔가 홀린 것처럼 나는 내 손가락에 있는 붉은 실과 마오의 붉은 실을 엉키게 만들어 보았다.
손으로 잡을 순 없지만, 실끼리는 간섭이 가능한지 너무도 쉽게 엉켜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걸 잡…….
“마오! 마오오오!”
엉킨 실을 잡으려 손을 뻗는 그때, 마챈챈 씨가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당황한 나와 마오는 동시에 마챈챈 씨를 돌아보았다.
“아빠?”
“마챈챈 씨?”
“수, 숨거라! 어서!”
내가 걱정했던 마을의 변고가 지금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을에 일어난 변고.
그건 역병도, 산사태도 아니었다. 바로, 인간에 의한 약탈.
이 도적과도 같은 행위를 일삼는 자들은 바로 자간 왕국 병사들이었다.
아까 마챈챈 씨에게 듣기로 그들은 최근 전쟁으로 바스칼 산맥까지 장악했다는데, 지속적으로 세금을 거둬 가려 했다는 것 보면, 이번엔 대대적으로 병사를 파견한 것 같았다.
제길!
마챈챈 씨가 자간에 대해 설명해 줄 때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그때 눈치챘더라면 모두 미리 도피할 수 있었을 텐데!
“더러운 인간 놈들! 네놈들에게 결코 지지 않…… 컥!”
“짐승 주제에 말만 많구나. 뭐해, 노예가 될 만한 것들을 제외하곤 다 죽여 버려!”
“우리의 긍지를 무너트릴 순 없…… 으아악!”
“엄마! 엄마!”
“어서 피하거라!”
“흐하하하하! 다 죽어라!”
여기저기 튀기는 선혈, 곳곳에선 비명 소리와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왔고, 코끝으로 비릿한 혈향이 날 정신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떠는 와중에도 창문 밖에선 쉴 새 없이 생명이 꺼져 가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자르고, 몸을 가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지옥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구토가 치민다.
이빨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무섭다.
숨이 가빠져 오고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이 뛰어서 아프다.
그래, 전부 꿈일 거야.
태연히 사람이 죽고 죽이는 게 꿈이 아닐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악몽아, 제발 깨 줘!
“여기도 묘족이 있다!”
“죽여…… 크헉!”
“어림없다! 이놈들! 여길 들어가고 싶으면 나, 마챈챈부터 밟고 가야 할 게야! 크아아아아!”
“우, 우왁! 이놈 뭐야!”
“이놈 강하다! 지원을 요청해!”
마오와 내가 숨어 있는 집 근처에도 병사가 들이닥쳤는데, 마챈챈 씨가 문밖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것 같았다.
“아, 아빠가 밖에 있어요! 성일 님, 아빠가!”
마오도 눈치챘는지 내 옷자락을 꽉 붙잡으며 다급히 말했다.
그로부터 문밖에서 끊임없이 마챈챈 씨의 괴성이 들려왔다.
그의 분투에 작은 희망을 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오히려 더 불안에 떨었다.
그 분투가 끝나는 순간이 우리가 죽는 순간이란 걸 알기에.
“으아악!”
“이, 이 녀석 강해.”
“괴, 괴물이냐? 지치지도 않는 거야?”
“너희들! 대체 지금 뭐하고 있느냐!”
“추, 충! 다름이 아니라 저 묘족이 의외로 강해 애먹고 있었습니다!”
“이 바보 같은 것들! 이런 우매한 이종족을 상대로! 쯧쯧, 하여간 훈련이 더 필요하다니까.”
마오와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밖의 상황을 엿들었다.
아무래도 문밖에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대장격 인물이 온 것 같았다.
“네 녀석이냐? 내 병사들을 죽인 게?”
“헉, 헉. 다가오지 마라. 찢어 죽여 버릴 테다!”
“이것 봐라? 보아하니 벌서 지친 것 같은데, 눈빛만큼은 아직 살아 있구나. 오호라, 묘족은 강한 자가 수장이 된다고 하던데. 네 녀석이 수장인가?”
“그래, 내가 떡잎나무 묘족의 수장, 마챈챈이다!”
“그래, 그래. 거 참 시끄러운 놈이구만. 알았으니…… 이제 죽어라.”
“크아아아악!”
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가.
마챈챈 씨의 비명이 크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나와 마오의 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아, 아빠아아아!”
당황한 마오가 밖으로 뛰쳐나가려 해 나는 필사적으로 마오의 허리를 붙잡았다.
이 애의 심정은 알지만 여기서 나가면……!
“가지 마! 나가면 죽어!”
“하지만, 하지만! 아빠를 내버려 둘 수 없어요!”
“마, 마오!”
마오는 내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입구는 장막 하나로 덮여져 있는지라 잠깐 환해졌다 다시 어두워졌는데, 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볼 수 있었다.
오른팔이 잘려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마챈챈 씨를.
잘린 팔에서 피가 상당해 나오고 있었다.
바닥에도 피가 흥건했다.
그걸 보니 공포심에 마오를 뒤쫓아 나가야겠다는 마음까지 사그라졌다.
땅에 붙은 것처럼 내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아니, 서 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후들거렸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여기서 나가면 시체가 된 묘족들처럼, 팔이 잘린 마챈챈 씨처럼 나 역시 단칼에 목이 베여서 죽을 거다.
“마오야!”
“다, 다가오지 마! 아빠를 놔줘!”
“이건 또 뭐야. 아아, 그랬군. 자식을 숨겨 두고 있던 건가?”
“위험해! 어서 도망가!”
절규하듯 외치는 마챈챈 씨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가득 찬 내 귀에 틀어박혔다.
빌어먹을.
눈물이 나왔다.
나는 왜 이리 약한 걸까.
나를 다독여 준 마오가, 내 등을 두드려 준 마챈챈 씨가 지금 이리도 위험한데 나는 왜!
왜! 이런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건가!
“움직…… 여. 제발, 제발 좀 움직여!”
다리를 두드렸다.
하지만 떨림은 역시 멎지 않았다.
가슴이 쑤시듯 아프다.
그리고 미칠 듯이 화가 치밀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심성이 약했다.
무서워하는 것도 많았고, 조금만 놀래도 오줌을 지렸다.
또래의 아이들은 그런 나를 보며 토끼 같이 겁만 많은 놈이라며 놀리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복싱을 시작했다.
내가 강해지면 놀림받지도 않을 테고, 동생도, 어머니도 지켜 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프로 선수는 될 수 없었고, 고작 시작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상대에게 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의 근심은 지워지지 않았고, 동생의 병은 심해져만 갔다.
아무리 노력해도 운명은 거역할 수 없었으며, 내 나약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 결국 그동안 내가 해 온 노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었던 거다.
“세상에서 오빠가 가장 강해. 나에게 있어서 오빠는 히어로야!”
“하하, 하하하…….”
왜 이럴 때 동생의 말이 떠오르는 걸까.
나는 결코 강하지 않은데.
히어로 같은 거창한 거 절대로 될 수 없는데.
정말이지…… 왜 하필 이럴 때!
이를 악물고 왼손으로 오른손 팔목을 감싸 쥔 채 가슴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아, 억지로 가슴을 쾅쾅 내려쳤다.
결단해라, 이성일!
결의를 다져!
이미 공은 울렸잖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꽉 막힌 가슴을 토하듯 소리 지르며 일어섰다.
여전히 무릎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 억지로 버텼다.
그래, 그런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 몸도, 마음도 약하다는 것 정도는 복싱을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그 핑계로 주저앉을 셈이냐?
대체 언제까지 그딴 걸로 안주할 건데!
바꾸기로 했잖아, 내가 이 빌어 처먹을 운명을 바꾸리라 다짐했잖아!
“마, 마오를 놔줘! 내가 죽을 테니 제발 마오만큼은!”
“싫어! 아빠 없이 나는, 나는 절대로 싫어!”
“쯧, 그리 죽고 싶다면야 소원을 들어주지! 부녀 둘이 정답게 죽어라!”
“그만둬어어어어어!”
장막을 밀치며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자 시야가 확 트이며 집을 빙 둘러싼 병사들과 그 가운데 마오와 마챈챈 씨를 향해 검을 치켜든 갈색 머리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남자에게 뛰어들었다.
남자도 당황했는지 일순간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으아아아아아아!”
상대가 내 거리에 들어온 순간, 발 디딤과 동시에 허리를 회전시키며 주먹을 일자로 뻗었다.
복싱에서 가장 기본적인 스트레이트.
내가 몇 년 동안이나 연습했던, 이젠 몸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 기습적인 한 방을 남자 얼굴을 향해 날렸다.
하지만 그는 내 공격을 피해 냈다.
“네놈은 또 뭐야!”
오히려 옆으로 피해 낸 그가 치켜든 검을 역으로 내게 휘둘렀다.
섬뜩한 감이 등에 엄습해 고개도 안 돌리고 앞으로 굴렀다.
파각!
검격이 얼마나 강한 건지 내가 서 있던 바닥에 선명하게 검선이 그려져 있었다.
박히지도 않고 지면까지 베어 버린 것이다.
위험하다.
검을 든 상대와 싸우는 것만 해도 불리한데 상대가 너무 강하다.
더군다나 그 한 명만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내, 내 공격을 피했어?”
다행히 연속으로 공격이 오지 않아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상대는 내가 피한 것에 꽤나 놀랐는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최대한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방금도 거의 본능적으로 굴러서 겨우 피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요행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젠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일순간 목이 날아간다!
몸을 옆으로 비스듬하게 하고 주먹을 턱에 붙여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상대는 검을 가지고 있는 자.
저걸 검이라 생각 말고 그만큼 긴 팔을 가진 자라고 생각하자.
그럼 피하지 못할 것도 없어.
“자네…….”
“성일 님…….”
멍하니 나를 보고 있는 마챈챈 씨와 마오가 언뜻 보였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도망가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내게 쏠려 있는 이 시선이 둘에게 갈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전에 내게 그럴 여유도 없었고.
“그건 무슨 자세지? 아까 공격도 그렇고…… 설마 주먹을 쓰려는 건가? 검을 상대로? 하, 하하하하하하!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지금 이 헬터를 무시하는 거냐!”
그자가 내게 돌진했다.
아니, 했다고 느끼는 순간, 내 옆에 서 있었다.
내 예상에서 한참을 벗어난 속도.
이건 인간의 속도가 아니다.
저런 자의 겸걱을 피한다고? 검을 긴 팔이라 생각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고?
피한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나는 이미 글렀던 거다.
“기분 나쁜 애송이, 죽어라.”
귓가에 들린 그자의 말이 마치 사신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천천히 그의 검이 내 등을 양단할 기세로 휘어 들어왔다.
너무도 빨랐지만 그 궤적은 내 눈이 좋은 건지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릿하게 보이긴 했다. 문제는 몸이 전혀 따라오지 못하…… 어라?
푸확!
검이 허공을 스치자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풍이 얼마나 강한지 내 머리칼이 전부 뒤집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난 그런 것보다도 내 몸에 더 놀라고 있었다.
분명 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도 가볍게, 허리를 깊게 숙여 아래로 피하는 더킹을 이용해 피해 냈다.
너무 당황해 허리를 숙인 채로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 황급히 백스텝으로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상대도 나만큼 당황했던 건지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멍하니 서 있다 경악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너, 너, 대체 뭐야!”
“마, 말도 안 돼! 은빛기사단에서도 서열 16위인 헬터 님의 공격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피했어?”
“저, 저자는 누구지?”
경악한건 비단 그자뿐만이 아니었다.
우릴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 역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내게 들릴 정도로 당황해하고 있었다.
최대한 거리를 벌려 안전권에 들어선 나는 손을 들어 주먹을 쥐락펴락해 보았다.
전신에 활력이 돋는 느낌…… 세포 하나하나까지 생각한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감각.
그래, 이건 아까 내가 절벽에서 마오를 구해 줄 때 느꼈던 감각이다.
“잘 모르겠지만…… 이거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조금이지만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이거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잘하면 저 남자 얼굴에 한 방 먹여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