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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9화)
3. 현생과 전생 (4)


전생처럼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나는 게 아니라 지금껏 나는 이 주위를 돌아다녔다라…….
이걸로 확실히 알아낸 게 있다.
운명의 실을 잡음으로서 나는 전생자와 현생자가 있는 곳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면 순간이동 같이?
하지만 현생에서는 순간이동이 아니다.
평행 세계처럼 인천에 오지 않은 미래와 인천에 온 미래가 나뉘어졌고, 나는 인천에 온 미래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선…….
나는 급히 폰을 꺼내 복싱 체육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다 관장님이 받으셨다.
“여보세요, 관장님?”
[어, 성일이냐? 갑자기 전화는 왜?]
“제가 오늘 체육관에 들렀었나 해서요.”
[무슨 소리야, 오늘 인천에 볼일이 생겨 오지 못한다고 했잖아.]
“아차차, 그랬었지. 죄송해요. 아,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끊을게요. 내일 봬요!”
급히 폰을 끊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적어도 인천에 오는 시간은 한 시간.
즉, 한 시간 동안 체육관에서 연습했던 시간은 사라지고만 것이다.
“체육관에서 연습한 뒤, 집으로 돌아와 마오의 운명의 실을 잡은 현실이 아니라, 한 시간 동안 인천으로 온 현실로 돌아왔다는 건가. 이거…… 생각보다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인천에 온 것만 해도 이렇게 운명이 바뀌어 버릴 정도인데, 만약 외국으로 이동해 버린다면?
최소 며칠간의 운명이 바뀌어 버릴 것이다.
아니, 잘하면 근본부터 뒤틀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애초에 내가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 살았다는 걸로.
무섭다.
단순히 운명의 실을 타고 전생과 현생을 넘나드는 것뿐인데 이 정도로 운명이 바뀔 정도라면 다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나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동생은 살 수 없다.
내 인생 따윈, 미래와 운명은 다 내줘도 상관없다.
대신 하나만 바랄 뿐이다. 제발 내 동생이 살아서 웃을 수 있기를.
“하아, 그나저나 돈도 없는데 어찌 돌아가나.”
그건 그거고 일단 한숨부터 나오는 밤이었다.



4. 동생의 운명을 바꾸다 (1)


새벽녘 밤에 후드를 푹 눌러쓰고 병실로 갔다.
이미 취침 시간이 한참 지난 터라 병원은 조용했는데, 동생의 보호자로서 난 허락받은 상태라 제지당하는 일 없이 동생이 있는 중환자실까지 찾아갈 수 있었다.
모두가 잠든 밤.
내가 찾아오니 동생은 인기척을 느낀 건지 눈동자만 굴려 나를 돌아보았다.
“나 왔어.”
역시 주위엔 아무도 없다.
뭐,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이 시간을 선택해 찾아온 거지만.
나는 그대로 서 있기 뭐해 보조 의자를 가져와 동생 옆에 앉았다.
동생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저번에 미안했어. 말없이 나가서 속상했지?”
동생의 눈동자가 천천히 좌우로 돌아갔다.
저건 거짓말일 것이다.
분명 누구보다도 가슴 아팠겠지. 자기 탓이라며 속으로 무수히 울었겠지. 난 알 수 있다. 쭉 함께 살아온 동생이니까.
나는 말없이 동생의 손을 잡았다. 언제나처럼 하던 의식.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르다.
오늘만큼은 이 손을 잡고 동생의 운명을 바꿀 거니까.
어제 모든 상황은 확인했다.
이제 이 운명의 실을 이용해 운명을 바꾸는 일만 남은 것이다.
“나을 수 있을 거야. 내가 낫게 해 줄게. 기필코,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왼손으로 오른손 팔목을 감싸 쥔 채 가슴으로 가져가며 말하자 동생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아아, 이 습관 지현이도 잘 알고 있었지.
똑똑한 아이니 내가 위험한 짓을 할 거란 걸 눈치챈 걸지도 몰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네가 다시 웃을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내 손을 잡으며 ‘오빠’라 부를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미안, 지현아. 공은 이미 울렸어.”
동생 손에 감겨 있는 흰 실을 내 운명의 실과 겹치게 했다.
그러자 색이 다른 두 실은 서로 인사하듯 휘감기며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갔다.
내가 기필코 구해 줄 테니까 병이 나으면 우리 둘이 함께 아버지 묘에 가자.
절도 하고, 술도 뿌리면서 이제 행복하게 살 거라고 그렇게 말씀드리자.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나는 엮어진 실을 움켜잡았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날 반긴 건 장미향이었다.
따뜻하면서도 향기로운, 가끔 동생에게서 나던 그런 향.
어디인지 잘 모르겠지만 벽에 걸린 오일 램프를 의지해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래도 실내 같았다.
같았다라고 말한 이유는 따로 없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높이의 천장, 오른쪽 면은 밖과 연결되어 있는 건지 거대한 커튼이 벽 자체를 가리고 있었고, 왼쪽 편에는 검, 갑옷, 꽃 등, 온갖 장식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그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바로 정면 벽에 쳐져 있는 오각형의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떡하니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스름한 불빛 속이라 자세히 관찰하긴 어려웠지만, 얼핏 보기엔 불꽃 문양을 띈 로고가 수놓아져 있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돈깨나 썼을 듯한 방이었다.
이곳은 검을 쓰고 기사가 있던 것 보면 중세 시대쯤 되는 것 같던데…… 그렇다면 여긴 어느 귀족 집안의 방인 걸까?
난 감상을 뒤로하고 좀 더 주위를 살펴보았다.
지금 나는 동생의 실을 타고 들어왔으니 분명 이 근처에 동생의 전생자가 있을 것이다.
바보 같이 넋 놓고 감상할 때가 아니야.
마음을 다잡고 좀 더 주위를 둘러보는 그때, 저 멀리 어두운 구석에 있는 침대를 발견했다.
그 침대는 전체가 반투명한 실크로 가려져 있었다.
어느 영화에서 보던 공주의 침대 같이 몹시 아름다운 침대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침대로 다가갔다.
이 새벽에 동생의 전생자가 있을 만한 곳이라면……!
잔뜩 긴장한 채 나는 조심스럽게 실크를 들췄다.
안쪽은 어두워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미약하게 들리는 숨소리로 보아 확실히 누군가 자고 있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아예 실크를 걷어 불빛이 침대 안까지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러고 그렇게 해서 나는 볼 수 있었다.
동생 전생의 모습을.
등 뒤로 돌아누운 상태라 얼굴을 확인하긴 어려웠지만, 덮고 있는 이불의 볼록한 크기를 보아 지금 여동생과 비슷한 나이 또래 소녀 같았다.
물론 남성일 수도 있지만 내가 여성이라 확신한 이유는 침대 전체에 흐트러져 있는 긴 붉은 머리칼 때문이었다.
“으으음…….”
그때, 내 기척을 느낀 건지, 아니면 불빛 때문인지, 몇 번 뒤척이던 소녀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
소녀는 저혈압인지 일어나고도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는데, 그때 속눈썹에 감추어져 있던 황금빛 눈동자를 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소녀가 아름다웠기에 그런 게 아니다.
너무도 내 동생과 똑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기다란 눈썹, 오똑한 코까지…….
동생이 병에 걸리지 않아, 먹을 거 잘 먹고 있었다면 저런 모습일까?
현생과는 다르게 건강해 보이는 소녀였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내 동생이라고.
그래, 저 소녀가 동생의 전생자인 게 틀림없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아무리 머리색과 눈동자색이 달라도, 아무리 얼굴 살이 붙었다 해도 내가 친동생을 어찌 몰라보겠는가.
정말 다행이다, 건강해 보여서……!
안도감에 두 손 모아 가슴으로 가져가며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꾹 눌러 참았다.
숨이 가빠지고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곳에 오기 전, 내가 가장 최악으로 생각한 건 바로 현실과 같이 이곳에 있는 전생자도 병에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이곳도 현생처럼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나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어떤 극악한 죽음이 예정돼 있어도 좋으니,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기를.
그런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상태에서 저렇게나 건강해 보이는 동생을 만나니 긴장이 탁 풀린 것이다.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소녀의 손을 꼭 잡았다.
언제나 병실에서 하던 의식처럼 조심스럽게, 그리고 강하게.
평소 딱딱하게 굳어 버린 손의 감촉이 아니라 스펀지처럼 말랑말랑한 온기 있는 감촉.
따스한 체온, 살 붙은 손가락, 부드러운 근육까지 하나하나 전부 건강하다.
온몸의 근육은 물론이고, 혀 근육까지 굳어 말도 못하는 동생이 아닌, 한 사람의 몫을 당당히 해낼 수 있는 다부진 몸이 틀림없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으음, 누구……?”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소녀가 그제야 내 존재를 느낀 건지 부스스 일어나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우리 둘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
“…….”
한동안 소녀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로선 딱히 할 말이 없어 바라보았고, 소녀는 이 상황을 재빨리 인지하지 못해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흐르고 소녀는 비로소 지금 상황을 인식한 건지 점차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입도 천천히 벌어지고 눈가엔 눈물도 맺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방 안 전체가 비명 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거기 누구냐! 침입이다! 어서 지원을!”
“웬 놈이냐! 아가씨에게서 떨어져!”
비명이 울리기 무섭게 거대한 문이 열리고 세 명의 갑옷 입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나를 향해 검을 뽑았다.
“자, 잠깐만요! 오해입니다!”
다짜고짜 검을 휘두를 기세라 나는 황급히 두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나를 빙 둘러 포위했다.
“아가씨, 무사하십니까!”
“네놈! 감히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정체를 밝혀라!”
피부가 아릴 정도로 살기가 느껴졌다.
뭐라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숨이 턱 막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만! 이게 무슨 일이냐!”
일은 더 커져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방으로 우르르 몰아닥쳤다.
그중 가장 덩치 큰 흰 수염의 노장이 대찬 목소리로 소란스러운 상황을 종결시켰다.
“충! 신원을 알 수 없는 자가 아가씨 방에 침입했습니다!”
“침입?”
“보초의 눈을 피해 침입한 걸로 보아 텔레포트 마법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아니, 이곳은 방호 마법이 걸려 있을 텐데. 설마 고위 마법산가? 뭐하느냐! 어서 불을 밝히지 않고!”
노장 명령에 몇몇이 오일 램프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까지 노장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불이 밝혀지자 나를 찢어 죽일 것 같았던 눈이 당황으로 변했다.
“도, 도련님?”
이 상황을 어찌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도 당황했다.
지금 도련님이라고? 나한테?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하룬…… 님?”
이불로 몸을 가린 채 벌벌 떨고 있던 소녀도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저들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도, 도련님 한 달 만에 돌아오셔서 이게 대체 무슨…….”
노장은 참담한 얼굴로 나와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저기, 아닙니다. 실은 제가 오라버니를 불렀어요. 비명을 지른 건…… 단지 실수입니다. 그러니까, 오해예요.”
“이세트 아가씨…….”
어째선지 소녀가 오히려 나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왜일까? 노장과 같이 소녀의 눈빛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
“…….”
그뿐만 아니라 방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이들과 비슷한 눈이었다.
저 눈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마치 천하에 막돼먹은 놈을 마주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어 참고 있는 듯한 눈빛?
나중에 가서야 나는 이 저택의 셋째 아들이었으며, 평소 하인들과 막내 동생을 괴롭히며 지낸 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