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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8화)
3. 현생과 전생 (3)
그날 마오와 내 실이 엮인 걸 잡을 때 이곳에서 내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은 현생에서 혼만 이동했다는 가설이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혼만 이동했다면 내가 현생으로 돌아온 후, 전생의 내가 활동했거나 혼이 나간 육체혼자 지금껏 자고 있거나 해야 했으니까.
내 몸을 살펴보니 역시나 현생에 입던 옷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몇 가닥 뽑아 보니 이것도 검은 머리가 아니라 옅은 갈색을 띄고 있다.
즉, 역시 이곳에 있는 나는 현생의 이성일이 아니라 전생의 나다.
그럼 역시 도플갱어의 전설처럼 내가 전생으로 온 순간, 전생의 나는 사라져 버린 걸까?
잠깐, 전생에서 내가 사라졌다면 현생에서도 지금 내가 사라졌다고 봐야 하나?
“아냐, 그건 더 이상해…….”
“훌쩍, 훌쩍. 이상하다뇨?”
“아, 아냐.”
나는 얼버무리며 생각했다.
그래, 그건 더 이상하다.
전에 처음 현생으로 돌아왔을 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분명 그러지 않았던가.
‘야, 인마! 죽고 싶어? 왜 차도에 뛰어들고 난리야!’라고.
그럼 모순이지 않은가.
내가 돌아온 시점은 차도 한복판이었으니까.
만약 내 몸이 사라져 있었다면 ‘차도에 뛰어들었다’가 아니라 ‘차도에 나타났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성일 님?”
내가 계속 생각에 잠겨 있자 마오가 나를 부른다.
나는 일단 생각을 미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오, 다른 분들은? 마챈챈 씨는 괜찮아?”
“아! 모두 호숫가에서 쉬고 계세요! 다들 성일 님이 오시면 엄청 좋아할 거예요!”
마오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방방 뛰며 말했다.
나는 마오의 안내에 따라 묘족이 모여 있다는 호숫가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창 불을 피우며 노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나를 돌아보곤 갑자기 내게 우르르 몰려왔다.
“자네! 무사했군!”
“으하하하! 역시 살아 있을 줄 알았다니까!”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네!”
“형아 덕분에 살았어요! 나도 크면 형아처럼 주먹으로 악당들을 물리칠 거예요!”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매우 활기찬 분위기다.
분명 그날 사건으로 죽은 자들이 많았는데도 이런 분위기라니.
억지로 웃는 걸까?
“여, 성일 군 왔나? 갑자기 사라져서 고맙다는 말도 못하지 않았나.”
마챈챈 씨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이곳 묘족의 수장이라 그런지 마챈챈 씨가 다가오자 모두들 길을 터 주었다.
“안녕하세요. 그…… 죄송해요. 부득이하게 사라져서.”
“아니네, 오히려 사과해야 할 건 우린데 무슨 말을 그리하나. 그보다 내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잘됐군.”
“하고 싶은 말이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림과 동시에 마챈챈 씨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챈챈 씨?”
마챈챈 씨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보러 온 모든 묘족들이 마챈챈 씨처럼 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을에 초대한 손님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내 딸은 물론이고, 그대는 우리의 목숨까지도 구해 줬네. 평생 갚아도 모자를 큰 은혜, 영원히 잊지 않을 걸세. 부족하지만 나, 떡잎나무족의 수장 마챈챈의 이름으로 여기서 맹세하네. 이성일 군을 우리 떡잎나무족의 영원한 친우로 맞이하며 그대가 위험에 처하는 날, 우리 일족은 최우선적으로 그대를 도와줄 것을.”
마챈챈 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릎을 꿇은 묘족들은 다 같이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에 나는 당황해 입만 뻐끔거렸다.
“전 그런 걸 바라고 도와드린 게 아닌걸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네. 그저 묘족으로서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의리네. 자네는 우리의 친우가 되기 싫은 건가?”
마챈챈 씨가 물어보자 주위 묘족들이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참, 나에 대한 정보만 알아보고 곧바로 현생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알겠어요. 그만 일어나세요.”
“그럼, 우리를 친우로 받아 주는 건가?”
“네. 어차피 처음부터 남이라고 생각 안 했는걸요.”
“으하하하하! 역시 그래야 내가 아는 성일 군이지! 들어라! 오늘은 매우 기쁜 날이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 술이 빠질 수 없지 않겠는가!”
“축제다!”
“부어라! 마셔라! 오늘은 하늘도 춤추는 날이다!”
내가 허락하기 무섭게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춤추며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언제 가져온 건지 벌써 거대한 술통도 운반되고 있었다.
그날 얼떨결에 축제에 참가해 밤늦도록 어울려야 했다.
“성일 니이임, 음냐음냐. 이제 어디 가시면 안 되요오오?”
마오는 딱 두 잔 마시고서부터 나한테 딱 붙어서 주정부렸다.
벌써 저 말만 열한 번째다. 갑자기 사라진 게 어지간히 속상했었나 보네.
“마오, 그만 자거라.”
“아빠아아? 헤헤, 아빠아아!”
마챈챈 씨는 엉겨 붙으려 하는 마오를 번쩍 들어 올려 낙엽으로 만든 침대에 풀썩 던져 버렸다.
마오는 잠깐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고롱고롱 잠에 빠져들었다.
“하여튼, 누굴 닮아서 주정은. 자네, 괜찮나?”
“아, 괜찮아요. 얼마 안 마셨거든요.”
실재로 술은 엄청 권했지만 몇 잔 마시지 않았다.
내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절제한 것이다.
“그, 이제 와서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뭔데요?”
“자네는 기사인가?”
“기사요?”
“그때 보여 준 속도. 그건 평범한 자가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네. 하물며 기사와 맞대결해 이기지 않았는가.”
“그건 그냥 우연이에요. 어쩌다 보니 이겼을 뿐이죠.”
“……그럼 자네는 누구인가.”
“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이성일이라고 소개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저는 마법사 귀족 가문의 자제였던 거 같아요.”
“……였던 거 같아? 그게 무슨 말인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기, 기억상실이란 말인가?”
딱히 뭐가 변명하기 뭐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론 저는 마법사였던 것 같아요. 솔직히 지금 마법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러다…… 아! 그래서 말인데. 마챈챈 씨. 혹시 마나증폭이란 비원의 술에 대해 알고 계신 거 있으신가요?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왔다던데.”
“마나증폭? 그건 왜 묻는가.”
“제가 그 비원의 술을 사용하려 했던 것 같거든요.”
“뭐, 뭐라고?!”
마챈챈 씨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만취한 묘족 몇몇이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지,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는가! 어찌 미치지 않고서야 그 술법을!”
소리 지르는 바람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마챈챈 씨는 그제야 헛기침하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네. 그 술법은 몹시 위험해 지금까지 성공한 자가 한 명도 없다고 말이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 딴에는 죽음의 술법이라 부르네. 그 위험한 술법을 시도하려 했다니, 대체…….”
“그렇군요. 대충 알겠어요.”
어렴풋이 기억하기론 꿈속에서도 그 술법이 몹시 위험하다고 언급했었다.
그리고 아마 전생의 나는 시도했을 것이다.
문제는 성공의 여부인데…… 내가 이렇게 전생의 몸을 빌려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성공했다고 봐야 하는 걸까?
“그럼 이것만 물어볼게요. 그 마법사라는 건 뭔가요? 저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도 있나요?”
“그럴 리가. 마법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적어도 신체 능력이 좋다고는 들어 본 적은 없네. 그들은 마나를 이용해 없는 것을 창조하는 자들이야. 육체 능력은 오히려 떨어진다고 하던데.”
즉, 내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좋은 건 마법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비원의 술법 때문이라는 뜻이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묘족의 수장인 마챈챈 씨가 모를 정도면 대부분 묘족들도 모를 것이라 판단한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는가.”
“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요. 죄송하지만 먼저 가 볼게요.”
“중요한 일인가?”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챈챈 씨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술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자네 변했구먼.”
“변해요?”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말일세.”
관장님도 그러셨다.
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그런데 마챈챈 씨까지 같은 소리를?
“처음 볼 땐 살짝 만지면 부서져 버릴 것처럼 불안불안했었지. 마치 모래로 만든 인형 같이 말일세. 그런데 지금은 단단해 보이네, 이 바위처럼.”
마챈챈 씨는 등 뒤에 기대고 있는 바위를 툭툭 치며 말했다.
단단해졌다라. 그는 나의 내적인 부분을 말하는 걸까?
“예전 같았다면 막아 세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자네라면 내가 말려 봐야 막을 수 없겠지. 하지만 말이네…….”
그는 잠시 뜸들이다 뒤에 곤히 자고 있는 마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적어도 마오에게 간다고 말해 주지 않겠는가? 그대로 떠나면 분명 전처럼 며칠이고 울 거네.”
“네? 설마 제가 사라지고 나서 울었어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잔뜩 풀이 죽어 있었지. 내 참, 아비로서 그 모습을 다시 보려니 가슴이 미어지는구먼.”
하, 설마 그럼 아까 냇가에서 남몰래 울고 있던 거야?
어쩐지 뭔가 눈가가 촉촉해 보인다 싶었는데…… 나 참.
“그럼 마오에게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전해 주세요.”
“우리가 어디에 정착할지도 모르는데 자네가 어찌 찾아온다는 말인가.”
“찾아올 수 있어요.”
내 방에 검은 고양이 마오만 쭉 있어 준다면.
“허 참, 정말이지 자네에 대해선 알다가도 모르겠구먼. 알겠네. 그 약속 믿어도 되겠지?”
“네, 나중에 일이 다 끝나면 찾아 뵐게요. 맹세해요.”
“알겠네. 그럼 다음에 찾아올 날을 기대하고 있지. 그런데 이미 밤이네만 괜찮은가? 적어도 날이 밝은 다음 떠나는 게…….”
“상관없어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마챈챈 씨의 운명의 실과 내 운명의 실을 엮이게 만들었다.
마챈챈 씨는 자신의 손등 위에 내 손을 빙빙 돌리자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나는 짧게 인사하며 엮어진 실을 움켜잡았다.
파직!
노이즈와 함께 세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마지막 실험.
나는 그 변화를 보며 마오뿐만이 아닌, 다른 어떤 자와도 운명의 실만 엮이게 하면 이동이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아, 역시 이곳도 밤이네.”
손목시계를 보니 밤 8시 15분.
전생에서 대충 세 시간 정도 머물렀으니까 얼추 맞는 시간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엔 마오가 아닌 마챈챈 씨의 운명의 실을 타고 돌아왔으니 이 근처에 마챈챈 씨의 현생이 있을 거라 생각해 둘러본 것이었다.
“저 사람인가.”
근처에 사람이라곤 한창 고장 난 오토바이를 손보고 있는 거한의 아저씨뿐이었다.
덩치만으로 보면 대충 마챈챈 씨와 비슷하다.
그럼 저 사람이 역시 마챈챈 씨일까?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문득 거리가 몹시 낯설다는 걸 자각했다.
동네라면 로드워크 때문에 모를 리가 없는데, 완전히 처음 보는 거리인 것을 보니 좀 멀리 나와 있는 것 같았다.
후, 어쩔 수 없네. 저 사람에게 물어볼까.
“저, 실례합니다.”
“응? 뭐냐.”
“죄송하지만 여기가 어디죠?”
“엉? 여기 송도잖아.”
“송…… 도요?”
“송도. 송도 몰라? 인천 송도!”
“이, 인천이요?”
생각도 못했다.
설마 마챈챈 씨의 현생이 인천에 있었을 줄은.
아니, 생각해 보니 이러는 게 당연하잖아.
모든 현생자가 우리 동네에 있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이놈 왜 이래? 정신 나갔나. 아까부터 멍 때리며 돌아다니더니 길이라도 잃었냐?”
“네? 제가 돌아다녀요?”
“아까부터 요리조리 돌아다니더만. 벌써 세 번 마주쳤잖아. 길 잃었으면 저 왼쪽 편에 경찰서 있으니까 거기로 가라. 난 바쁜 몸이다.”
마챈챈 씨로 추정되는 아저씨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젓곤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