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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7화)
3. 현생과 전생 (2)
책에 의하면 운명의 실은 평생 함께할 인연을 엮어 준다는 실이지만 실제로 그런 건 아니고 모든 실은 하늘로 향해 있다.
그리고 그 실은 사람의 수명을 알려 준다.
그렇기 때문에 죽을 운명이었던 고양이의 실은 흰색을 나타냈고, 차에 치여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고양이와 내 실이 엮여 있는 걸 잡음으로써 알 수 없는 세계로 이동했고, 돌아오니 고양이의 운명은 바뀌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알고 있는 게 딱 하나 있다.
그건 두 가닥 엮인 운명의 실을 잡으면 이세계와 현대를 오갈 수 있다는 것.
고양이가 아닌, 아무 실이나 잡아도 가능할지 알 수 없고, 단순한 우연히 겹쳐 당시에만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지금까지 있던 모든 일들이 꿈일 수도 있다.
차에 치이기 직전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일들이 일어났고, 사실은 차에 치이지 않은 것이다…… 라고 생각해 보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럴 리가 없다.
아직도 당시에 일이, 생사의 결투를 한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그 전부가 꿈일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372년에 소수림왕을 통해서다. 외워라, 불교에 대해선 시험에 꼭 출제할 거니까.”
시험에 제출할 거라는 선생님 말씀에 열심히 노트에 무언가 끼적이고 있는 여학생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저 여학생 운명의 실과 내 운명의 실을 겹치게 해 보면 알 수 있는 문제지만, 망설여진다.
이곳과 다르게 그쪽 세계는 위험하기 때문에 놀러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실험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그것에 대해선 나중으로 미뤄 두자.
좀 더 확실히 답을 찾은 후, 확인해도 될 문제니까.
지금은 왜 운명의 실을 잡는 것만으로 세계 간에 이동이 가능한지를 생각해 봐야겠어.
“으으으음.”
펜으로 이마를 툭툭 건드리며 고심해 보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으음, 으으음, 하아, 역시 안 되겠어.
내가 물리학자도 아니고, 세계 간에 이동이 어째서 가능한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턱이 없잖아.
안 되겠다. 생각을 전환해 보자.
나는 고양이 실을 잡고 이세계에 떨어졌다가 다시 마오의 실을 잡고 현대로 왔다.
분명 그 상황 중간에서 고양이의 운명이 바뀐 계기가 있을 텐데…… 잠깐, 어라? 검은 고양이? 마오?
노트에 검은 고양이와 마오를 써 한데 묶어 보았다.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검은 고양이와 묘족 마오.
게다가 마오의 털색도 검은색이었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 둘은 확실히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긴 했다.
생김새뿐만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의 실을 잡고 나서 그 세계로 돌아가 가장 처음 본 자가 마오였다.
그리고 마오의 실을 잡고 나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건 고양이였고.
그것뿐인가?
고양이가 위험에 처했던 것과 같이 마오 역시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난 분명히 마오를 구했었지.
뭔가 알듯 말듯 답답하다.
현대와 이세계.
고양이와 마오.
그리고 운명의 실.
그것들이 나타내는 공통점은…….
“이렇듯 불교는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벌떡.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황한 선생님과 학생들이 일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성일아 갑자기 왜 그러냐?”
“선생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요!”
“어, 아니, 무슨, 성일아!”
가방을 둘러메고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갔다.
윤회전생!
그래, 그거야.
그 모든 것이 연관된 공통점!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잖아.
고양이의 운명의 실이 붉은색으로 돌아온 것도, 내가 엮인 운명의 실을 잡으면 현대와 이세계를 넘나들 수 있던 것도 윤회전생을 기초로 생각하면 모든 게 설명된다.
운명의 실은 평생 함께할 인연과 엮어져 있던 게 아니라, 자신의 전생과 이어져 있던 거다.
현대에선 아무리 운명을 바꾸려 해도 흰색이 된 실은 붉은색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는 가능했다.
마오를 구할 때 보았고, 마을에 살던 묘족들도 흰 실이 붉은색으로 변하는 걸 확인했었으니 확실하다.
즉, 그 세계가 고양이의 전생이라 가정한다면, 그리고 그 전생자가 마오였다면, 내가 마오를 구함으로서 전생의 운명이 바뀌어 버렸고 그와 비례해 현생의 운명도 바뀌었던 것이다.
고양이는 차에 치이지 않았다는 현실로.
그래서 나는 고양이와 함께 차에 치이지 않은 현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와, 놀라울 정도로 맞아 떨어져.
정말인 거 같아.
나는 집까지 뛰어와 곤히 자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럼 네가 마오였던 거야?”
“야옹―”
고양이는 불쾌한지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그렇다면 전생의 운명과 현생의 운명은 똑같다는 걸까?
고양이의 운명이 차에 치여 죽는 것이었고, 동시에 전생에서 마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뻔한 걸 보면 죽는 시간도 전생과 현생이 같다고 볼 수 있잖아.
“야옹―”
내가 계속 껴안고 있자 내려 달라고 하는 건지 고양이가 길게 울었다.
하나하나 퍼즐이 풀어지니 뭔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현생과 전생.
이것을 교묘히 이용하면 누구든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는 자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동생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꿀꺽, 절로 침이 삼켜졌다.
텅텅 비어 있던 희망이 불씨가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검은 고양이의 운명을 바꿨듯이 잘하면, 잘하면 여동생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투! 피하고! 팔 올려! 몸을 멈추지 마!”
“스물아홉, 서른! 좋아, 4세트 완료!”
팡팡! 퍽퍽!
다들 한창 연습 중이라 북적이는 복싱 체육관.
나는 구석에 있는 샌드백을 상대로 펀치 연습하며 고민하고, 생각하던 걸 정리했다.
어제 윤회전생이란 가설로 인해 엉켜 있던 실마리는 풀었다.
이젠 그 가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실험만 남은 상태다.
문제는 이 다음, 바로 나란 녀석의 존재다.
그 세계가 전생이라면 전생의 나 역시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전생의 나를 보지 못했다.
첫날 꿈속에서 보았던 한 남자의 기구한 인생.
당시엔 정신이 없어 금세 잊어버렸지만 지금 떠올려 보면, 그게 전생의 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현생에 나와 같이 전생에서도 나란 존재의 삶이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때 나는 전생의 나를 만나지 못했던 걸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 나는 키와 얼굴 생김새는 비슷했지만 입고 있는 옷도 달랐고 심지어 눈 색과 머리색도 달랐다.
그것뿐인가?
인간을 뛰어넘는 속도와 활력. 전부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역시 그때 나는 전생의 나였다는 걸까?
그 문제에 대해 어젯밤 하루 종일 생각해 보았다.
서로를 마주 볼 때 누군가 한 명이 사라진다는 도플갱어의 전설처럼 내가 전생으로 이동한 것 때문에 전생의 나는 사라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고, 혼만이 전생으로 이동한 것이어서 전생의 몸을 빌린 것이 아닐까 하고도 가정해 보기도 했다.
이 답에 대해선 전생으로 이동해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성일아.”
“헉, 헉. 네?”
“아니, 저기…… 괜찮냐?”
“네? 괜찮은데요?”
“……그래?”
“왜 그러세요?”
“그냥 뭐랄까, 어딘가 좀 바뀐 것 같아서. 기운? 아니, 기세가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 신경 쓰지 마라. 그냥 해 본 소리니.”
관장님은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하다 싶은 건지 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별로 마음 쓰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 쓰다뇨?”
“그때 일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좀 실수해서…… 솔직히 나는 네가 복싱 그만둘 줄 알았거든, 미안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틀 전, 여기서 입문한 지 반년도 안 된 천재 루키와 스파링했던 일이 있었지.
워낙 큰일이 한꺼번에 터져 이 일에 대해선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별일 아니니까요. 신경 쓰지 마세요.”
“별일이 아니라고?”
담담한 내 말에 관장님은 살짝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별일 아니다.
겨우 스파링 한 번 해서 진 게 어딜 봐서 큰일인가.
검을 든 상대와 생사의 결투를 했던 나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런 건 어린애 장난과도 같다.
“관장님,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으, 응? 그, 그래, 알았다.”
당황해하는 관장님께 인사하고 집으로 뛰었다.
이제 남은 건 확인하는 것뿐이다.
지금부터 상대와 엮어진 운명의 실을 잡음으로써 정말 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지, 이동한 시점이 고양이의 전생인 마오가 있는 곳인지, 그리고 그곳에서 내 전생에 대한 단서를 구하는 것까지.
그 다음, 곧바로 돌아온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손목시계를 보며 현재 시간을 체크했다.
좋아, 다섯 시 정각.
“마오, 이리 와.”
“야옹―”
언제까지 나비야, 또는 고양아라고 부르기 뭐해 마오라 이름 붙여 버렸다.
고양이도 마음에 드는지 마오라 부르면 곧바로 나를 돌아본다.
나는 마오를 안아 운명의 실을 꼬이게 만들었다.
역시나 운명의 실끼린 너무도 쉽게 엉켜 들어 신기했다.
다시 그쪽 세계로 간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무섭다.
절로 손이 떨리고 심박이 올라간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이것만 성공하면, 내 가설이 진짜로 판명된다면…….
동생을 살릴 수 있으니까.
왼손으로 오른손 팔목을 감싸 쥔 채 가슴으로 가져갔다.
후우……. 마음을 단단히, 강철처럼 무장하자.
“……이미 공이 울렸으니까.”
파직!
꽈배기처럼 꼬인 운명의 실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손안에서부터 폭발하듯 빛이 터졌고, 세상은 전과 같이 다채로운 색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번쩍 빛과 함께 내가 앉아 있던 거실은 숲속 한복판으로 바뀌었다.
“역시 그 일은 꿈이나 환상 같은 게 아니야.”
이걸로 차원 간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건 확증했다. 이제 이곳이 전생이냐를 확인할 차례인데…….
주위를 둘러보니 마오가 사는 마을이 아니었다.
그럼 전생은 아니라는 건가?
좀 더 주위를 둘러보니 저 아래 냇물이 흐르는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뒷모습뿐이지만 왜소한 체구, 입고 있는 옷차림, 그리고 머리 부근에 쫑긋거리는 검은 귀를 보고 나는 누군지 확신할 수 있었다.
“마오?”
내가 부르자 냇가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던 소녀는 놀란 눈을 한 채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서, 성일 니이이임!”
하고 외치며 눈물 젖은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우왁! 자, 잠깐! 으악!”
거의 차징을 하는 기세로 내게 안겨 들어와 덕분에 나는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성일 님! 성일 님! 으흐흑! 성일 니이임!”
“자, 잠깐, 마오, 진정해.”
내 몸에 올라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는 마오를 보니 왠지 내 배 위에서 쉬는 걸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 마오가 생각난다.
너 확실히 고양이의 전생자구나.
“그치만, 그치만! 갑자기 사라지셔서, 으흑!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고요!”
“그, 그래, 알았으니 이만 좀 내려…… 뭐? 잠깐, 내가 사라져?”
정색한 얼굴로 마오의 어깨를 잡자 당황한 마오가 똥그란 눈을 끔뻑거렸다.
“네, 그날 저희를 구해 주시고 나서 갑자기 사라지셨잖아요. 이틀이나 나타나지 않으시고…… 저희도 마을을 버리고 다른 거처를 찾아 떠나게 돼서 이젠, 으흑!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고요.”
다시 울음보가 터질 것 같아 나는 마오를 달래며 생각했다.
그래, 마을이 아닌 이런 숲속 한복판인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어쨌거나 내가 나타난 곳 바로 근처에 있는 자는 마오.
결국, 마오의 정체는 검은 고양이이며 이곳은 전생이다.
게다가 마오가 이틀 전을 언급한 것 보면 시간대 역시 현생과 똑같이 흐르는 것 같아 보였다.
문제는 내가 사라졌다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