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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6화)
2. 운명을 거역하다 (4)


통통, 가볍게 몸을 날리듯 제자리를 뛰었다.
자신감이 생기니 줄곧 잊고 있던 내 스타일이 기억났다.
나는 다른 선수에 비해 비교적 키가 작고 왜소한 체구라 펀치력이 없기 때문에, 동체 시력을 이용한 빠르게 치고 빠지는 풋워크 중심의 아웃복싱을 구사했다.
그래, 스텝만으로 모든 공격을 피하다 필살의 카운터를 노리는 것이 꿈이었던, 내 이상향의 스타일.
대체 나는 지금껏 왜 이걸 잊고 있었단 말인가.
“기고만장하지 마라!”
조금 전보다도 한 단계 더 빠른 속도로 짓쳐들어와 정확히 내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나는 눈으로 검로를 끝까지 본 후, 제자리에서 미끄러지듯 뒤로 후퇴해 아슬아슬하게 검격을 피했다.
이젠 상대도 당황하지 않는지 아까와는 다르게 이 차, 삼 차, 연속으로 검격을 내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나는 적절히 헤드 슬립과 풋워크를 이용해 찌르기와 베기를 전부 피해 냈다.
어깨 넓이와 비슷한 정도의 보폭을 취한 다음, 뒷발을 차면서 앞발을 미끄러지듯 내미는 발.
거의 동시에 뒷발도 끌어당겨 원래의 보폭으로 되돌리는 게 풋워크의 기본.
이걸 응용해 사이드스텝, 백스텝 등 균형을 유지한 채 자유자재로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연속으로 들어오는 공격도 이렇듯 처음과 같이 피하는 게 가능하다.
“보, 보이지 않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왼쪽이다! 아, 아니, 오른쪽!”
“세, 세상에 저 남자, 헬터 님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고 있어…….”
이 풋워크를 처음 본 병사들은 내가 여유롭게 피하는 걸로 보이는 모양이다.
사실은 피하는 데 급급해 공격할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건데.
“이이이! 여유부리지 말란 말이다아아!”
흥분했는지 크게 사선으로 내지르는 검.
순간, 번뜩하고 눈을 치켜떴다.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 선수로서의 감이 지금이라고 외쳤다.
아까처럼 풋워크를 이용해 뒤로 피하는 게 아닌, 오히려 앞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마치 인파이터처럼 몸이 땅에 닫을 듯 상채를 숙여 파고들듯이.
성둥.
머리칼이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살았다는 걸 자각하기도 전에 숙이고 있던 허리가 먼저 돌아가고 자연스럽게 주먹이 상대의 옆구리, 간장이 위치한 자리에 틀어박혔다.
“컥!”
자연스럽게 앞으로 빠지는 턱. 기계처럼, 또는 본능처럼 내 주먹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상대 턱에 쇼트 어퍼.
휘릭!
너무도 깔끔하게 들어가 맞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정확히 턱 끝만 가격했기에 그런 것이다.
이렇게 소리 나지 않게 턱을 가격하게 되면, 일순간 얼굴이 크게 돌아가 뇌가 충격 받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신이 날아가 버린다.
아무리 정신과 육체를 단련한 자도 이것만큼은 당해 낼 수 없다.
나는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남자 역시 이건 통하리라 생각했다.
쇼트 어퍼를 날리고 2초쯤 지났을까?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 있던 그는 눈을 까뒤집은 채 털썩 무릎 꿇었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졌다.
“…….”
“…….”
“…….”
어쩐지 주위가 몹시 조용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함이 감돌았다.
내가 파이팅 포즈를 풀고 나서야 얼어 있던 정적이 풀어지듯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 헤, 헬터 님이 하, 한 방에…….”
“미, 믿을 수 없어…….”
대부분 어찌할 바를 몰라 주춤거렸고, 몇몇은 들고 있던 검까지 떨어트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병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벌벌 떨었다.
“우, 우리가 이겼다! 적의 우두머리가 쓰러졌다!”
“나머지는 오합지졸이다! 지금이야! 공격해!”
“우와아아아아아아!”
“히, 히이익!”
“사, 살려 줘!”
상황이 반전했다는 걸 알아챈 마챈챈씨가 외치자 어디 숨어 있던 건지 곳곳에서 묘족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병사들은 기겁해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난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세상에, 지금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한 건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거의 무아지경이 되어 싸운 것 같다. 누군가가 다시 이런 대결을 해보라 권한다면 미안하지만 절대로 사양하고 싶다.
“성일 님!”
내가 바닥에 주저앉자 걱정한 마오가 내게 달려왔다.
그렇게 무작정 달려와서는 내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끙끙 앓다 나처럼 주저앉았다.
“그, 저기, 저는, 으흑, 그러니까…….”
울먹이며 자꾸 말을 더듬는 마오.
이 아이의 심정이 어떤지 알 것 같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사과해야 할지 몰라 어쩔 줄 모르는 거겠지.
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울먹이고 있는 마오 머리에 턱하니 손을 올렸다.
“잘됐네. 아빠가 살아서.”
“끅, 끄윽, 흐아아아앙!”
내가 말하기 무섭게 결국 터져 버린 울음보.
마오는 내 가슴팍에 폭 안겨 들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이다. 다 좋게 끝나서.
어쩐지 몹시 졸리다.
다친 건 없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그런 것 같다.
문득 마오 손가락에 있는 붉은 실을 보았다.
아, 맞다. 한 가지 실험을 하려고 했었는데.
나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힘겹게 마오의 운명의 실과 내 운명의 실을 겹치게 했다.
그러자 너무도 쉽게 두 실은 엇갈려 꼬이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걸 멍하니 바라보다 완전히 겹쳐진 실에 무심코 잡는 시늉을 해 보았다.
파직!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인데 순간 세상이 번쩍이더니 숲 전체가 화질 나쁜 TV처럼 다채로운 색을 입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는데 언제부터인지 내게 안겨 있던 마오가 사라져 있었다.
“어, 어라?”
마오뿐만이 아니었다. 마챈챈 씨도, 바닥에 죽어 있는 묘족들도 전부 사라졌다.
노이즈 가득한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것이다.
곧 세상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처음과 같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는데 나는 어지러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고 말았다.
“으으, 이게 무슨 일이…….”
빵빵!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내 바로 앞에서 세차게 울리는 클랙슨 소리.
눈을 떠 보자 내 바로 앞에 검은 중형차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야, 인마! 죽고 싶어? 왜 차도에 뛰어들고 난리야!”
중형차 안에 있는 중년 남성이 옆 유리창에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시뻘게진 얼굴로 욕설을 퍼붓고 있다.
내 덕분에 멈춰 선 다른 차 운전자들도 손가락질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놀란 사람들이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검은 고양이가 내 발치에서 야옹거리며 울고 있었다는 거다.
그래, 나는 다시 현대로 돌아오게 되었다.



3. 현생과 전생 (1)


“돌아…… 왔어?”
세상이 번쩍임과 동시에 현대로 돌아왔다.
아침에 로드워크하기 위해 입었던 간편한 추리닝 복장도 그대로고, 차에 치이기 전 멀쩡한 내 몸 역시 멀쩡했다.
혹시나 싶어 코팅된 중형차 앞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까지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이 눈앞에 서 있는 검은 중형차.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치였던 차라는 걸.
당시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박혀 있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멀쩡하다. 바닥에 피도 없고 심지어 검은 고양이도 살아 있었다.
즉…….
“차에 치이지 않았어?”
“야, 이 새끼야! 정신 나갔어? 내 말 안 들려?”
내가 멍하니 주위를 돌아보고 있자 실성한 사람 취급한 건지 운전자는 가슴까지 탕탕 내려치며 분노했다.
“죄, 죄송합니다!”
여전히 정신은 없었지만, 일단 여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황급히 사과하고 발치에서 울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껴안은 채 도망갔다.
나는 그대로 집까지 뛰었다.
낯선 환경에 당황했는지 고양이는 구석에 숨어 몸을 웅크렸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빨랫감,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옷가지들과 설거지거리 등 집은 내가 나왔던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멀쩡한 나와 고양이뿐이랄까?
“야옹―”
고양이가 가늘게 울어 돌아보았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고양이.
하지만 저 아이는 곧 죽을 것이다. 녀석이 운명의 실은 흰색…… 어, 어라?
“붉은 실?”
고양이 발가락에 묶여 있는 운명의 실.
눈을 치켜뜨고 다시 봐도 분명 붉은색이었다.
황당해 허겁지겁 다가가 고양이의 발가락을 잡았다.
고양이는 내 행동에 깜짝 놀라 바동거렸다.
“말도 안 돼. 운명이 바뀌었어?”
내가 이 고양이에게 한 건 아무것도 없다.
단지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가 다시 돌아온 것뿐인데, 어째서 고양이의 운명이 바뀌어 있는가.
“당최 하나도 모르겠네.”
머리가 지끈거려 대자로 누워 버렸다.
그러자 고양이는 망설이는가 싶더니 내 배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고 웅크렸다.
후우, 이젠 무리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들을 경험해 지칠 대로 지쳤다.
나는 그대로 고양이의 체온을 이불삼아 함께 잠이 들었다.

꿈에서 내가 차에 치이는 꿈을 꾸었다.
허리가 꺾이고 머리에선 피가 주르륵 흘렀으며 내가 안고 있는 고양이는 혀를 길게 빼문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겁해 일어나니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밤새 어머니가 왔다 가셨는지 내 몸엔 모포가 덮여져 있었고, 고양이는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고양이의 운명의 실은 여전히 붉은색이었다.
완전히 뒤바뀐 운명.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운명이 지금 내 눈앞에 바뀌어 있다.
어째서?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벽이 막고 있는 것처럼 답이 보이지 않았다.
후우, 진정하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분명 나는 차에 치여 죽었다. 그 상황에서 고양이와 엮인 운명의 실을 잡았고 신비한 세계로 들어가 마오를 만났다.
그리고 마오의 실을 쥐고 다시 현대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게 차에 치이기 전 상황이라는 건데.
“좋은 아침! 야야, 어제 드라마 봤냐?”
“봤지? 아오, 역시 박혜선은 예쁘다니까?”
“어이, 노닥거릴 시간 없어. 안 뛰면 지각이다!”
“뭐? 헉! 진짜네! 야, 나도 같이…… 응? 이성일, 아침부터 뭐하는데 멍 때리고 있냐? 그러다 지각한다? 야! 같이 가자니까!”
같은 반 친구가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친구들 따라 뛰어갔다.
잠깐, 차에 치이기 전 상황?
아니다.
그 상황을 차에 치이기 전 상황이라고 보긴 어렵다.
만약 정말 차에 치이기 전으로 돌아갔다면 내가 있을 곳은 차도가 아니라 인도여야 했을 것이다. 고양이는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래, 그건 차에 치이기 전 상황이 아니라 차에 치이지 않은 상황으로 돌아왔다고 봐야 옳아.
하지만 왜? 그건 또 어째서?
“모두 자리에 앉아라. 수업 시작한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대충 아무 책이나 꺼내 놓고 펜을 손가락으로 돌렸다.
그러다 노트에 운명의 실이라 끼적여 보았다.

운명의 실.

좋아, 그럼 내가 알고 있는 것부터 생각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