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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10화)
4. 동생의 운명을 바꾸다 (2)
내 전생자의 이름은 하룬 러셀 윈덜트.
대 윈덜트 후작가의 셋째 아들이다.
내 위로는 두 명의 형과 누이, 아래로는 침대에서 마주쳤던 막내 여동생까지 4남매였는데, 한 달 전, 나는 가출했고 오늘 돌아온 것이라고 아침에 찾아온 시녀가 말해 주었다.
“귀족가의 도련님이라…… 내 전생자는 파란만장했었구나.”
얼핏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지만, 설마 왕국에서도 입김이 높은 후작가문의 자제였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멍하니 일어나 커튼을 들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몇 층인지는 모르겠으나 창밖에는 미로처럼 꾸며진 거대한 정원과, 사람과 마차가 지나가는 대로가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다.
정말 얼마나 넓은지 저 끝에 저택 대문이 콩알만 하게 보일 정도다.
“정원 수준이 아니잖아, 이거.”
어제 시녀가 내 방이라며 안내해 준 곳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컸는데, 여긴 극히 일부에 불과했던 것 같다.
창밖 감상을 그만두고 침대로 돌아와 털퍽 누워 버렸다.
“이토록 부유한 저택에 사는 소녀가 어째서 죽는 거지?”
그날 밤…….
침대에서 마주쳤던 동생의 전생자인 이세트 에덴 윈덜트란 소녀.
그녀가 동생의 전생자인 이상 근 시일 내에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대체 어떤 형식으로?
너무도 평범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이 후작 가문의 금이야 옥이야 하는 넷째 아가씨인지라 항시 전속시종과 호위 기사를 대동해 다니기 때문에 위험 요소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간단히 알아본 바로는 이세트에게 크나큰 병도 없었다.
그렇다면 근 시일 내에 사고가 일어난다는 말인데…….
없는 고민을 할 바엔 지금 당장 그녀를 쫓아 다니는 게 나을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옷을 입고―옷장에 화려한 옷들이 가득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무난해 보이는 옷을 고르느라 사실 애먹었다―문을 나섰다.
문밖에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거대한 복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막막할 정도로 큰.
“옷 갈아입혀 준다고 했을 때 그냥 잠자코 있을 걸 그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시녀를 붙잡아 둘 걸하고 크게 후회했다.
“들었어? 어제 가출하신 셋째 도련님이 돌아오셨다는 거?”
“듣고말고! 돌아오시자마자 하신 일이 막내 아가씨를 덮치는 거였다며?”
“평소에도 그렇게나 괴롭히더니 더 천하에 망나니로 돌아왔다지 뭐야.”
“그 착한 이세트 아가씨에게 어쩜 그럴 수가 있지?”
대충 아무 길이나 잡고 걸어가는데 맞은편 모퉁이에서 작은 대화 소리가 들렸다.
보아하니 이 저택의 시녀들 같은데…… 저거 지금 내 얘기 아냐?
“너희들! 무슨 잡담을 하고 있느냐!”
“에구머니나! 죄, 죄송합니다, 시녀장님!”
“쯧쯧, 저리 입이 가벼워서야.”
어느 푸짐한 덩치의 아주머니로 인해 시녀들의 수다는 끝나고 말았다.
나는 시녀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시녀장이란 아주머니만 남은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잠시 만요.”
“하, 하룬 도련님! 조, 좋은 아침입니다.”
아주머니는 식은땀을 흘리며 내게 인사했다.
아무래도 시녀들의 수다를 내가 들은 걸 걱정하는 것이리라.
“뭔가 하명하실 일이라도…….”
“음, 어쩌다가 얘기를 듣게 되었는데요.”
난처하게 웃으며 서두를 꺼내는데 갑자기 아주머니가 참담한 얼굴이 되더니 그 자리에서 무릎 꿇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만!”
“아, 아니, 저기, 그게 아니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시녀들은 제가 엄히 다스릴 테니 제발 목숨만은!”
아니, 무슨 이런 일로 목숨까지 논하는 걸까.
“저기, 진정하세요. 별로 상관없으니까.”
“별로 상관…… 없다고요? 그보다 도련님, 어째서 제게 존댓말을.”
아차, 귀족가의 도련님이니 말투도 달랐겠구나.
나는 잠시 어쩔까 고민하다 그냥 편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붙잡은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간단히 여행 도중 머리에 충격을 받아 기억상실에 걸려 부분적으로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둘러댔다.
아주머니는 시종일관 멍하니 내 얘기를 듣다 끝에 가서야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세상에! 어쩜 그런 일이!”
“그래서 좀 묻고 싶어요. 아까 시녀들이 한 얘기 뭐죠?”
“저…… 그게 그러니까…….”
아주머니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순화해 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나, 하룬 러셀 윈덜트는 고위 마법사로 정평이 난, 윈덜트 가문의 순수 혈통이었지만 오점이라 할 만큼 재능이 없는 자였단다.
거기까지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미 꿈속에서 보아 알고 있었던 거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다.
누이, 형님 모두 나를 무시했고, 아버지마저 외면해 술을 마시거나 저택에서 난동 피우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려 달라 하니, 처음엔 한사코 별일 없었다고 손을 내젖기에 무언가 했더니 정말 가관이 따로 없었다.
“그러니까…… 스트레스 해소로 시녀들을 때리고 심지어 고문도 했었다고요?”
“고, 고문이 아니라 단지 잠을 자지 못하게 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고문이잖아.
세상에 맙소사!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시녀와 영지 기사들을 괴롭혔단다.
얼마나 정도가 심했던 건지 몇몇 시녀는 정신이 나가 미쳐 버렸고, 어느 기사는 다리가 잘려 고향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언제는 손님으로 온 귀족가 아가씨를 강간한 적도 있단다.
말로는 그 귀족가 아가씨가 나에게 ‘사생아’라 욕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하는데, 내가 보기에 전생자는 그냥 미친놈 같았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나는 이세트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머니는 이세트를 거론하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지 엄청 당황했지만 보챔에 못 이겨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설마 했건만 나의 주된 괴롭힘 대상자는 다름 아닌 이세트였단다.
어째서?
아무리 그래도 이세트는 친여동생이 아닌가.
이유를 들어 보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막내 동생 이세트.
그녀는 순수 혈통이 아닌, 노예 어미에게서 태어난 이복동생이었던 것이다.
마법적 재능만큼은 누이와 형님보다도 뛰어난 신동.
나이가 13세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5서클을 바라보는 천재 중에 천재.
나는 거기까지 듣고 내 전생자가 어째서 이세트를 괴롭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순수 혈통인 자신은 재능이 없는데, 천출 출신인 이복동생이 천재라 추앙 받으니 마지막 남은 순수 혈통의 프라이드까지 무너져 내렸겠지.
내가 예상한 대로 전생자는 이세트를 볼 때마다 순수 혈통을 논하며 그녀를 멸시하고, 배척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천출 출신은 동생으로 인정하지 못한다며 오라비라 부르지도 못하게 했다고 하니,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더불어 어째서 그날 이세트가 나에게 하룬 님이라고 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뿐인가요?”
“뭐 그렇다고 할 수…….”
“더 있군요. 말해 줘요.”
“……하아, 알겠습니다.”
언제는 높은 나무 위까지 올라가게 했다가 떨어트린 적도 있단다.
덕분에 이세트는 지금도 고소공포증에 시달려 비행 마법만큼은 전혀 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곳도 싫어해 방도 1층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사실 그건 별일도 아니다.
진짜 심한 건 이세트가 먹는 음식에 독을 섞어 며칠간 사경을 헤매게 한 적도 있다는 것.
신관의 힘으로 겨우 죽음은 모면했지만, 그때의 후유증으로 붉은색을 잘 보지 못하는 시력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불꽃의 마법으로 정평이 나 있는 윈덜트 가문의 사람이 붉은색을 보지 못하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한 경우란 말인가.
이제야 그날 밤의 실마리가 풀렸다.
즉, 이런 거다.
그날 있던 사건은 평소 내 행실을 알기에 모두들 한밤중에 돌아온 내가 이세트를 덮치려 한 걸로 오해했고 내가 이 가문의 혈통 직계이기에 우야무야 넘겨 버렸다는 것.
이세트도 그걸 알기에 나를 옹호했던 것이다.
천출 출신인 자신에 의해 순수 혈통인 내가 벌을 받게 할 순 없으니까.
예전부터 그래 왔듯이 지금도 그저 속으로 삭히며 넘겨 버린 것이리라.
정말 내 이미지는 최악이구나…….
가출한 것도 모자라 한 달 만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다는 게 자신의 여동생을 덮치는 거라니.
지금까지 전생자가 한 짓을 생각해 보면 오해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다.
“이세트는 지금 어디 있나요?”
그 물음에 아주머니의 얼굴이 어젯밤 보았던 사람들처럼 어둡게 변했다.
지금 내가 이세트에게 해코지하러 갈 거라 생각한 건가?
“아침마다 정원을 산책하시니 아마 지금쯤 정원에…….”
“알았어요, 고마워요.”
이미 박혀 버린 내 이미지에 대해 하루 종일 변명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그냥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후일담이지만 아주머니…… 그러니까 시녀장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천하에 망나니라 불린 내가 고맙다고 인사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나?
“도, 도련님. 조,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네, 네?”
“좋은 아침이라고요. 아, 정원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그게, 저쪽…….”
“고마워요.”
만나는 시녀마다 길을 물어보길 세 번.
어째서인지 모두들 나를 보면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더니 후엔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하나같이 다 똑같아 어쩐지 씁쓸하다.
어쨌거나 물어물어 나는 정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원은 아까 창문에서 보았듯이 무척이나 넓어 이세트를 찾기는커녕 내가 길을 잃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정원을 관리하고 있는 풍성한 수염의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물었다.
“실례합니다.”
“응? 앗, 도,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이른 아침에 여긴 어쩐 일로…….”
할아범은 밀짚모자를 벗으며 내게 인사했다.
모자를 벗자 반쯤 벗겨진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내 인사에 할아버지는 흰색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래도 역시 연륜이 있어서인가?
시녀들과는 다르게 침착한 모습을 유지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물어볼 것이란 게…….”
“이세트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 해서요. 정원에 있다고 들었거든요.”
이번엔 눈에 보일 정도로 구겨지는 인상.
그는 잠시 입을 꾹 다문 채 고심하더니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죄송합니다. 정원은 워낙에 넓어서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모르겠다고 딱 잘라 말했지만, 어째선지 나는 이 할아버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거짓이라면 그 이유가 이세트를 망나니인 나에게 보호하기 위한 것일 테지.
그렇다면 아무리 설득해도 들어주지 않으리라.
“알겠습니다. 직접 찾아보죠.”
“도, 도련님. 이 넓은 정원을 혼자서 찾으시겠다고요?”
“그럴 셈입니다만.”
할아버지는 내 즉답에 몹시 당황했다.
그의 흰 눈썹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도련님이 직접 이세트 아가씨를 찾으시려는 건지 모자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잘못된 건가요?”
“평소에는 시종을 불러 직접 방으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곳도 천한 노예의 냄새가 배어 흙을 밟는 것조차 싫어하시지…… 죄, 죄송합니다.”
그는 내가 노했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런가.
하긴, 전생자가 이세트를 천하게 여겼다면 자신이 직접 이세트를 찾는 경우는 없었겠지.
시종 부르듯 명령해 부른 게 자연스럽다.
하아…… 그런 건가.
“저는 동생을 아랫것 대하듯 명령해 부를 생각 없어요. 하물며 이곳도 천한 노예의 냄새가 배어 있는 곳이라 생각 안 하고요. 죄송합니다.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이곳은 소중한 공간일 텐데 마음대로 말해서.”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꽃에 대해 별로 관심 없는 나도 한순간 아름답다 생각할 정도로 정원은 잘 관리되어 있었다.
이 할아버지가 자식처럼 정원을 돌봐 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그런 소중한 곳을 천한 노예의 냄새가 배어 있다고 말하다니, 철부지 전생자를 한 말이지만 지금은 내가 대신하고 있기에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